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강용규목사

성도의 애국2009.08.21강용규목사▒▒▒ 로마서 9:1~13

성도의 애국2009.08.21강용규목사▒▒▒ 로마서 9:1~13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서명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독립이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을 당시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을 세계에 알린 기구는 세계개혁교회연맹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를 보면 기독교 안에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는 교회 병원 학교등을 곳곳에 세워 치료와 교육에 전념했으며 특히 남녀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할 뿐만 아니라 평등을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저는 집회에 참석차 지방으로 내려가다가 “교회신축 결사반대 ”라는 플랭카드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사”라는 말은 ‘죽음을 내놓고 반대한다.’는 말인데 하나님의 성전 짓는 일을 두고 이와 같은 과격한 표현을 보니 씁쓸하면서도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예수님을 믿는 바로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잘못된 이해가 있습니다. 믿음 안에 사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또한 우리는 대한민국 백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칫 우리는 하나님나라 백성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敎國不二’ 즉 종교와 국가는 둘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전체적으로 흐르는 사상은 이스라엘을 위하는 일이 곧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고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곧 이스라엘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그 땅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출애굽기에서도 모세는 금 신상에 절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려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아 애굽의 상인에게 팔리는 신세가 됩니다. 갖은 고생 끝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이라는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 때 온 나라에 기근이 들었고 형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애굽으로 왔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버린 형들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며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형들과 우리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먼저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민족을 사랑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올해 우리나라는 광복 64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국력이 세계 13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기독교의 현실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놓여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람들로부터 영광과 존귀를 받을 수 있도록 나라를 사랑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데 중요한 것은 먼저 나라의 아픔을 바로 우리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벨론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느헤미야 다니엘 에스더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느헤미야는 왕께 술을 바치는 술관장으로서 왕 곁에서 왕의 안위를 돌볼 뿐만 아니라 왕으로부터도 신임을 받는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고향으로부터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 소식은 이스라엘에 남아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며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훼파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동족의 마음이 바로 자신의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임에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져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민족의 아픔에도 무감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여러 번 우셨습니다. 눈물은 아픔을 같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자신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이 받을 환난을 생가하면서도 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며 가슴 아파 우는 여인들을 보면서도 함께 우셨습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태어났는데 몸둥이는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것입니다. 이 아이를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랍비가 말합니다. “한쪽 머리에 아픔을 주어라. 그때 다른 쪽 머리도 아파하면 이 아이는 살려두고 한쪽 머리는 아파하는데 다른 쪽 머리가 아파하지 않으면 머리가 둘이고 몸둥이는 하나인 두 사람이다. 한 몸둥이에 두 사람이 살 수 있느냐? 그것은 죽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 이 둘은 서로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나라를 사랑하는 일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굴 속에 들어갈 줄 알면서도 민족을 위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동족을 위해서 3일 동안 금식한 후 ‘죽으면 죽으리다’는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우리도 개인을 넘어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 시간마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리십시오.

마지막으로 우리는 나라를 위해 일을 해야 됩니다. 느헤미야는 동족이 고통받는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 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벨론을 떠나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 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위에 있는 권력에게 순복하라. 위에 있는 권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권력이라면 나라의 질서와 법도를 지켜야 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의무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도 미래에 “기독교 때문에 오늘 이 나라가 이렇게 되었고 기독교가 이 나라를 살렸다.” 는 말을 듣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