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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강용규목사

충성2009.08.10강용규목사▒▒▒ 요한계시록 2:8~11

충성2009.08.10강용규목사▒▒▒ 요한계시록 2:8~11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아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은 자신이 보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충성하는 분이셨습니다. 사람에게 충성하던 그 분은 결국 좋은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미국 몬타나주에서 어떤 농장 주인이 딸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옆집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축하선물로 주었습니다. 딸이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가 집을 비우고 나간 사이 딸은 개와 함께 몬타나숲으로 걸어갔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딸과 개가 보이지 않자 아이와 개를 찾아 헤맸고 결국 집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는 지쳐서 기진맥진했고 중상을 입은 개는 죽기 직전이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늑대 두 마리가 죽어 있었습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개는 늑대 두 마리와 싸웠던 것입니다. 개는 아이에게 충성했습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충성은 두 사람에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충성은 오직 한 분에게 해야 합니다. 믿는 우리는 오직 한분 이신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 개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십니까?”그러면 여러분은 모두 “아멘”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73편 1절에서 시편 시인은 “하나님이 정말 세상을 다스립니까?”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한다면 어떻게 악인이 번성한단 말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하박국 예언자도 강포로 인해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고통을 주는 것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까?”라며 질문을 제기합니다.

여러분에게 한 번 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당연히 “아멘”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이 잘 되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상황에서 정말 하나님은 사랑이신가? 라는 물음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두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실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실망’이라는 이 말은 객관적인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께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실망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향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자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실망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자기체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날 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찔림이 자신의 허물이요 예수님의 상함이 자신의 죄악을 인함임을 고백할 때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고백도 하나님의 다스림이 자신의 체험과 고백이 될 때 감사와 충성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도 객관적이 아닌 예수님과 개인적인 만남과 체험이 있는 사람이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머나는 지중해 해안가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로마식으로 서구화된 도시입니다. 그곳에는 ‘파고스’라는 언덕이 있는데 언덕에는 로마 신을 섬기는 신전과 예수님 당시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하는 신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머나는 로마와 그 황제에 충성한 도시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세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핍박이요 두 번째는 공직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요 마지막은 죽음에 대한 위협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충성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지금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한 여러분은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은 나의 구주시며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라고 고백할 때 충성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가서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일년 된 송아지를 제물로 바치거나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으로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행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축복하신 것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축복하신 것도 애굽의 많은 신들 가운데서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어디에서든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초기에는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힘들다고들 했습니다. 그런데 선거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지미 카터쪽이 유력해졌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이 카터 후보를 취재하기 위해서 쫓아다녔습니다. 다른 후보들은 표를 의식해서 주일이면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대형교회를 찾아 예배드렸습니다. 그런데 카터 대통령은 23년 동안 섬겼던 자신의 조그마한 교회에 서 스무 명 남짓 한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며 예배드렸습니다.

11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합니다. 충성은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달란트 비유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인은 재능에 따라 종들에게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나누어주었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이 두 달란트를 더 남겼으며 다섯 달란트 받은 종도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네게 큰 것을 맡기겠다.” 여러분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은 다윗이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양들을 밤새워가면서 지켰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권세를 주시고 존귀하게 만들어주심을 깨닫습니다.

결론적으로 충성은 먼저 예수님과의 일대일 만남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하며 교회 안이나 밖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큰 것으로 하나님께 축복받을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