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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나님 앞에서-살전 3:9~13

우리 하나님 앞에서-살전 3:9~13

한국유리 창업자 최태섭(崔泰涉)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35년간 유리 공업 하나에만 매진하여 유리를 수입하던 한국을 유리 수출국으로 탈바꿈시킨 사업가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작은 규모의 사업을 운영하던 그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떠날 형편이 되었습니다. 피난길에 오를 준비를 하던 중에 자신이 빌린 돈을 은행에 갚아야 할 기일이 된 것을 알고 돈을 준비하여 은행에 갔습니다. “빌린 돈을 갚으러 왔습니다.” 돈이 든 가방을 열며 은행 직원을 불렀습니다. 직원은 그를 보고 난처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빌린 돈을 갚겠다고요? 전쟁 통에 대출 장부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장부의 일부는 부산으로 보냈고, 일부는 분실됐습니다. 돈을 빌린 사람들은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갚으시게요?” 은행 직원의 말에 망설였지만 그래도 갚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영수증에 돈을 받았다는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은행 직원은 자신의 인감도장이 찍힌 영수증을 건네주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제주도에서 군납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신선한 생선을 공급하는 일인데 정직하게 사업을 하였더니 물량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원양어선을 구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돈이나 담보물이 없어 배를 구입할 수 없었습니다.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의 은행을 찾아가 융자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은행은 전쟁이 끝난 후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대출은 위험하다며 거절했습니다. 대출을 포기하고 은행 문을 나서려다가, 문득 자신이 피난길에 서울에서 갚은 대출금이 잘 정리되었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길을 돌려 예전에 받은 영수증을 은행 직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영수증을 본 은행 직원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습니다. “바로 당신이군요. 피난 중에 빚을 갚은 사람이 있다고 전해 들었을 때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정직함은 은행가의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를 소개받은 은행장은 당신처럼 진실하고 정직한 사업가를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라며 필요한 금액을 흔쾌히 대출해 주었답니다. 대출받은 자금과 은행권의 신용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사업을 펼쳐 나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유리 창업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최태섭 장로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이를 기억하신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면 반드시 승리케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디모데의 보고로 바울이 위로를 받은 장면에 이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중보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디모데의 보고가 바울에게 큰 만족이 되었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여기의 앞에서에 해당하는 엠프로스텐 면전에서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기뻐할 수 없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하여 성도된 자들의 믿음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순전한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온전한 모습을 가지게 된 것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되는 신앙이 되려면,
 

 

첫째로 감사로 보답하라

고홍주(高洪柱) 박사는 한국인으로 미국의 명문 예일대 법과대학원 학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인터뷰 할 때 감동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미국 이민을 하였는데, 어려운 하버드대와 옥스퍼드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그 후 줄곧 엘리트 코스를 거쳤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최고의 영예인 학장직위에 올라갔습니다. 그 자체로도 대단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높은 자리가 아니라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학장으로 선임된 후 어머니에게 들은 훈계를 인터뷰 중에 소개했습니다. 어머니 전혜성 박사의 훈계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태도를 반영한 말이었습니다. 그가 어머니에게 연락했더니 이렇게 당부하더랍니다. “축하한다. 그러나 네가 잘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된 일이다. 그러니 높이 올라갈수록 약자를 돕고 배려하는 감사하는 삶이 되어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는 길이다.” 우리의 가진 것이나 성취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니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감사로 보답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본문 9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여기의 보답할까는 원어로 안타포디도마인데 되돌려주어야 할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입니다. 바울은 보답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감사함으로 보답하라고 명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굳건한 신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그분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 할 때 몸을 도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에 물이 묻을까 봐, 옷이 더러워질까 봐 몸을 아끼려 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들은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기꺼이 봉사할 때 받은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여야 합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특히 선교에 더욱 동참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이요, 주신 은혜에 감사로 보답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주야로 간구하라

영국 런던 테임즈 강변에 국회의사당이 있습니다. 그곳에 빅 벤(Big Ben)이라는 시계탑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공습이 임박한 상황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독일군은 전투기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막강한 공군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2백 대나 넘는 전투기들이 런던을 향해 날아왔습니다. 영국 공군기는 겨우 몇 대만 발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독일군 비행기들이 퇴각하며 줄줄이 연기를 뿜고 추락을 하였습니다. 무려 185대의 전투기가 추락하여 영국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정작 영국군은 승리한 이유를 몰랐습니다. 포로로 잡힌 독일군 조종사들을 심문하며 물었습니다. “우리 전투기는 고작 몇 대밖에 안 되는데, 당신들은 왜 퇴각을 했소?” 그러자 독일군이 놀라며 반문합니다. “뭐라고요? 분명히 비행기가 수백 대가 있었는데요 영국에는 보이지 않는 무기가 있었습니다. 국회의사당 시계탑의 빅 벤이 울릴 때마다 영국 국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 기도의 힘이 독일군을 교란시켜 자멸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기도는 강력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강력한 영적 무기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어리석게도 놀라운 무기를 방치하고 녹슬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고 있습니까? 바쁠수록 더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이 험하니 더 깨어 기도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합니다.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주야로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의 주야로에 해당하는 뉙토스 카이 헤메라스는 밤과 낮에 두 번만 기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끊임없이라는 의미입니다. ‘간구하다로 번역된 네오메노이는 현재분사로 시간의 제약이 없이 계속하여 기도하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형식적이거나 마지못해 하는 기도가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싸우는 것과 같은 분투적인 자세로 기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름지기 우리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온 몸을 다해 매달려 간절히 간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바울은 간구하는 목적을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하려 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이요 일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계속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환난과 시험을 극복해 낸 견고한 믿음이지만 성장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믿음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신앙에 매진하여야 합니다. 더 채워져야 할 부분이 있는 미숙한 믿음인 것을 인지하고 믿음이 부족해지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부족한 부분에 대한 보충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간구하여야 합니다.
 

셋째로 넘치게 사랑하라

한 때 영국 런던에 유명한 세 개의 교회가 경쟁을 하면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세 교회를 담임하던 목사들은 당시 뛰어난 설교를 하던 유명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마이어(F.B Meyer)목사, 스펄전(Spurgeon)목사, 캠벨 몰간(Campbell Morgan)목사로 각각 그리스도 교회, 침례교회,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이끌면서 한 도시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마이어(Meyer) 목사가 영향력이나 인기도에서 떨어졌습니다. 마이어 목사는 일기장에 이런 고백을 적었습니다. “왜 그런지 기도하려고만 하면 스펄전과 캠벨 몰간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이 자꾸 일어난다.” 아주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스펄전 목사나 캠벨 몰간 목사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하나님! 내 속에서 그들을 시기하는 마음을 없애 주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기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도 자꾸 시기심이 일어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 깊이 기도드리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마이어! 너는 지금까지 시기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만 했지, 스펄전이나 캠벨 몰간 목사를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해보았느냐?” 이 음성을 듣고서야 마이어는 무릎을 꿇고 스펄전 목사와 캠벨 몰간 목사를 축복하셔서 두 교회가 잘 되게 해달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나는 이제 자유를 얻었다. 평안을 얻었다. 내 마음속에 기쁨이 샘솟는다. 평화가 넘친다. 나에게 이러한 자유와 환희를 가져다주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남을 미워하고 시기했다. 오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는 시기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나를 도와주시고 계속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시기 질투보다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으로 축복할 때 해결이 됩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자기의 몸을 버리사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니 하나님 앞에서 서로 사랑이 넘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서로 사랑이 넘치시기 바랍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로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여기의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바울과 동역자들이 먼저 본을 보인 사랑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이타적 사랑으로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아가페 사랑이 넘치는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였습니다.

여기의 모든 사람은 교회 밖의 사람들, 불신자뿐만 아니라 그들을 핍박하는 적대자들까지 포함하였습니다. 이 사랑은 독생자를 내어주시면서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다른 성도들과 적대자들을 향한 사랑이 싹트기를 기도하고 있으며, 그 사랑이 더욱 많아지고 풍성해져 넘치기를 원하였습니다. 서로 사랑이 넘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 천정에 그려진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천지창조'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이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4년 동안 천장에 매달려서 그렸다고 합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보는 사람들이 경탄하였습니다. 추기경은 천장에 매달려 내려오지 않는 미켈란젤로를 보며 물었습니다. “미켈란젤로여! 그대가 한 일이 놀랍도다. 그런데 완성이 되었으면 내려오지 왜 내려오지 않는가?” 미켈란젤로가 대답합니다. “추기경이여! 인간의 눈으로 보면 다 그려진 것 같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렸습니다. 그래서 500년이 지났어도 사람들이 찬탄을 금치 못하는 작품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 있지만 항상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자유함을 누립니다.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사람 앞에서 보이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감사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간절히 구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이 넘쳐 우리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이 없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