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창 1:4, 빌 1:3~7
인도에서 활동하였던 선교사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의 이야기입니다. 은퇴할 때가 되어 고향 스코틀랜드로 귀국을 하였습니다. 고향에는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식장이 마련되었습니다. 단상에 오른 더프 선교사는 인도에 선교사를 파송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안에 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자 실망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의사의 치료로 깨어난 더프 선교사는 자기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단상에 세워달라고 눈물로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더프 선교사는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사람들에게 숙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지원병을 모집할 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는데 하나님이 선교사를 보내고자 하시는데 단 한 사람의 지원자가 없다니 정말로 섭섭한 일입니다. 나는 내 고향 스코틀랜드에 뼈를 묻으러 왔지만 다시 인도로 돌아가겠습니다. 가서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한 사람이 당신들의 영혼을 위하여 인도 갠지스 강변에 백골을 묻으러 왔다고 전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돌아서자 그 말을 들은 젊은이들이 충격을 받고 더프의 뒤를 이어 인도 선교를 지원하였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더프의 삶은 사람들은 몰라주어도 참으로 고상하고 멋진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합니까? 또한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입니까?
창세기 1장 4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원어로 ‘엘로힘 와야르 키 토브’인데 여기의 ‘보시기에’는 ‘와야르’라는 원어입니다. 이는 단순히 ‘보다’라는 뜻이 아니라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어는 ‘하나님’ 즉 ‘엘로힘’입니다. 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좋다고 평가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최종적인 평가는 하나님에 의해 내려져야 하며 이러한 평가만이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 같아도 실제로 좋지 않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인 선악과를 따먹는 데 있어서도 선악과는 사람인 하와가 보기에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좋은 것이 아니라 인간을 파멸케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평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것만이 진실로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매사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고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관점을 ‘하나님이 보시기에’로 맞추어야 합니다. 교회도 가정도 자녀도 사업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첫째로 기쁘게 기도하는 교회이어야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는 기도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비교적 젊으셨고 대단히 활동적이셨습니다. 하이벨스는 자동차로 미시간의 어머니 집으로 가면서, “아버지 없는 인생을 어떻게 꾸려 갈 수 있을까?” 라며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자신을 믿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날 밤 침대에서 빌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난 겁니까?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습니까?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라며 안타깝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하였습니다. 마치 막다른 모퉁이를 돌아 새로운 방향으로 가게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능력이 있다. 너는 나로 족하다. 지금은 이 사실이 의심스럽겠지만, 나를 신뢰하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 후 빌 하이벨스는 한 번도 기도 응답에 오류가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의심의 안개에 휩싸여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슬펐지만, 기도 응답을 들은 후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보다 더 자상하게 말로 다할 수 없는 능력으로 지키셨고 인도하셨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빌 하이벨스는 낙심하지 않았고, 나침반이 없는 배처럼 표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기도하게 하셨고,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항상 동행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입니까? 기도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아시는 사람입니까? 체험적으로 아십니까? 기도하면 항상 들어주신다고 믿으십니까? 혹시 내 문제는 알아서 처리해야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개의 기도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의례적인 기도, 문안 인사드리는 기도, 보고하는 기도 차원에 그치고 있습니다. 기도가 그런 수준이면 결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것을 보고하고, 하나님의 의견을 묻는 차원 높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여기의 ‘간구’는 원어로 ‘데에신’ 인데 ‘결핍, 결여, 부족’이란 뜻입니다. 부족을 채워달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간구’라는 표현에 절박함이 담겨져 있지만 바울은 기쁨으로 간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빌립보교회를 위한 간절한 기도의 이면에 기쁨이 내재해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 갇혀있는 상태로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고 빌립보 교회 역시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기쁨이 넘쳐 있었습니다. 이 기쁨은 믿음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가운데서 얻어진 기쁨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억지로나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기쁨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가질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둘째로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이어야
김길복 집사는 ‘천국, 혼자 갈 수는 없잖아요’ 라는 저서에서 전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옥 불에 방치해 두고 나 혼자 천국에 갈 수는 없잖아요”라며 전도하게 된 동기를 설명합니다. 그녀가 잘 알던 젊은 새댁에게 전도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전도하기 전에 그녀의 남편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삶을 비관하며 자살했다는 사실 때문에 젊은 새댁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김길복 집사의 마음에 ‘좀 더 일찍 전도했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그랬다면 그녀의 남편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는 통곡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라’는 말씀에 따라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용실에 가면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전도하고, 음식을 먹으면서 식당에서 전도하고, 심지어 목욕탕에 가서도 전도했습니다. 무려 2천명이 넘는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녀가 이렇듯 전도의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까닭은, 전도하기 위해 매일 밤 10시 전도 대상자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수고의 대가 없는 열매가 없듯이 전도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기까지 반드시 수고가 뒤따라야 합니다. 또한 물질의 십일조는 물론, 시간의 십일조, 인생의 십일조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때 비로소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여기의 ‘복음’은 원어로 ‘유앙겔리온’인데 ‘좋은 소식을 전파하다’라는 동사인 ‘유앙겔리조’에서 유래된 명사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사하시고 그들과 화해한 일에 대한 소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이 복음이 바로 바울 선교사역의 핵심이자 원동력이었습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교제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인간적 차원에서 교제를 나눈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교제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복음 전파에 앞장 선 바울의 전도사역을 위해 기도로 후원하며 물질적 도움으로 힘을 보태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복음의 교제를 통해 우리가 받은 복음을 국내외에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교회는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로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은혜에 참여하는 교회이어야
유럽 어느 산촌 마을에 저녁이 짙어 오면 집집마다 불이 켜지는데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당만이 불이 켜지지 않았습니다. `등불의 집'이라고 불리는 이 교회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귀족이 마을 주민들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줄까 고심하다가 교회를 지어주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다 지어지기까지 아무도 그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교회가 완공되었을 때 모여든 사람들은 교회건물에 대하여 저마다 감탄을 하는데 단 한 사람이 교회당에 무엇인가 빠져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등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교회는 어떻게 불을 밝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귀족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조그만 놋쇠 등을 한 개씩 주면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 등을 들고 교회에 오실 때마다 앉으신 곳은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오시지 못하는 날은 하나님의 집의 한 구석이 어두워지겠지요?” 그 후 조그만 놋쇠 등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누구든지 고이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각자 놋쇠 등을 들고 언덕을 올라옵니다. 교회는 마을 사람들로 채워지고 등불로 환해집니다. 마을사람 그 누구도 자기 자리가 어둡고 쓸쓸한 구석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도 바로 ‘그 자리’가 있습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약속된 ‘그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이유 없이 그 자리가 비면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그 자리는 바로 은혜에 참여하는 자리입니다. 결코 비워서는 안 되는 자리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여기의 ‘참여한 자’는 원어로 ‘슁코이노누스’인데 ‘다른 사람과 함께 동참하는 공동 참여자’를 의미합니다. 즉 빌립보 성도들은 헌금과 기도로, 그리고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요동하지 않는 모습으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모이며 영적 교제에 힘쓰는 교회가 바로 참된 교회입니다. 성도 간에는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교제가 일어나야 합니다. 서로의 신앙을 간증하고 대화를 나누며, 신앙이 연약한 성도가 있다면 위로와 권면을 하고, 시험에 빠진 성도가 있다면 서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또 물질적으로 궁핍한 성도가 있다면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의 교제에 성도들이 참여할 때 교회는 부흥하게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시골 마을에 연못 하나가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연못을 사랑해서 그 안에 많은 물고기를 넣고 길렀습니다. 주변 경관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꽃과 나무도 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연못이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왜 그런가 보았더니 연못에 물이 안 들어옵니다. 위에서 흘러오던 물이 막혀 안 내려온 것입니다. 물이 들어오지 않자 연못에 살던 물고기들이 죽고 아름다운 나무와 풀도 시들었습니다. 결국 연못은 죽음의 웅덩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연못이 교회를 상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연못이 살기 위해서라면 연못 밖에서 물이 들어오는 법을 찾아야 합니다. 연못 안에 있는 고기에만 관심이 있고 연못 안에 들어올 물에 관심이 없는 교회, 불신자들이 들어올 길을 닦지 않는 교회는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라도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모델적인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보기에 좋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를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교회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로 세워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기뻐하며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가 되도록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에 참여하는 교회가 되도록 모임과 교제에 힘을 다해 날마다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를 세워나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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