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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린 영혼의 축복 시107:9

주린 영혼의 축복                 시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107:9

 

 

◑1. 영혼의 주리는 이유 2가지

 

 

1. 세상사랑

그런 주님이 주신 천국(지상+미래천국)의 기쁨을

오늘 우리가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사랑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을 사모하고, 천국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은혜를 사모하면서 사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그 천국에 대한 목마름을 간직하고,

박막(薄膜)과 같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적당히 멸시하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그 행복을 더 갈망하고,

그 나라를 위해서 이 세상나라를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마음의 부패는 얼마나 심한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 깊이 눌러 붙어있어서

웬만해서는 기도로도, 말씀의 은혜로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치 상처가 난 곳에 딱지가 앉으면, 그것을 미리 없애보려고 떼어버리면

살점이 함께 묻어나오면서 찢어져 피가 나고

그래서 차마 그 딱지를 떼지 못하듯이

내 마음에 눌어붙어있는 ‘세상에 대한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것 떼려다가 피와 살점이 같이 떨어져 나오니까, 차마 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세상사랑 때문에

우리의 눈물의 기도가 효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점점 더 시들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하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

내면의 깊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내면의 깊은 목소리를 들어보면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떡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내 영혼의 견딜 수 없는 갈함과 주림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절박한 외침은 외면하고,

부지런히 자신의 썩어질 육체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 앞에 진실한 성화의 삶이 없는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2. 자기 아첨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극도의 자기아첨(自己阿諂)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기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그런 자신을 늘 달래고 위로하며 살아갑니다.

 

자기의 신앙적 사고와 판단력이 살아있어서

자신과 영혼을 공격하는 죄의 속임수와 부패한 욕망의 생각들을 감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해서 자기를 책망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도리어 항상 자기를 위로/아첨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죄의 소욕을 따라 살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더러운 육체의 욕망에 대해서

자기를 아첨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아무리 아첨하고 위로해도

이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통과 번뇌,

그리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그 견딜 수 없는 고통, 괴로움과 번뇌는

영혼의 주림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육체가 여러 날 먹지 못해서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플 때,

먹을 것을 찾아서 입에 집어넣고 소화시켜야 원기를 회복할 텐데도

외모만 꾸미고 화장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2. 내재적 사랑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이 많고 부요하면 염려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물질이 많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또 경제적인 문제도 없고, 또 건강의 문제도 없는 사람에게는

그들만 아는 또 다른 고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삶의 허무’ 같은 것입니다.

결국 ‘주린 영혼의 문제’입니다.

 

성도의 목마름은 <은혜만으로 해결>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채워질 수 없는 공간을, 인간의 영혼 속에 두셨습니다.

그것이 가득 찰 때, 인간은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찬 존재였다고 한다면,

타락 이후의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은 사라지고 사망으로 가득 채워져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거듭난 인간은.. 이제 그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채워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이 전혀 없는, 영혼의 굶주린 상태가 되었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의 은혜가 한없이 밀려오게 됩니다.

그 주린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게 됩니다.

 

▲초월적 사랑 과 내재적 사랑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①첫 번째는 <초월적 사랑>입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이 물 붓듯이 특별한 성령의 역사로 부어지는 것입니다.

대개 처음 회심과 함께 경험하는 사랑이 <초월적 사랑>입니다.

 

②두 번째는 <내재적 사랑>입니다.

내재적 사랑은.. 죄와 싸워 이긴 자에게 부어지는 사랑입니다.

 

(왜 '내재적 사랑'이란 어려운 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말을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아마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내면에 부어진다는 뜻으로, 그런 명칭을 만들었나 봅니다.)

 

<초월적 사랑>은 회심할 때 부어지지만

<내재적 사랑>은 성도가 회개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때 부어집니다.

전자가 잠깐 경험한다면, 후자는 성도의 삶 가운데 계속 경험합니다.

 

신자가 일생에 경험하는 사랑은, 대부분 죄와 싸워 이긴 <내재적 사랑>입니다.

죄와 싸워서 이기면서 자신이 성결해지면 성결해질수록,

하나님의 성결한 사랑이 그만큼 우리 속에 뜨겁게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심을 하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또다시 <초월적 사랑>을 경험하는 예보다는

죄와 싸우고 진실한 회개의 삶을 살면서

<내재적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초월적 사랑>만 기대하고

<내재적 사랑>은 받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죄 죽임이 없이 방종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3. 내재적 사랑은.. 갈망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주림을 면하는 놀라운 은혜가

누구에게 주어진다고 되어 있습니까? 사모하는 자에게 입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107:9

 

지속적으로 사모해야 함

이 ‘사모한다’는 것은 한 순간에 스쳐가는 감정이 아니라

집요하게 계속 되는 감정입니다.

이 신령한 은혜에 대한 사모하는 감정은, 죄에 대한 욕망과 매우 흡사합니다.

 

어떤 죄를 짓기 전에 먼저 마음이 그 특정한 정욕에 집중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강하게 끌리게 되고,

거기에 집중되어 그것을 빨아먹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영혼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쳐지나가는 것이면, 우리의 영혼에 해가 덜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집요하게 꽂혀서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잉태하고, 장성해서 그 죄를 산출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지속됩니다.

 

똑같이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그 은혜를 사모하게 될 때에

그것이 마음에 스쳐가는 것이 아니라 집요하게 고정되어서

그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회심한 신자라면 은혜가 고갈되었을 때,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그런 생각들이 생각으로만 떠다닐 뿐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참된 회복이 올 때쯤 되어서는,

그것이 떠도는 생각이 아니라, 내 마음에 딱 꽂혀서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는 보다 더 큰 은혜를 갈망하게 되고,

조금 변화를 받아도 그보다도 더 큰 변화를,

보다 더 완전하게 이르는 변화를 받고 싶어 하는 갈망들이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린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로 만족함을 얻게 될 때에 나타나는 변화들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에 있어서

<수동적>인 면과 <능동적>인 면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수동적>인 면은.. 하나님께서 갈망하는 마음을 넣어주신다고 하는 것이고

<능동적>인 면은.. 신자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도록

성경에 의해서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갈망하라.” “하나님을 사모하라.”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라.”

수없이 성경에서 신자에게 요구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시42:5)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벧전1:13)

 

하나님께서는 갈망하는 마음을 넣어주시지만, <수동적>

갈망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갈망하는 마음을 넣어주시고,

사모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목마름을 넣어주십니다. <능동적>

 

인내해야 함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시켜 주신다고 하셨는데

오늘 저녁에 사모하면, 왜 오늘 저녁에 만족시켜주시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 침체에 빠진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는

때로는 낙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회복했는데, 스스로 부패해져서 그 갈망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추슬러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생겨났는데

갈망보다도 더 큰 죄의 욕망이 생겨나서, 또 갈망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미끄러지기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 같은 죄인이

다시 하나님의 처음 사랑으로 충만해 진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는 약속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구나.’라고 말입니다.

 

죄와 싸워서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낙심하고 실패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이 오히려 급격하게 굳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시 이 더러운 죄의 즐거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는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금방 우리를 만나주시지 않고

가혹하리만치 긴 시간동안 목마르게 하시고,

우리에게 보다 더 완전한 목마름으로 당신을 찾으실 때까지 기다리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지만, 본문에 입각해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고 사모하는 마음을 상당한 시간동안 유지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있던 동안 망가져버린 우리의 내면세계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립니다.

속히 얻은 것은.. 속히 떠나갈 것입니다. 그 귀중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귀한 만큼..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사모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오늘 이 본문,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을 사모하는 사람,

그 사람들이 비록 이전에는 걸레와 같은 죄인이었다 하더라도

주님은 그들을 무한히 용납하십니다.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죄가 커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기에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내 신앙생활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 주님 앞에 내 삶이 열납되기를 사모하는 마음,

이러한 것들 없이 형식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영역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이 행하는 신앙의 의무들,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하고, 지체들을 섬기고, 여러 가지 맡은 일에 봉사하면서도

사실은 우리의 마음에 간절함이 없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갈망이 없이,

단지 개별적인 의무를 감당해 나가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모든 것들이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을 가진 사람의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갈망,

내가 주님 앞에 더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갈망,

그래서 주님께 사랑을 받고 내가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삶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배어 있기를 원하는 갈망,

 

그래서 나는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내 인생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기를 원하는 갈망.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갈망이 없는 신앙생활만큼 이 땅에서 저주받은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그것은 썩은 꽃과 같습니다.

형체는 한때 아름다웠지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잃어버리고 나면,

다 썩어서 악취가 나는 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우리 안에 있을 때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랑을 기억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시면서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되게 하시고 싶으신 그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면서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쓸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에게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고 그 은혜의 부어주심을 방해하는

내 안에 있는 죄와 불결들을 미워하고

그래서 십자가 지는 고통으로 분투함이 있을 때

<내재적 사랑>이 임하면서

그 성도는 예수의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향기는.. 완성된 성도에게서 풍겨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고통하며 주께로 한걸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성도들의 삶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입니다.

 

그래서 아무 향기도 풍기기 않던 신자가 자고 일어나서

갑자기 향기를 풍기게 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날마다, 날마다 주께로 다가가는 생활을 통해서

예수의 향기가 풍겨나는 것입니다.

 

빈부나 귀천의 구별이 없이 죄인이나 불의한 사람의 구별 없이 누구든지,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하늘의 생명을 절실하게 사모하는 사람,

 

‘내게는 지금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필요하고

내 영혼에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부어주시고

우리 안에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떠나서

그리스도께 속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그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사모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두루 살피십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신앙 생활한 어른이 받지 못한 은혜를 어린아이가 받고,

성경을 많이 알고 연륜 있는 성도가 받지 못하는 은혜를

이제 처음 믿는 연약한 신자들이 받습니다.

 

교회에 유력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받지 못한 은혜를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 은혜를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그 모든 것 보다도 뛰어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갈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수시로 타일러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시42:5

 

▲마치는 말

오늘 내가 사모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미끄러졌기에 회개해야 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았기에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아첨’으로 인해서 스스로 거짓된 만족을 얻는 대신에,

끊임없이 자신을 해부하고, 자기 자신의 신앙 양심의 외침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올바른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갈망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대해서 통탄해 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을 고쳐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만큼 하나님을 향해 목마른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최상의 방식은 없습니다.

 

기도 하지 않은 것, 예배에 나오지 않은 것, 헌금 하지 않은 것,

그것 말고 갈망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 그것을 깊이 회개하고

자신의 영혼의 건강하지 않은 상태를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며

그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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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장 행복한 때는?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자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기뻤던 때는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을 경험할 때입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오직 이 세상의 자원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이 내게 말씀의 빛을 비추시고,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니,

내 진정한 고통이, 이 세상 자원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자신의 주린 영혼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영혼의 굶주린 상태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

그 때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닙니까?

 

▲내게 (내 영혼에) 참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

본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107:9

 

주린 것을 모르는 영혼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주린 것을 느끼고 있으며,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자신의 갈한 영혼을 만족시키려는 왜곡된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영혼은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고

자신의 영혼을 만족케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자신뿐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자신을 만족케 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질 때,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에

비로소 만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참 만족입니다.

 

▲미래천국의 참 만족을, 지상천국에서도 미리 (약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이 세상에서, 끊임없는 고통과 삶의 허무를 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지, 얼마나 소망이 없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수고와 근심의 멍에를 벗기시고,

나를 받아주실 그 날은, 내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풍족히 누리는 날이 아닙니다.

그 날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는 도저히 만족을 얻을 수 없었던

내 주린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 맛보게 될 완전한 영혼의 만족과 심령의 참된 기쁨을

하나님이 만약 미래의 것으로만 두시고,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맛보게 하시지 않는다면... 뭔가 불합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미래에 맛볼 하늘나라의 신령한 맛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김남준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