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0:30~11:1
데이빗 케이프(David Cape)의 ‘주님의 음성에 그대로 순종한 예수를 위한 바보(On the road with Jesus)’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빈힐스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목회하는 자리에서 떠나라. 이제부터 길거리로 나가 사람들의 발을 씻어 주면서 종으로 섬겼던 나의 사랑을 보이고 복음을 전하여라.” 그는 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음성이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라며 14개월 동안 부르심의 진위를 파악한 후에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씻긴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를 입고, 대야를 십자가에 걸고, 물통과 의자 등 21kg이 넘는 짐을 지고, 도시 구석구석을 걸었습니다. 그는 길에서 만난 조직폭력배와 알코올중독자는 물론 동성애자와 한센씨 병자의 발을 씻어 주었고, 도시의 시장과 대통령 발도 씻어 주었습니다. 세족 사역이 있는 곳마다 초자연적인 치유와 회복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실은 처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케이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미쳤지요. 진짜 이런 걸 하겠다고? 바보 같은 짓이에요. 차라리 땅을 갈라 저를 삼키도록 하시고 이런 일이 없었던 것으로 하시면 안 됩니까?” 하지만 이것 역시 순종을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깨닫고 “바보가 되어야 한다면 ‘예수를 위한 바보’가 되자”고 작정하였습니다. 그 후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역과 걸프전이 일어났던 중동 등 전 세계를 누비며 20년이 넘게 세족식 사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속도로에서 또는 길에서 만나 발을 씻겼는지 모르지만, 족히 수천 명은 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성공이나 실패가 없고 오직 순종만 있을 뿐이다. ‘하루에 이삼십 명의 발을 씻기면 그날은 성공적인 날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찾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의 자녀로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때 세상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세상적 가치로는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데이빗 케이프는 섬김의 본을 통해 오로지 하나님의 가치로만 사회와 개인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보 같다고 말해도 ‘주님을 위한 바보’라면 언제나 기꺼이 바보가 되었습니다. 데이빗 케이프 야말로 우리가 본 받아할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본문 11장 1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여기의 ‘본 받는 자’는 원어로 ‘미메타이’인데 ‘모방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을 본보기로 삼는 한편 자신을 고린도 교인들의 본보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오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다면 후자는 긍정적으로 자신의 삶과 신앙을 본받으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은 왜 그리스도를 직접 본받으라고 하지 않고 굳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였습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보다 자신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권면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신을 본받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의 어떠한 것에 대하여 본받으라고 말합니까?
첫째로 감사로 행하는 것에 대하여
페이스북의 CEO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타임지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는 일마다 큰 성과를 만들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리더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남편 데이브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남편의 빈자리는 그녀의 삶을 한순간에 무너뜨렸고, 비통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는 매일매일 피폐하게 보내야 했습니다. 단 1분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어떻게든 상황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을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직장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유능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 심리학자인 친구가 찾아와 위로하며 말합니다. “끝이 없어 보이는 공허에도 바닥은 존재한다. 배우자를 잃은 사람의 절반 이상이 6개월 후면 격렬한 슬픔에서 벗어난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초기에는 본능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러지 말고 오히려 반대로 해보아라. 지금보다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야.” 그녀는 친구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니. 그래서 친구에게 되물었습니다. “여기에서 더 어떻게 나빠질 수 있다는 거야?” 그러자 친구가 대답합니다. “남편이 운전하다 심장에 이상이 생겼다고 해봐. 그때 아이들이 차에 타고 있었을 수도 있잖아.” 친구의 말대로 남편이 두 아이를 태우고 가던 도중에 심장마비가 왔다면 가족 셋을 한꺼번에 다 잃는 상황이 발생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자 아이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아이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감사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나쁜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이 내 생애 최악이라고 생각되어도 하나님께서 최악의 순간을 아직 허락하지 않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힘들고 어려워도 감사해야 합니다. 잃어버리고 사라진 것만 바라보며 탄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남겨주신 것들을 바라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샌드버그는 감사로 성공한 삶의 본이 되었습니다.
본문 30절입니다.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여기의 ‘감사함으로’는 원어로 ‘카리티’인데 ‘은혜’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 매일의 식탁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 할지라도 그 우상 제물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므로 감사함으로 먹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삶에 찾아오는 모든 불행으로부터 지켜줍니다. 신앙인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 감사입니다. 왜 짜증나는 일이 없겠습니까?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때마다 왜 불평이 없겠습니까? 최선을 다해도 후회스러운 결과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누군가로 인해 인생이 꼬이는 것처럼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감사할 수 있다면 원망과 불평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장애물이 방해한다고 하더라도 감사로 나아가면 형통의 길이 열립니다. 내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어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행하는 일에 있어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영광을 위하는 것에 대하여
조셉 하이든 (Franz Joseph Haydn)이 천지창조를 작곡하여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공연할 때였습니다. 몸이 아픈 하이든은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청중들이 일어나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박수를 중단시키고 뒷자리에 있는 하이든을 가리키며 “바로 저 분입니다. 저 하이든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이든은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청중들을 향해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아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바하(Johann Sebastian Bach)는 “모든 음악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사람에게 즐거운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D.G’라는 글자를 적었습니다.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번째 글자입니다. 하이든, 바하, 그들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본이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본문 3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행동하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표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책임이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기의 기쁨과 만족을 위하여 일하지 않았습니까?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기에 발생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다른 것에 돌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표를 향할 때 비로소 덕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야말로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유익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은 프랑스가 낳은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입니다. 친구였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Paul Wittgenstein)가 전쟁터에 나갔다가 오른팔이 잘리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피아니스트는 오른팔이 잘리면 치명적입니다. 그러자 비트엔슈타인은 절망 속에서 허덕였습니다. 그때 라벨은 세계를 다니며 연주하기로 되어 있는 스케줄을 취소하고 친구를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만들었습니다. 곡을 완성한 라벨은 친구에게 악보를 주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악보를 보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곡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유명해지자 모리스 라벨도 함께 유명해졌습니다. 형제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결국 자기를 돕는 일이 되었습니다.
본문 33절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바울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살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야 합니다.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이웃을 실족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된 행실로 불신자들이 구원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는 사랑과 배려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남을 위한다고 한 행동이 상처를 주지는 않았습니까?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도 상대의 필요를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른 이를 사랑하려면 다른 사람의 필요와 유익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조지 휫필드(Geoge Whitefield)는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스펄전은 그를 향하여 ‘불과 바람과 폭풍같은 삶을 살다 간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생애 마지막 전날, 1770년 9월 28일 설교에서 “저의 갈 길이 아직 남았다면, 저로 하여금 들에 가서 주의 진리를 인봉하게 하시고 돌아와 죽게 하소서”라고 할 만큼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 자인지 알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8세기 미국 대각성 운동의 선구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아프리카 대륙을 46,400킬로를 다니며 선교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무디 이후 최고의 복음 전도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모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졌기에 누구에게나 본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았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로 소개하였습니다. 이것은 교만의 외침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며 주장입니다. 이 믿음으로 바울은 주님을 위해 살 수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확실한 주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고 나서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위해 감사로 행하는 것에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에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에 언제나 본이 되는 교사들과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 설교 > 김광일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요일 5:1~6 (0) | 2022.01.12 |
---|---|
복음을 전하는 자들-고전 9:14~23 (0) | 2022.01.12 |
여호와는 나의 노래-사 12:1~6 (0) | 2022.01.12 |
주의 마음에 든지라-왕상 3:1~15 (0) | 2022.01.12 |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창 1:4, 빌 1:3~7 (0) | 2021.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