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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광일목사

내가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12

내가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12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성자였던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도 어렸을 적에는 평범한 소년이었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놀다가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양고기 파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름지게 구워진 양고기에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풍겨나 먹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집으로 돌아와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몰래 아버지의 침실로 들어가서 장롱을 뒤져 동전을 꺼내 가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양고기를 사서 단숨에 먹어치웠습니다. 고기를 먹을 때는 너무나 행복해서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을 느낄 수가 없었는데 막상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자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보았지만, 잠이 오지 않아 드디어 결심했습니다.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보다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아버지께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직접 아버지께 찾아가 말씀드리기가 겁이 났습니다. 한참 고민하던 간디는 작은 종이에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몇 줄을 적어 그것을 돌돌 말아서 아버지 침실문의 열쇠 구멍에 끼워 넣었습니다. 그러고 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새벽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자 어쩐지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생각에 겁이 난 간디는 급히 아버지 침실로 향해 갔습니다. 가보니 열쇠 구멍에 꽂혔던 종이가 없어졌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열쇠 구멍의 틈을 통해 방안을 살펴보았더니 아버지께서 쪽지를 읽으시며 눈물을 닦으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이 미어져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간디는 단숨에 방문을 열고 들어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간디를 꼭 껴안아 주셨습니다. 후에 간디가 성인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용서하여 주시는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죄악을 행하였어도 회개 한다면 하나님께서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혹시 죄를 범하여 마음에 즐거움을 잃어버렸습니까?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부끄러운 죄악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51편은 시편에 나오는 7편의 참회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회의 모본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시입니다. 표제에 나와 있는 대로 다윗이 간음과 살인이라는 극악하고도 비열한 죄를 연속적으로 범한 사실에 대하여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듣고 죄를 참회하며 지은 시입니다.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죄악을 씻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다윗의 의지가 더욱 견고해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회개로 인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면서 새롭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에 대한 간절한 심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범죄의 가능성에 놓여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도 순간의 방심으로 엄청난 죄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간 것을 보면 죄의 유혹에 취약한 인생인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 죄의 유혹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죄를 범하였을 때는 숨기지 말고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여기에서 범죄에 대한 다윗의 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범죄가 사람을 향한 죄였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오직 주께만 범죄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슬퍼하며 참회하였습니다. 솔직한 고백에 근거한 회개는 용서를 받게 합니다. 그러나 죄를 숨기는 행위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하며 자신이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악을 행하였사오니라며 다윗처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어떠한 내용을 간구하였습니까?
 

첫째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최용우 목사의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누장사가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비누장사가 그리스도인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세상에 기독교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수천 년 동안 사랑과 평화와 믿음에 대해 가르쳐 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죄악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만 해도 기독교인이 천 만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도대체 사회는 왜 이렇게 깨끗해지지 않습니까? 왜 늘 이 모양입니까?” 그리스도인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옷과 얼굴, 손이 몹시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이 비누장사에게 말했습니다. “저 아이들 좀 봐요. 비누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데 저 아이들은 왜 저렇게 더럽지요? 나는 도대체 지금 저 아이들에게 비누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비누장사가 버럭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이봐요! 비누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이들이 깨끗해지기를 바라나요?” 그리스도인이 말했습니다. “그래요, 그겁니다. 아무리 기독교가 위대한 종교라고 해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겐 아무 소용이 없는 거랍니다. 비누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깨끗해지기를 바랄 수 있나요?”


본문 7절입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여기의 정결하게 하소서는 원어로 테핫데에니 인데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슬초로 자신을 정결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여기의 우슬초 에조브인데 마치 스펀지처럼 액체를 흡수할 수 있는 식물로서 유월절에 피를 찍어 문지방에 바를 때, 그리고 나병환자의 정결 예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우슬초로 피를 찍어 집과 사람에게 뿌리며 정결함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결한 마음은 더러워진 것이 깨끗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상태입니다. 죄의 얼룩이나 때가 전혀 보이지 않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죄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다시 죄에 전염되지 않도록 죄를 멀리하며 죄를 경계하며 회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겨져야 합니다. 정녕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십니까? 그리스도의 피인 우슬초로 정결하게 되기 원하십니까?
 



둘째로 나를 정직하게 하소서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18세부터 집을 나와 일을 하였습니다. 스무 살 되던 해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일리노이주상점에서 일하던 때였습니다. 밤늦게 상점 문을 닫고 장부를 보며 결산을 하던 링컨은 장부 금액보다 3센트가 더 많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생각해보니 낮에 어느 부인으로부터 3센트를 더 받은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걸어서 한 시간 도 더 되는 부인의 집을 찾아가 그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때 부인은 돈을 받고, “이것은 백금보다 더 귀한 3센트이군요. 당신의 정직한 마음은 반드시 참된 값으로 인정받을 때가 올 것이에요라고 덕담을 해주었습니다. 부인의 말대로 링컨은 정직한 마음으로 미국의 운명을 바꾸는 대통령이 되어 세계 역사에 남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정직입니다. 사회의 총체적 위기는 양심의 상실과 부정직이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일찍이, “거짓이여, 너는 이 민족을 망친 원수로다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이 세태를 탓할 것이 없습니다. 어두운 밤에 별이 더욱 빛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양심을 버리고 정직하지 않을수록 그리스도인은 더욱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그리스도인을 찾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정직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여기의 정직한 영은 원어로나콘 핫데쉬인데 정결한 마음을 굳게 지켜나갈 수 있는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범죄함으로 파괴되었던 자신의 마음을 회복시켜 더 이상 흔들림이 없게 해달라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다윗의 관심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새로운 삶,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다시 회복하고 흔들리지 않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마음이나 영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지 않고 새롭게 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심령을 고쳐 사용하기에는 전적으로 부패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정직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생각이 불의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정직한 영으로 거듭나게 해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로 자원하게 하소서
이솝 우화 (Aesop's Fables)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자가 딸의 결혼식을 준비하려고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했습니다. 주인이 짐승들에게 내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하려고 하는데 너희들의 생각은 어떤가?”라고 묻자, 짐승들은 일제히 대 찬성입니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거위를 보며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거위요리가 좋겠다라고 말하자, 거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말했습니다. “주인님, 저는 큰 알을 낳아주잖아요. 저 암탉을 잡으시지요.” 그러자 옆에서 그 소리를 듣던 암탉이 손을 저으며 저는 매일 꼬꼬댁'하며 아침을 알려주잖아요. 저 양을 잡으시지요.” 그때 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주인님, 저는 따뜻한 털을 제공해주잖아요. 말고기는 어떤가요?” 그러자 말이 소를 가리키며 주인님이 여행가실 때 누가 태워 줍니까? 소고기가 최고이지요라고 하자, 이번에는 소가 고함을 치며, “주인님, 나처럼 열심히 농사를 지어주는 짐승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항의를 했습니다. 짐승들은 먹고 마시는 흥겨운 잔치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결국 아무도 희생하는 일에 자원하여 나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여기의 자원하는 심령은 원어로 웨르아흐 네디바인데 부드러운 마음, 자발적인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자원하는 심령이 지속적으로 내 속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죄로 인하여 구원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단지 구원의 감격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빼앗기면 자원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억지로 모든 것을 하게 되어 결국 영적 침체에 빠집니다. 능력 있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영적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혹시 자원하는 기쁨을 잃어린 것은 아닙니까? 억지로 일을 하기에 즐거움이 없습니까? 이제껏 지은 죄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자원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인 95개 조항 항의문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회개하라는 말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나를 통해 회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은 죄인만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감옥에 있는 죄수들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교황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제들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루터에 의하면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처음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인데, 로마 카톨릭이 이 말씀을 잘못 번역했다고 말합니다. ‘회개를 단순히 고해성사를 하라는 의미로 해석한 것입니다. 루터는 자신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이해했다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회개란 단순히 자기 잘못을 사제에게 고백하는, 고해성사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화되고, 행동이 변화되는 것까지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회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마음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고 삶이 달라지는 것이 참된 회개인 것입니다. 후에 루터는 그동안 회개한 것을 다시 회개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회개하는 의식만 하였지, 진정한 마음의 회개, 행동의 회개는 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 사과만 했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복하였습니까? 지은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참된 회개를 하였습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철저히 거듭나야 합니다. 다윗처럼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정결하게 해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정직한 영이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원하는 심령을 얻기 위하여 간절히 구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