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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1~12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1~12
그 청년 바보 의사
라는 책의 주인공은 안수현입니다. 그는 고려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내과 전문의로 일을 하던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2006년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유행성 출혈열에 감염되어 33세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장례식에 4,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찾아왔습니다. 장례식장에 몰려온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의 삶이 알려지면서, 책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의사 안수현은 자기 것을 챙길 줄 모르고 외롭고 소외된 사람에게 가진 것을 다 털어주어서 바보 의사라고 불리었습니다. 돈이 없어 검사를 받지 못하는 조선족 할아버지의 검사비를 대신 내주고, 치료하던 환자가 숨지면 장례식에 찾아가 유족을 위로하고, 환자들의 병실을 밤마다 찾아가 기도해주며, 실의에 빠진 환자들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죽음을 앞둔 환자들과 가족들, 병원 동료들, 구두 닦는 아저씨, 매점 아주머니 등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의약분업 사태로 동료들이 병원에서 파업할 때 비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친구들에게 메일을 보낼 때마다 마지막에 늘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스티그마- 예수의 흔적, 안수현 그만큼 그는 예수의 흔적으로 살기 원하였습니다. 바보 의사 안수현은 그리스도인을 혈관에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의학적으로 혈관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그리스도인을 통해 흐르기 때문이다. 혈관인 그리스도인이 더 많이 나누고 베풀수록 더 많은 생명의 피가 흐르게 된다.” 자신도 환자들에게 직접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헌혈을 하고 난 뒤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 양팔에 남은 주삿바늘 자국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예수의 양손에 있는 못 자국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상처 난 손을 사람들에게 보이실 때 얼마나 기쁘셨을까? ‘내가 너를 위해 내 생명을 주었다. 내가 너를 위해 피를 흘렸다.’ 나는 병원 생활을 시작하기 전의 기도 제목을 생명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로 잡았다. 의사로서 생명을 전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환자나 병원 직원들, 선배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도록 돕는 살아있는 기억 매체(living reminder)가 되기를 늘 소망한다. 부활의 주님께서 내 평생 사는 동안 이 기도에 응답해주시기를 바란다.” 안수현 의사, 그는 자신의 고백대로 살다가 하나님 품에 안겼고, 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망 권세를 넘어 부활하신 예수의 흔적을 가진 바울처럼 안수현도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부활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부활은 죽은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합니다. 흔적, 즉 스티그마인 부활의 증거가 보여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은 누가복음의 대단원으로 소망과 기쁨을 주는 예수의 부활 및 부활하신 이후의 사역과 승천이 그 내용입니다. 부활 사건은 십자가 사건과 별개의 사건이라기보다 밀접히 연결된 연속된 사건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특히 본문은 예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천사로부터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사도들에게 즉시 달려가 소식을 증언한 내용과 부활 소식에 대한 사도들의 불신적인 반응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서 어찌하여로 번역된  (why)’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자의 무덤에서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믿음의 현주소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를 해도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참된 믿음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도리어 책망을 들을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의 생애와 죽음까지 믿으면서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의 부활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나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이 말한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말라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사망을 이겼나니
선교사 리빙스톤 (David Livingstone)은 아프리카의 영혼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추장 아들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리빙스톤이 고쳐 보려고 애를 썼지만 가망이 없습니다. 리빙스톤은 죽어가는 추장의 아들을 붙들고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추장은 기도하는 리빙스톤을 치면서 당신이 기도할지라도 내 아들은 이미 죽었소!” 그러고 보니 추장의 아들은 숨이 끊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리빙스톤은 주여, 제 믿음을 보옵소서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소생케 하심을 믿습니다 하고 기도하고 눈을 떴습니다. 그 때, 아들이 몸을 틀더니 일어나 앉았습니다.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리빙스톤 선교 역사에 대단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영국의 스덴이라는 기자가 리빙스톤을 찾아갔습니다. 4개월이 가깝도록 리빙스톤의 생활을 추적하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함께 만났습니다. 그 후 스덴은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스덴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리빙스톤에게 전도를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덴은 리빙스톤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리빙스턴은 영국에서뿐 아니라 주변 선교사들도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조차 배신하였기에 리빙스턴은 엄청난 코너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지켜보면서 놀라웠던 사실은 그 어려운 상황과 고난을 참고 인내하는 힘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인내가 아니라 사망까지 이겨내는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리빙스톤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싶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 내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올라가는 인생으로 바뀝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미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여기의 굴러 옮겨진은 원어로 아포케퀼리스메논 인데 돌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굴려졌다는 사실을 밝히는 단어입니다. 누가는 신적 수동태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었습니다. 즉 무덤의 돌이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옮겨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며 예수의 부활 또한 하나님에 의해 발생된 초자연적 사건임을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당한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바꿈표였습니다.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로 바꾸신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부활의 현장인 무덤에서 찾아온 자들을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무덤과 상관이 없으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망 권세조차 예수를 가두어 둘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시체에 연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시신에 향유나 바르면서 지난 일을 회고하는 무기력한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을 여시고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만방에 전하고 알려야 합니다.
 

둘째로 말씀이 기억나니
성 소피아 교회에 소장되어 있는 보고서를 가이드 포스트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목은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 (Pontius Pilate's report)’입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보낸 빌라도 총독의 보고서로 중요한 증거를 전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각하께 문안드립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최근 수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은 나라의 운명까지도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각하께 소상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라며 성경에 있는 기록과 비슷하게 보고서의 내용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말합니다. “원치 않았지만 폭동이 무서워서 희생양으로 예수라는 청년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비었고 제자들은 용기를 내서 예수가 부활했다고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의 생애는,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이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각하,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저는 각하의 가장 충실한 신하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예수의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엄연한 사실입니다. 부활은 철학적으로 추상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사건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설명할 문제도 아닙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부활에 대한 예언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우리를 향하신 약속의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약속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여기의 기억하라는 원어로 므네스데테입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언급하셨던 예언을 회상케 함으로 부활사건의 역사성과 하나님의 성취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억할 내용은 누가복음 9 22절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는 예수께서 하신 부활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인들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은 성도라도 말씀을 잊어버리면 불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말씀을 잊고 느낌과 감정에만 의존하다 보니 부활의 역사가 눈 엎애 펼쳐졌는데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기뻐해야 할 순간에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거듭 강조한 것입니다. 느낌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자들이 말씀을 기억하니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만져보지 않고서도 부활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체험이 아니고 말씀입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소망이 보이나니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스위스의 의사이자 학자요, 유명한 저술가입니다. 그의 간증집 듣는 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투르니에와 아내는 금실 좋은 부부로 소문이 났는데, 한번은 그리스에 휴가를 갔다가 아내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죽기 직전에, 아내는 평화로운 미소를 띠고 남편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천국에 도착하면 먼저 가 계신 시부모님을 만나 정말 즐거울 것 같아요.” 그 말에 남편 투르니에 박사는 굉장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내가 죽음을 마치 기차를 타고 제네바에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재회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를 떠나 보낸 후 그의 믿음은 더 강해졌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아내와 육체적으로만 결혼한 부부였던 것이 아니라 아내의 소망과 믿음 속에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부활의 예수가 계셨기에 절망의 상황에서도 소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사망권세가 희망을 삼켜버리려 해도 부활의 주를 통해 소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어려움이 있어도 소망을 볼 수 있는 부활의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기의 놀랍게 여기며의 원어는 다우마존 인데 기이히 여기다, 이상히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누가는 여인들이 전한 예수 부활 소식을 듣고 불신하던 사도들과 달리 베드로는 곧 바로 무덤에 달려갔다고 언급함으로 부활을 확인하고자 하는 베드로의 열정어린 태도를 부각시켰습니다. 베드로는 비었는 무덤을 통해  부활의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무덤과 죽음에 안티(Anti)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무덤으로 향했다가 거기에서 달려 나오는 상황을 말합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고, 고안해 낼 수 없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은 무덤을 향해 절망적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기독교는 무덤을 열고 나오는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슬픔의 반대말은 기쁨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부활만이 참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일보 '겨자씨'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마을에 꽃 파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외롭게 혼자 살았습니다. 그러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항상 웃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왜 난들 괴로움이 없겠소? 웃을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나도 고통이 오면 3일만 참자, 3일만 기다리자라고 자신에게 말한다오."  그렇게 3일만 기다리면 고통이 지나가고 기쁨이 온다는 것입니다.
삶의 한 복판에서 부활의 체험이 나타나야 합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계속해서 염려와 두려움이 있는 까닭은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현장에서 사망을 이긴 부활의 흔적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 항상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