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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최일환목사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사도행전11:19~26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사도행전11:19~26

2009년 1월 18일 장안중앙교회 최일환 목사 주일 낮 설교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설교: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아픔처럼 큰 아픔이 없습니다. 사랑하던 여인에게 결혼 프러포즈를 했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면 그 아픔도 죽고 싶을 정도일 것입니다. 회사에서 다른 동료들은 승진을 했는데 나만 안 되면 회사로부터 거부당했다는 느낌,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訓練 과목 중에 하나가 실패, 거절, 절망이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여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왜 다소에 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사도행전9장을 보게 되면 고향인 다소에 가 있던 사울은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버림받은 심정으로 조용히 고향에서 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시골에 쳐 박혀 있는 것일까요?

그 잘나가던 사울이, 부족함이 없던 사울이 놀랍게 변신을 합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넘어지고, 시내로 들어가 하나님이 준비시켜 놓은 사람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러자 그를 죽이겠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 때문에 성벽에서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칩니다.

엄청난 은혜를 받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지만 바울은 유대인과 예수 믿는 사람들로부터 일종의 엄청난 거부를 당합니다.

참으로 뛰어나고 똑똑했던 사울입니다. 그런 그가 고향에 돌아가 외로이 있을 때에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외로움 속에 거부당한 아픔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일종의 훈련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훈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사용하고자 할 때에 반드시 그 인간적인 것을 꺾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얼마나 강한지 사람을 주먹으로 쳐 죽입니다. 자기 주먹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년간 광야에서 모세라고 하는 인간을 꺾으시고 훈련시키셔서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시려고 하실 때, 이 拒否라고 하는 변장된 축복을 통해서 우리의 강한 기질을 꺾어 놓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꺾으실 때는 아프고 힘들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는 기회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는 일을 죽도록 싫어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보세요.

옛날 같으면 창피하여 못 입을 터진 청바지, 각종 피어싱, 코걸이, 심지어 배꼽 고리도 한답니다. 나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삽니다.

요즘 청소년들 잘못하는 것 간섭했다가 무서운 봉변을 당합니다. 아이들도 어릴 때 부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라 간섭받기를 싫어하고 자신의 고집을 꺾이기를 싫어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남의 간섭이 기분 나쁘지요?

심지어 아내가 뭘 조금 간섭을 하면 난리를 피우시는 분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권위로 인간적인 것이 꺾어질 때 거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지금 거부당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나의 강한 기질을 꺾으시는 기회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합시다.“주여 /나의 못된 성격과 고집을/ 꺾어 주시옵소서”

 

서울에 어떤 귀한 권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그분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첫아들의 큰딸이 정신지체 장애자입니다. 권사님의 간증이, 내가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헌신했는데 정말 하나님께 버림받고 거부당한 느낌이었답니다.

그런데 이 아이로 인해서 교만하던 그 부모들이, 삼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살던 자녀들이, 저 아이로 구원을 얻었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저 아이는 우리 집 복 덩어리입니다”라고 간증을 하게 하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꺾으실 때 변장된 축복이 거기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나의 최대의 장점이라 여겼던 부분,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부분을 여지없이 내려치십니다. 미워서가 아닙니다.

반대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의 강한 기질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는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훈련하시나요.

인간을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훈련은 참으로 세밀합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이 두 사람은 대단히 대조적인 사람인 것을 보게 됩니다.

사울은 희랍철학이 유명한 다소라는 도시 사람이고 바나바는 섬 출신입니다.

사울은 가말리엘 문화의 일류대학 출신이고 바나바는 별로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울은 사람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찾으러 다닌 사람이었고, 바나바는 찾아서 살리겠다고 사람을 찾으러 갑니다.

누가 더 인간적으로 성공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실상은 정 반대입니다.

능력 있는 사울이 별 볼일 없는 바나바에게서 영적인 영향력을 입게 됩니다. 사울의 생애가 바나바를 통하여 바뀌게 됩니다.

바나바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의 초점은 이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두 모습을 보여 줍니다. 먼저 바나바를 보세요.

1)"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24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사람은 모름지기 착해야 합니다. 딸들 시집보낼 때는 다른 것보다 심성이 착한 사람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 어떤 가정도 남자가 다른 것은 없지만 착한 줄을 알고 딸을 시집보냈더니 아주 괜찮게 사는 사람 있어요.

누군지 아세요. 수원 정자동 최아무개 목사라고 …….

여기 착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착함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직과 진실, 그리고 죄사함 받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결코 그냥 쓰시지 않습니다.

 

2)"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24절)

착한 사람이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바나바에게는 사울에게 없는 자유함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울이 자기의 강한 기질에 묶여 있었다고 한다면, 바나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나바가 보여준 자유를 살펴보며 우리도 동일한 자유를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1.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이미 사도행전 4장에 나왔던 인물입니다. 성령 충만한 바나바가 자기의 밭을 팔아 헌금하며 교회를 위하여 앞장서서 일했던 인물입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헌신 자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교회를 핍박할 때 8:3절을 보면 "교회를 잔멸할 새"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때 바나바라고 무사했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바나바도 사울 때문에 고생 많이 했을 것입니다.

바나바에게 사울을 향한 미움과 독한 감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25절을 보면 바나바가 이 과거로부터 자유스럽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바울의 고향을 찾아갑니다. 그토록 핍박하던 사울,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울, 그를 용서하고 그를 품으려고 찾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서도 과거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면 안 됩니다.

과거의 아픔 때문에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속박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자유스러워질 때, 정말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축복이 있습니다.

창세기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 13년 동안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그 고생할 때 형들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형들로부터 당한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창45:5절에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 눈물이 납니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하나님 안에서 자유한 사람 요셉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감옥에 가두었던 사람인데, 오히려 자기를 찾아준 바나바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거부당하여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자신을 찾아온 바나바 때문에 사울은 변화된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바나바가 많아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체면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입니다.

안디옥은 당시 50만이 모이던,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핍박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안디옥에 가서 전도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게 합니다.

안디옥에 교회가 생기니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바나바를 그들에게 파송합니다. 바나바가 그곳에 가서 모든 사람의 믿음을 굳게 하는 지도자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의 목회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그런데 바나바가 가서 보니까 일꾼이 필요합니다. 당시에 사울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고 인기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별로 배운 사람도 아니고, 백그라운드도 별로였던 사람입니다. 결국 사울을 데려오면 자신의 체면과 인기가 떨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얼마든지 혼자서도 안디옥 교회를 담임할 수 있던 능력이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자신의 인기와 체면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기에, 사울을 데려다가 설교하게 했습니다.

 

나보다 능력이 있는 사람, 나보다 실력이 있는 사람을 쓸 줄 아는 것, 이것은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일을 할 때는 내 체면과 내인기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체면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이 체면으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체면 문화가 다른 나라에 비해 심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에서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합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을 보세요. 그는 세계최대 강국 전직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면을 버립니다. 그가 은퇴 후에 고향교회에서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쳤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체면이 우리 자유를 가로막습니다.

 

여기서 한번 자유스러워지면 하늘을 나는 새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체면보다, 나의 인기보다 교회와 복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3.교만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안디옥 교회의 당회장은 바나바입니다.

사울은 신임 교육전도사 정도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여러 명의 교역자 중에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불러 세우라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을 합니다.

선임은 분명 바나바입니다. 그런데 선교지에 가서 사역을 할 때 주인공은 바울이라 이름을 바꾼 사울이 주인공입니다.

 

계속되는 선교여행을 가만히 살펴보면 주도자는 바울이고 보조자는 바나바입니다. 어찌 보면 되게 기분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버리고 섬길 줄 아는 낮아지는 자가 된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다름 아닌 동역자 의식입니다. 그는 바울과 경쟁자 의식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일의 동역자 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확신합니다. 바울이 크게 쓰임 받았으나 바울을 바울 되도록 돕고 이끌어주고 협력하며 뒷바라지 한 바나바가 하늘나라에서는 더 큰상을 받을 것입니다. 잠 18:12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만들어 들어 쓰십니다. 바나바가 예루살렘교회 평신도였다가 위대한 지도자가 된것도 하나님의 만드심이고

사울이 바울되어 쓰임 받은 것도 하나님의 만들어 쓰심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베드로도 전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여러분도 여기에 포함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이나 열심히 아닌 자기 포기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100세에나 언약이 성취되게 하십니다. 자기 포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모세도 혈기있던 40세가 아닌 80세나 되어 불러 쓰십니다.

 

여러분은 누굽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사람이면 아멘합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자유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