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레위기 1:1-17
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레위기의 첫 단어는 “와이크라”, 번역하면 “그가 부르시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그 책의 첫 글자를 따서 책 이름을 짓기 때문에 “와이크라”가 레위기의 원래 이름입니다. 주전 300년 쯤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는데 70인역이라고 불리우는 이 헬라어 번역에서 처음 “와이크라”를 “레위티콘” 즉, 레위인에 관한 것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헬라어 번역, 그 다음엔 라틴어 번역, 그리고 영어 성경을 거쳐서 한글 성경에서도 모세오경의 세번째 책을 레위기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레위기의 대주제는 거룩이며 1장에서 17장까지는 제사와 성막과 관련된 거룩에 대해, 18장에서 27장은 실질적인 삶에서의 거룩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거룩은 인간의 노력과 수양을 통해 점진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어떠한 경지가 아닙니다. 인간은 누적된 과거, 다시 말해 과거 선하게 살기 위해 한 노력과 시간을 더해 내가 얼마나 거룩한 지를 평가합니다. 반면, 성경에서의 거룩은 예수 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이루신 성도의 온전한 미래를 현재로 당겨오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과거의 자기 행위를 소급하여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시간의 흐름이 아닌 완성된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덮어버리는 삶을 살게 되는데 이는 거룩은 인간의 행위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예수 안에서 값 없이 주어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함께 읽을 레위기 1장은 번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거룩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인데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필요한 것이 제사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제사인데 수요성경공부에서 배우셨듯이 태우다라는 영어 단어인 “burn”제라고 외우시면 기억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번제를 히브리어로 “올라”라고 하는데 이는 위로 올라가다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땅에서 온전히 태워진 제물의 향기가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이유에서 붙혀진 이름입니다. 이처럼 번제는 제물의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는 점 때문에 완전한 헌신이란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제물
(1-5)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거룩을 위해서는 제사가, 정확히는 제물의 피흘림이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다섯개의 제사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번제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질 번제제물은 흠 없는 수컷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흠이 없다’라는 말을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흠이 있는 제물이 어떤 모습인지는 말라기 1장 8절에 나오는데 눈이 멀고, 다리를 절고, 병든 동물들이 예로 나옵니다. 번제를 드리기 위해 나의 소나 양 중 제물을 고를 때, 어차피 모조리 태워버릴 것인데 팔거나 먹기 찝찝한 병든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제물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제사가 아닌 나를 위한 제사, 대충 죄를 용서 받아 잘 먹고 잘 살아 보겠다는 나의 생명 연장을 위한 제사 밖에는 관심이 없음이 드러납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4절에 번제물에 안수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안수는 죄의 전가를 상징합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흠 없는 예물에 안수를 하면 그 사람의 죄가 예물에 전가되고 동시에 예물의 흠 없음이 안수한 사람에게도 전가가 됩니다. 이 원리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말씀 만으로도 치유하실 수 있었지만 굳이 한센병 환자나 혈루병 걸린 여인과 접촉하신 이유도 그들의 부정함을 자신에게 전가 시키고 자신의 정함을 그들에게 전가 시키는 복음의 원리를 증거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기적들이 단순히 병을 고치기 위한 기적이 아니라 죄사함의 모델, 즉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깨끗하게 되는 지를 미리 보여주시는 표징이었습니다.
죄의 전가는 사실 인간의 사고로는 동의 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전가는 무책임하고 심지어 부도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행동과 말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을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그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전가는 그 반대입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남에게 모조리 떠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전가는 자신이 죽은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멋있는 존재가 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내가 내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 힘으로 선하게 살 수 있다는 자기 의를 모조리 버려야만 나의 죄를 전가할 수 있습니다. 그게 되지 않아 자기 죄를 끝까지 스스로 책임지려고 한 자가 가롯 유다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라도 자기 죄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5절에 나와있듯이 제물을 잡아 죽인 후에는 그 피를 뿌려야 합니다. 죄를 전가받은 제물이 그 죄의 대가로 죽어 피를 흘려야 죄사함의 제사는 완성 됩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안수하고, 제물을 죽이고, 피를 뿌리는 모든 일이 회막문에서 일어납니다. 피 흘림 없이는 하나님을 만나는 회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제사 절차
(6-9)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는 피부와 옷을 비슷한 개념으로 취급합니다. 6절에서 쓰여진 가죽을 벗기고 라는 동사 pasat 은 레위기 16장 23절에서는 옷을 벗기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또한, 레위기 13장에 기록된 한센병 환자에 관한 법에서는 한센병 환자의 피부와 옷 둘 다 부정하게 취급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는 것은 번제물의 옷을 벗기는 개념과 비슷하며 결과적으로는 번제물을 벌거벗게 한다는, 즉 번제물의 수치를 드러낸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받으시는 번제물은 흠이 없지만 정작 자신은 벌거벗겨져 수치를 당해야 합니다. 나의 수치를 전가받은 번제물의 가죽을 내 손으로 벗길 때, 우리는 나 대신 수치를 당하는 번제물에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각을 뜬다는 것은 제단 위에 제물 전체를 다 올려야 했기 때문에 번제물의 팔,다리 등을 토막 낸 것으로 보여지며 번제물의 모든 부분들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태워지기 위함입니다. 9절 이후 부터는 제사법은 거의 동일하고 예물의 종류만 달라집니다. 다음 예물로 넘어가기 전에 눈 여겨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2절에서 9절까지를 읽어보면 제사장이 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2절부터 나오는 동사가 죄다 3인칭 단수입니다. “예물을 드리고”, “번제물에 안수하고”, “수송아지를 잡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는” 제사의 모든 절차에서 3인칭 단수 동사가 쓰여지는데 그 뜻은 위에 나열된 제사 절차를 하는 사람은 제사장이 아닌 번제를 드리러 온 사람이란 뜻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는 것은 5절에 피를 사방에 뿌리는 것과 7-8절에서 불에 번제물을 태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번제물을 잡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는 모든 절차를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합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굳이 번제를 드리러 온 사람에게 직접 동물을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게 하시는 이유는 그 제사에 함께 참여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생각했을 때는 내가 굳이 제사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제사장에게 부탁해서 내 죄를 씻는 쪽이 훨씬 수월하고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제사가 내 밖에 있게 되면 제사는 나의 생명 보존을 위한 도구가 될 뿐입니다. 번제는 단순히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조금 더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우리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민수기 15장에 보면 안식일에 일한 자가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그 결과로 죽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도 번제를 드려서 죄 용서를 받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죽이라고 명하십니다. 이 뜻은 번제라는 것은 애초에 인간의 죄사함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것의 모형이며 무언가를 증거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진짜 죄가 사해지는 방법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는 번제물로 오실 어떠한 분의 완전한 제사를 증거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를 드리러 온 이스라엘 백성을 단순히 방관자로, 제사를 통해 죄사함이라는 유익을 얻는 자들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 직접 참여하여 제사 절차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를 통한 유익만을 챙겨가는 자들이 아니라 제사의 절차가 증거하고 있는 구원의 원리를 직접 경험하고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번제 드리는 법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성이 폭로 됩니다. 안식일에 일하면 안되는지 뻔히 알면서 왜 나무를 한 것일까요? 제사로 죄사함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제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저 나의 죄사함, 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보고 계십니까? 그냥 죄 짓고 죄사함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번제가 단순히 이스라엘의 죄사함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닌 것처럼 십자가 또한 단순히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며 번제에 참여한 자들은 제사를 삶에서 경험하며 증거했듯이, 십자가에 참여한 자들 역시 그 십자가를 삶에서 경험하며 자신의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합니다.
예물
(10-13)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그가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는 그것의 각을 뜨고 그것의 머리와 그것의 기름을 베어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두번째 제물은 양이나 염소입니다. 첫번째와 공통점은 이들도 가축 중에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가축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 속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그게 예물의 본질입니다. 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애초에 나의 것을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나의 것을 더 큰 나의 것을 얻기 위해 투자할 수는 있지만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고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했는데도 쫄딱 망하면 본전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준비한 어떤 것도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정성껏 준비해도 그 속엔 더러운 속셈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고백처럼 그래서 예물은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하셔야 합니다. 교우님들께서는 예배에 어떤 예물을 들고 나오십니까?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의 피를 가지고 나오십니까, 나의 열심과 노력을 들고 나오십니까.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후자는 받지 않으십니다. 흠 없는 제물의 피 만을 받으시지 병들고, 다리 저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14-17)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다가 그것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피는 제단 곁에 흘릴 것이며 그것의 모이주머니와 그 더러운 것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지고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마지막 제물은 새의 번제입니다. 레위기 14장에 따르면 앞서 언급된 가축들이 너무 비싸 감당하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은 새를 번제로 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제물을 드려야 했다는 것은 인간 모두가 죄로 인해 타락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생활이 어려우면 제물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은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그 원칙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레위기의 번제를 통해 말씀의 강령이신 예수, 그 예수의 십자가 제사를 올바르게 봐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의 십자가를 그저 나의 죄사함을 위한 십자가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건 제사를 나를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번제를 드리러 온 사람을 제사 과정에 포함시켜 그들을 제사를 증거하는 자들로 사용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내가 죄사함 받기 위해 십자가를 믿는 자들이 아니라 그 십자가와 하나가 되어 십자가를 삶에서 경험하고 증거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그게 구원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사법을 통해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참제사, 예수의 십자가 제사로 인해 우리의 죄가 사해졌음을 배웠습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자들이 아닌, 나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나는 거룩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나요?
2. 왜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나요? 전가의 의미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이 아닌 번제를 드리러 온 사람이 직접 제물을 잡게 하실까요?
4. 나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무엇을 예물로 드리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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