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283장 ‘나 속죄함을 받은 후’
오늘 말씀은 속죄제를 드리는 규례를 계속 설명합니다. 우선 주의해야 할 점은 속죄제에 속죄의 기능이 있지만 앞서 살핀 번제나 화목제 모두 속죄, 즉 죄를 씻는 효력이 있기에 속죄제가 죄를 속하는 기능만 지니고 있다고 해석하면 다소 혼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속죄제의 전체적인 윤곽을 살펴보면 정결하게 하는 정결제 또는 정화제로 표현하는 것도 무방합니다. 속죄제의 목적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은 부정함 가운데 거하시지 못하기에 예배 처소를 정화하고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거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주체는 신분에 따라 자신이 드려야 하는 흠 없는 동물을 선택하여 회막의 입구로 가져와서 안수하고 잡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동물로 제사를 드리는 다른 제사 의식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그 피를 취하여 처리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제사장은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인 성소에 들어가 휘장과 향단 뿔에 피를 뿌렸고, 평민들은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회막의 번제단에 피를 뿌렸습니다. 더 나아가 이후 레위기 말씀을 보면 속죄소 및 제사장들의 귀와 손가락과 발가락 및 옷에도 피를 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속죄제는 회막 곳곳에 피를 바르거나 뿌리는 의식을 동반하는데 여기에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효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족장과 평민이 드리는 속죄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족장의 속죄제(22-26)
(22-24) 만일 족장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숫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그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지니 이는 속죄제라
족장은 백성들을 인도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인물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주신 계명 중에 하나라도 모르고 또는 실수로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깨우침을 받게 되면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나 이스라엘 온 회중이 속죄제를 드렸을 때 드린 수송아지 보다는 값이 저렴한 숫염소를 안수하고 잡았습니다. 앞에서 번제나 화목제가 드리는 동물의 값어치의 순에 따라 설명을 이어갔다면 속죄제는 제사드리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 진술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동물의 가치에 따른 순서와 유사하게 진행됩니다.
특별히 개역 개정에서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이라고 옮긴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주의해야 할 점은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을 때라는 사실입니다. 의도적으로 저지른 죄는 제사의 조건이 아니라 처벌의 조건이 됩니다. 따라서 속죄제에 해당하는 경우는 죄인 줄 알지 못하고 범하여 허물이 있는 경우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5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이라는 부분이 원문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이 구절을 개역 한글로 보면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공동 번역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깨닫는 대로’, 새번역 역시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는 대로’ 라고 번역합니다. 원문을 살펴봐도 다른 사람이 알려준다는 의미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본인이 깨닫게 되든, 또는 다른 사람이 일러주든 그 허물을 본인이 알게 되었다는 포괄적인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세상은 보통 죄를 저지른 사람을 범죄자라고 합니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범죄로 인한 책임을 다하면 그 사람의 가치는 원상회복이 된다는 듯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선포합니다. 죄인이라는 단어는 죄에 사로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죄가 사람을 규정 짓는 것입니다. 보통 말하듯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죄에 묶여 있기에 사람에게는 죄를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대학생 시절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나 역시 죄인이라는 성경의 선포가 새삼스럽게 다가왔었습니다. 대학생이라는 인생의 황금기를 맞아 세상에서는 사람이란 모든 가능성을 이룰 수 있고,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긍정적인 존재라고 말하는데 왜 사람을 이렇게 절망적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반문이 일었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말처럼 쓸데없는 죄의식으로 오히려 사람을 공포와 불행으로 몰고 가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가 그렇듯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세상은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가고 궁극적인 것은 없기에 그 무엇에도 빚진 것 없이 그냥 순간순간 최선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면 된다는 생각과 세상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두 선택지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말로 스스로를 속이든지,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로 스스로를 속이든지 어느 쪽이 거짓이든 택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살펴봐도 제 안에 제 자신을 보다 좋은, 보다 선한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내적 동력이 없다는 사실을 실토해야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눈을 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아무리 노력해봐도 거기에는 만족스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동안은 어떻게 사람이 자살을 하지 않고 살아서 자식을 낳을 수 있는가 하는 염세주의적인 고민과 더불어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 이 세상의 소중한 공기와 음식 등 자원이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기로 결심했고 비록 짧은 인생이지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고백이 더 정직한 말이었으며, 오히려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마지막 양화진 목요강좌에서 죄인이라는 단어에 관한 탁월한 해석을 들었고 동의했습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단어가 바로 죄인인데, 한 사람이 죄인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타인이 규정한다는 통찰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죄인으로 정해지는 순간 모든 관계는 끊어지고, 그 책임은 그가 져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릅니다. 죄인의 여부는 본인이 규정합니다. 물론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스스로 모든 관계의 가능성을 포기하면 세상에서와 달리 다른 이가 나타나 책임을 져주시고 진정한 의미로 자신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단절이 아닌 연결이 생겨나고 새 생명이 찾아오는 역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음 말씀이 그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25-26) 제사장은 그 속죄 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제사장이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번제단 뿔에 찍어 바르고 나머지 피를 번제단 밑에 쏟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이 과정을 거쳐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하면 용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속죄제는 다른 동물 제사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죄인이 자신을 동물과 동일시하고, 자신의 죄를 동물에 전가한 후에 동물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한 자는 의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장 17절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자신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겉보기에 건강해 보이고 건강하다고 주장해도 속에 병이 깊어 발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인임에도 불과하고 의롭고 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는 예수님이 만나 주십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하나님 대용품을 붙잡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결국 헛된 것을 붙잡았다고 한탄하게 될 날이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 겸손하여 사함, 즉 바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평민의 속죄제(27-35)
(27-31) 만일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 그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이제 평민이 드리는 속죄제에 관한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우선 31절까지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를 다룹니다. 그 모든 절차는 족장이 드리는 속죄제와 차이가 없음을 봅니다. 평민이라는 단어는 백성이라는 뜻의 단어와 땅이라는 뜻이 단어가 결합한 것으로 그 땅 출신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그 땅에 거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와 속죄제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종에 상관없이 그 땅에 속한 이는 누구가 제사장 나라이자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속죄제는 특별히 정결 또는 정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피 뿌리는 의식은 이스라엘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내는 효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특별히 속죄일에는 속죄소에도 그 피를 뿌려 지성소를 정결케 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죄가 단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까지 오염시키며 그 오염을 정결케 하는 합당한 수단이 바로 동물의 피임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속죄하지 않고 죄를 제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실 뿐 아니라 그 오염된 성소에 계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명은 하나님이 그 가운데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백성이 되어 모든 민족에게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한다는 놀라운 사건은 놀라운 은혜인 동시에 언제든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위대하고 위험한 사명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의식하며 성소를 정결하게 유지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가 거주하시는 성전인 우리 모두 이러한 엄중한 자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이 세속에 더럽혀지고 교회가 세상에 물드는 일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의 교회가 그렇게 부지 중에 세상과 타협하고 범죄하여 허물 중에 있을 때 그 여파는 우리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가게 만드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사모하는 교회입니다. 또 교회인 우리가 모여 이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기로 약속하신 처소로서, 음부의 권세조차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너지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한다면 우리 가족과 우리나라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죄를 살피고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보내지 않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간절한 사모함을 품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32-35) 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제물로 가져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그 속죄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죄제물로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 제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떼낸 것 같이 떼내어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마지막으로 어린 양을 가져왔을 때 속죄제에 관해 논합니다.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속죄제물로 잡는 경우인데 특별히 마지막 말씀에서는 예전에 없던 설명이 나옵니다. 바로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른다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평민이 속죄제를 드리기에 앞서서는 번제를 이미 드렸던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속죄제의 규정을 점점 세밀하게 가르치심으로써 그들이 바른 예배자로 서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속죄제는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정결케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레위기에서는 성소가 정결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예배자인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떠한 믿음의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살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대용품으로 만족하고, 하나님 대용품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면 하나님만을 바르게 예배하고 모든 순간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세속의 물결 가운데 부지중 저지른 우리 죄를 깨닫는 은혜를 구하며 오늘도 정결한 예배자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속죄제를 통하여 죄인 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살펴봅니다. 하나님 대용품에 만족하고, 또는 나름대로 만들어낸 안식일 준수와 같은 법규가 아니라 진정한 주인 되신 하나님을 우리 삶의 모든 기준이자 주인으로 정립하며 살아가는 오늘 하루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죄를 속하는 것 외에 속죄제의 효력은 무엇입니까?
2. 나는 나의 죄인 됨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3. 내가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러한 죄와 허물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4. 그리스도의 성전된 나는 예수님을 어떠한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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