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25-36
찬송가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이 신비!(25-32절)
로마서 9-11장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이 말씀은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신비하게 펼쳐지는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신묘막측하고도 불가사의한 구원의 역사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고 있습니다. 바울은 11:1-24에서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단지 실패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구원하는 통로로 삼으셨음을 확인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유대인)들에게 ‘형제들아’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형제(아델포스)’는 ‘자궁’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굉장히 친밀하고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다니며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환영은 고사하고, 대부분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을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형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원수라고 생각했으면, 로마서 9-11장은 없었을 것입니다. 8장에서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난 뒤에, 12장의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자,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분별하자’라고 권했을 것입니다.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바울은 스스로 지혜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이 신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신비’는 32절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데, 구원받은 이방인의 수가 찼을 때, 최종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도 임할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신비(mystery)’라는 단어는 ‘비밀(secret)’과 비슷한 의미로 보이지만,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비밀’은 ‘감추어져 있고, 보여주지 않아서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신비’는 눈앞에 이미 펼쳐져 있지만, 그것을 보는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는 우리 앞에 늘 펼쳐져 있었지만 깨닫지 못하다가, 마음의 눈이 밝혀지는 순간에 모든 것이 또렷하게 인식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신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언제나 사람의 생각과 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각자 각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만 생각해도 정말 오묘하기가 표현하기가 어렵고, 굉장한 은혜가 아닙니까? 문자 그대로 ‘신묘막측(神妙莫測)_하나님의 오묘하심을 측량하기가 막막함’이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신비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하나님께 인생을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렇게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셨다면, 우리를 인도하심에도 그렇게 역사해 주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비함 그 자체가 믿음의 목적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목적 삼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25-27)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이 말하는 신비는 이방인이 충분히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우둔하게(또는 완악하게) 될지라도, 결국은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에 우리가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선함이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러’는 일부분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배척한 우둔한(완악한) 사람들이 ‘더러’가 아니라 수용한 사람들이 ‘더러’였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지금 반대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를 통해서 예수님과 자신을 반대한 사람이 소수가 되도록 역사해 주실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내(하나님의)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고대 중동에서는 서로 ‘언약’을 맺을 때 짐승을 잡아서 둘로 갈라놓고, 그 사이를 언약 당사자가 지나갔습니다. 만약 언약을 어기게 되면 이 제물과 같이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또한 죽음에 이를지라도 언약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성경에 그렇게 많이 예언되신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단지 목수의 아들로 오셨다고,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고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또 그분의 사도가 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방해하고, 반대하고, 박해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히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조상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하나님의 반대편,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었지만, 그 뿌리가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지금 비록 가지가 원수 된 관계에 있어도 사랑을 입은 관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후회하심이 없다’라는 것은 ‘취소할 수 없다’, ‘변경할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으신 분이시며, 완전하신 분이시며,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우둔함을 결코 모르지 아니하시고, 결국 선을 이루어 내실 것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보기에는 비합리적이고, 지혜롭지 못하게 보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라면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울이었던 바울이 주님의 사도가 되어서 기독교를 출발하게 하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통로가 되게 하실 줄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누가 봐도 후회할만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후회하심이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는데,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속에 살면서도 영원에 잇댄 삶을 살 수 있고,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또한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30-32)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을 등진 삶,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았었는데,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우리가 긍휼을 입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존재인 것을 고백한다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의 통로로 살아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저장소’가 아니라 ‘파이프라인_통로’입니다.
인생의 중간에 누군가를 통해서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 가운데, 그 통로의 역할을 해 준 ‘누군가’는 지금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참 신비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불순종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한순간에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불순종을 통해서 심한 넘어짐을 경험하고, 그것 때문에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나(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깊도다!(33-36절)
여기까지 오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음에 깊이 감동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 깊다고 고백합니다. ‘깁도다’를 문자적으로 표현하면 “아(오), 깊이여!”입니다. 우리가 잠수하여 바닷속으로 들어갔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표면적으로는 그 바닥이 그렇게 깊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내려가면 바닥에 닿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내려갔더니 아무리 아무리 내려가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은 히말라야산맥의 에베레스트산인데, 매년 그 정상까지 등정하는 사람들은 수백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깊은 바다는 일본 남쪽,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동쪽에 위치한 태평양의 ‘마리아나 해구’인데, 그 바닥까지 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의 바닥도 모르는데, 어떻게 창조주의 깊이를 알 수 있겠습니까? 바울처럼 “아(오), 깊이여!” 외에 다른 설명이 불가합니다.
그리고 ‘지혜’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 원리’라고 한다면, ‘지식’은 ‘세상을 통치하는 구체적인 지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히 사려 깊은 부모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하물며 어떻게 하나님을 피조물이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천동설’이 과학적 진실인 줄 알고 있다가 ‘지동설’을 받아들이는데 참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우주의 운행 질서를 사람이 다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생각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사람의 죄를 영원히 심판하심과 영원히 용서하심을 동시에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임을 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판단을 어떻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길(행하심)을 찾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길(행함)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려 깊은 사람이 행하는 길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운행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길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 순종하는 것이 복이자 지혜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말하며 세 개의 질문을 던집니다.
(34-3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①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이것은 역설법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다 안다고 과신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도 사람을, 심지어 부부도 서로 다 알 수 없습니다.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만든 허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가운데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절대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②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모사’는 ‘상담자’, ‘조언자’의 뜻입니다. 역시 역설법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하라”라는 말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기도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만(傲慢)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십니다.
③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공로주의자’가 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우리가 먼저 한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했다면, 그 전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공로주의입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조언자도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 먼저 드릴 수도 없는 이유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시작도, 과정도 결과도 모두 주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 므나씩 맡겨주시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중심으로 말씀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게 되면, 우리의 힘이시요,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없으신 하나님의 깊이와 풍성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이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아! 정말 깊습니다. 하나님의 부요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누가 하나님의 길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또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고, 누가 주님의 조언자가 되었으며, 누가 주님께 먼저 드릴 수 있겠습니까?
만물은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주님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다른 사람의 넘어짐이 당신을 세우는 통로가 된 일이 있습니까? 또 당신의 넘어짐을 통해서 지금 세워짐을 경험하게 되신 일이 있습니까?
2.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후회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역사와 은총이라고 여기는 일은 없습니까?
3.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감탄했습니다. 당신에게 이처럼 고백 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충성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당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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