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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로마서(새벽)

로마서 12:9-21

로마서 12:9-21
찬송가 303장 '날 위하여 십자가의'

오늘 함께 보시는 말씀은 로마서 12장의 후반부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1-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과 그로 인해 일어난 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인 우리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는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값없는 은혜로 어떻게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렇게 11장까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일로 인해,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의 삶과 행위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 중에 오늘 12장 9절부터 21절까지는 ‘사랑’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9)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는 완전한 한 문장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문장이 이어지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헤 아가페 아뉘포 크리토스’, Ἡ ἀγάπη ἀνυπόκριτος.) 마침표가 있는 한 문장입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짓 없는 사랑’을 강령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명령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것과 같이 구약의 율법의 모든 강령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지킬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의 본질과 동일한 ‘사랑’을 행할 것을 명하는 것입니다. 이전 까지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말씀하다가, 다시 율법과 같은 사랑을 명령하는 것에 대해 그 의미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가 형식적인 율법이 아니라 본질인 ‘사랑’을 말씀한다고 해서, 곧 바로 ‘사랑하라’는 적용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의 전반부 1-3장에 따르면 ‘거짓이 없는 사랑’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1-3장은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규명했습니다. 3장 10-18절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로마서 3:10-18)”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본성에 대해 1-3장에 걸쳐 논증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따를 때 ‘거짓 없는 사랑’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의 내적인 반응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즉 7장에서 율법은 사람에게 탐심을 일으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율법이 제시될 경우, 죄가 율법을 이용해 그 사람 속에 탐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탐심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자기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는, 율법이 사람 속에 있는 독립성을 자극하여서, 율법에 저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어김으로 율법의 통제에서 해방되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명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12장에서는 사랑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까?

우리는 이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들어가기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사람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1장에서 11장을 거치면서, 믿는 사람은 변화합니다.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며, 일을 하지 아니하고도 삯을 받는 것이고(4:5), 예수님의 비유로 표현하면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마18:23-34).

이렇게 오늘 본문의 ‘사랑하라’는 말씀을 포함한 21절까지의 말씀은 모두, 무한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 받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명령이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합당한 명령입니다.

구체적으로 9절에서 사랑에 대해,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것은 조건 없는 무조건 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기에서 사탄은 하나님께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욥1:9). 사탄은 하나님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하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을 부정했습니다. 즉 욥이 하나님께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9절 후반절에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는 말씀에서, 악의 명사형인 ‘포네론’이 쓰여 사탄과 연관 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 '악'을 명사형으로 ‘포네론’을 사용할 때는, 주로 사탄과 연결을 시켜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무조건적 사랑을 부정하고 이해타산적 관계를 조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탄적인 이해타산적 관계를 미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니님은 까닭 없이 사랑하시며, 까닭 없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하시는 은혜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고 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거짓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나 행위나 모습으로 사랑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의 이유를 나 자신에게서나 혹은 상대방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절망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실상과 사랑 받을 만하지 못한 인간의 실상으로 절망스러운 현실에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사랑은 사람의 노력과 행위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작정에서 시작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사랑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은혜를 입은 자로 아무런 공로 없이 혜택을 받은 자로 참여할 뿐입니다.

서로 먼저하라(10-13)

(10-13)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그리고 10절에서 ‘형제를 사랑하며’는, ‘형제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번역됩니다. 형제의 사랑이란 가족 관계에서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가족의 특징은 이해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족이기에 허물을 덮어주고 서로를 위해주며 댓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조건적이지 않는 관계입니다.

또한 10절 후반절에서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강조는 ‘먼저’ 하라는 것에 있습니다. 누가 존경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에 상관없이 서로 먼저 존경하는 것입니다. 서로 먼저 하는 것은 그 자격이나 행위와 상관없는 무조건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11절에서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주님을 섬기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의미는,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혼자 기도하고 말씀 보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주님의 몸을 섬기는 것이며 그 몸 된 지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나 홀로 신앙심을 키워가는 것은, 타종교에서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섬기는 것은 사람과 지체를 사랑하는 것과 때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12절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통해 사랑은 환란의 상황에도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환경과 상황에서도 구애 받지 않는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13절은 성도의 실질적인 필요를 공급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실질적인 도움이 동반되는 것이 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또한 후반절에는 ‘손 대접’에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손 대접’ 이라는 말은 낯선 사람에 대한 사랑과 환대를 의미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도 실질적인 필요를 공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두 번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 신경 쓸 필요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에게 이득도 손해도 주지 않는 실속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 대접’은, 이해득실을 떠난 무조건 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해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은혜 받은 자로서 조건 없는 사랑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께 무한한 은혜를 우리가 입었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14-21)

(14-18)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4절에서 21절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18절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말씀은, 나와 친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화목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화목해야할 모든 사람에는 원수와 나를 박해하는 사람과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뒤의 구절이 원수와 박해자와 악과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사람에게 더 적은 빚을 진 사람들을 탕감해주라는 말씀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갚을 길이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빚진 사람들에게 탕감해주지 못할 빚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댓가도 공로도 없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우리를 해롭게 하고 저주하고 박해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받은 영원한 생명과 삶을 조금도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끔찍한 범죄를 당해 해를 입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과 삶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롬8:37-39).

그래서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을 수 있으며,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얻었습니다. 악을 갚지 않아도 되고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갈5:13-14). 우리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하라는 율법도 아니며, 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원수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죄인을 아무런 이유와 조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셔서 영원한 자녀가 되게 하신, 그 은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은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어떤 작은 일이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혜의 무게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맡기신 작은 일에도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로서, 거짓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하루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주님! 불가능한 죄인을 사랑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몰라 그 이유를 찾지만, 단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깨닫고 이해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생각과 이해로는 납득되지 않아서, 다른 이유라도 있을 것 같아 자신과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하신 사랑이 거짓 없는 사랑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 거짓 없는 사랑을 우리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로마서 9장의 사랑하라는 말씀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묵상해보고,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2. 9절의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고, 누가 그 거짓 없는 사랑을 행할 수 있는지, 나는 그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 봅시다.

3. 10절에서의 ‘형제의 사랑’의 의미와 ‘먼저’라는 강조점이 가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13절에서 ‘손 대접’이 의미하는 바와 연결하여서 묵상해 봅시다.

4. 14절에서 21절의 중심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이 말씀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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