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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로마서(새벽)

로마서 13:8-14

로마서 13:8-14
찬송가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8-10)
성경은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대립 구도를 묘사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일반인들이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늘 연구하고 노력했으며 율법의 모든 측면들에 대한 개인의 수행을 강조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무시하고 죄인들과 어울리며(마9:9-13) 안식일(막2:23-28) 및 정결(마15:1-20)에 관한 전통적인 규례들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항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일곱 번의 화(禍)를 선포하시며(마23:13-29) 사람을 향한 사랑이 결여된 경직된 율법주의를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을 강조하셨으며 이스라엘의 전통적 관점에서는 너무나도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사랑을 율법과 반대의 개념으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율법을 상반되는 개념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왔다.’(마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 한 바울은 스스로를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빌3:5)이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는 율법을 수호하고자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난 이후 사랑으로 온전하게 되는 율법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교한 법에 따른 질서 속에서 넓은 제국에 흩어진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과 사랑은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율법이 온전하게 됨을 설명합니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8절에서 ‘빚’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7절에서 ‘줄 것’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 오페일로(ὀφείλω)는 ‘의무’, ‘빚’ 등으로 번역되어 7절에서는 국가에 대한 납세의 의무를 표현할 때 사용 되었고 8절에서는 율법과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며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상태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7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지고있는 빚이라고 할 수 있는 세금을 갚도록 권면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생활 방식을 요청 받았고 7년 마다 모든 꾸어준 빚을 면제하고 이웃에게 독촉하지 않아야 했습니다(신15:2).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표현은 빚의 부정적인 성격을 이용하여 채무자는 채권자 앞에서 당당할 수 없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동등한 지위와 권한이 채무 관계로 인해 왜곡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구절이 구약시대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빌려 생활해야 했던 현실을 전면 부정하거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현금으로만 거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8절은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빚을 지지 않아야 하지만 사랑이라는 빚은 예외라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구별 된 생활 방식인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셨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 긴박한 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법적인 제도를 마련해주셨습니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지나친 이자를 요구하는 것을 방지하며 채무자가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빚으로 인해 인생을 포기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사회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누구나 생활하다 보면 때로는 돈을 빌릴 수도 있고 빌려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할부로 물건을 구매하거나 은행에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생활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빚을 허용하신 것은 자기 백성이 생활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편으로 허락하신 것이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규모 이상의 삶을 사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적 관점은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상대적인 넉넉함은 상대적 약자를 돕고 채울 수 있는 통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인 생활 방식에서 모범이 되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범을 잘 준수해야 할 뿐 아니라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웃을 사랑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로마의 법이 로마 시민들 뿐 아니라 로마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제성을 가지고 법을 준수할 의무를 요청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율법 준수와 더불어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법은 국가를 유지하고 사회의 안정과 국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존재합니다. 일반적으로 법과 도덕은 구별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법에서는 사랑 또한 강제력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핵심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율법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9-1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할 뿐 아니라 율법의 시행 세칙까지 만들어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명문화된 율법 준수를 통해 스스로 의롭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들로 규정하셨으며 사람들에게 보이는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깨끗이 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마23:26). 명문화된 율법을 준수함으로 ‘의’를 추구했던 바리새인적 시도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단정한 복장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으로 생각하거나, 규칙적인 성경 읽기와 기도 생활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느끼며 만족하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바리새인적인 ‘의’의 추구가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타인에 대해 쉽게 비판하며 상대적인 우월감에 도취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적용된 ‘칭의’를 값싼 ‘자기의’로 대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법치국가였던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모든 인간이 율법을 통해 ‘의’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지 강조했습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롬1:17, 3:22, 3:25, 3:28, 3:30, 4:11, 5:1, 10:6) 율법 준수를 통한 ‘의’의 추구는 불가능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게 된’ 복음을 분명히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9-10절은 8절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9절은 6,7,8,10계명을 나열하고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는 말씀이 모든 계명의 핵심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해야 할 사랑이 자신에게만 향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기도 제목이 자신의 성취욕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것은 나르시즘적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을 준수하며 모범적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외식하는 신앙생활을 그치고 마음 중심으로부터 이웃을 향한 변화 된 삶의 방식을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성령 안에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랑으로 변화된 삶을 시작할 때 비로소 율법을 온전히 준수할 수 있습니다.

10절에 ’완성‘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가득하게 하다‘, ’넘치게 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넘치게 만족시키며 가득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표현이 우리 삶에 가능한 이유는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롬5:5). 그러므로 누구든지 신앙의 본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무런 자격 없는 죄인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마음에 새기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가까웠음이라(11-12)
(11-12)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외치며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처럼 행세하는 제국 안에 살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샬롬(shalom)‘을 구하며 살아가는 구별 된 삶을 요청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분의 변화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시간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1절에 ’시기‘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로스(καιρός)는 시간을 2가지로 구별했던 그리스 문화에서 연대기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Χρόνος)와 대조적으로 특별한 시간, 기회를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한 번 놓치면 다시 붙잡지 못하는 기회의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카이로스라는 용어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의미하는 반면 신약 성경을 기록할 때 카이로스가 가지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특별한 시간, 즉 섭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매일 반복 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을 살아가지만, 어느 날 나의 반복 되는 시간에 개입하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합니다. 교회에 처음 나와서 예배를 드렸던 날, 처음으로 하나님이 믿어진 날, 계획대로 안 됐다고 생각해 속상해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그 일을 기회로 바꾸어주신 날 등 우리는 모두 동일한 24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시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경험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이 땅 위의 삶이 전부인 줄 알고 생활하였지만, 이제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둘러싼 시대사조(時代思潮)를 의식하기보다는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며 ’밤이 깊고 낮이 가까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는 대림절을 보내며 지극히 작아 보이는 것에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므나에 충성해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13-14)
(13-14)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행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사람이 걸어가는‘ 행동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걷는 것은 단회적인 행동이나 결단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밝은 빛 안에 생활합니다. 어느 것도 감출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주님의 백성다운,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갑니다.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는 쾌락을 추구하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로마의 문화를 총칭하여 그것들을 경계할 것을 의미합니다. 유교적인 잣대로, 대한민국의 문화를 기준으로 방탕이 무엇인지, 술 취함의 정도가 얼마인지 따지기보다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은 몸 담고 있는 문화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통치를 받으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고전10:31) 할 것을 기억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14절에서 ’일‘로 번역된 헬라어는 ’무엇 앞에‘를 의미하는 전치사와 ’알다‘를 의미하는 단어의 합성어(πρόνοια)에서 유래하여 일반적으로 ’미리 예비하는 것‘을 의합니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해 지나치게 골몰하며 염려하는 것이 ’육신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을 사는 사람들이기에 내일의 걱정과 염려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사람들이기에 이 땅에서의 성공과 실패로 우리 삶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어 그들의 수치를 가려주신 것처럼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진 채 수치를 감당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는 왕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당당히 드러내며 살아갈 뿐 아니라 더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때때로 찾아오는 죄의 유혹과 오염을 경계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죄된 습관을 끊어 내고 주님의 백성다운,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때로 죄의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거룩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처음부터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던 죄의 대가(代價)를 주님께서 대신 지불하셨고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랑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시길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주시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남을 쉽게 정죄하고 판단했던 모습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고자 말씀을 배우고 지키는 삶으로 인도하시되 모든 것을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자다가 깰 때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온줄 알고 맡겨주신 므나에 충성을 다하는 하루가 되게 해 주시고 오늘 하루도 세상의 시대사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거룩한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지지 말라.‘는 말씀을 본인의 말로 정리해봅시다.
2.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의 원어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어떻게 삶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4.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으로서 말과 행동이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 것을 기대하십니까?
5. ’자다가 깰 때‘, ’밤이 깊고 낮이 가까운‘ 영적 시간을 인식할 때 맡겨주신 므나에 충성하는 삶을 살도록 어떻게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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