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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로마서(새벽)

로마서 15:22-33

로마서 15:22-33
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의 교제를 희망하는 바울(22-29)
바울은 로마로 가려는 계획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지만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22절에서 “여러 번 막혔다”고 표현하는데, 문자적인 의미로는 방해받았다입니다. 누가 바울의 계획을 방해할 수 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2장 18절에는,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라고 쓰고 있으나 이곳에는 사탄이 방해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지 못했던 까닭은 19절에 나오는 대로, 예루살렘부터 일루리곤까지, 로마의 동쪽 세계에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하다가 때를 얻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23-24)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로마 동쪽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이제 이방교회에서 모금했던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바울은, 자신의 미래 계획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설명합니다. 먼저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는 그의 말은, 예루살렘부터 일루리곤에 이르는 모든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는 뜻은 아닙니다. 각 지역별로 거점도시들에 교회를 개척하고, 지역의 목회자들을 세워 지속적인 복음 전파가 가능한 생태 환경을 조성했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방교회의 연보를 전달한 뒤, 로마를 방문하여 성도들과 교제한 후에, 로마교회의 후원으로 스페인으로 가고자하는 계획을 밝힙니다. 이를 1장 12절에,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한다”고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이 스페인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비용을 일면식도 없는 로마교회에 요청하는 바울의 당당함과 그 목적으로도 로마를 방문하지만 진심으로 로마교회 성도들과의 교제를 갈망하는, 영혼에 관심을 가진 그의 목자로서의 진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음 전도라는 숭고한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를 스페인 전도 사역의 후원자, 곧 자기 사역을 이루어줄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사역에 보탬이 되는 존재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목적으로 대하여, 믿음의 교제를 나누면서 피차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원했습니다. 같은 신앙을 갖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애환과 어려움을 피차 나누고, 그럼에도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붙드심과 도우심을 나눌 때,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함께 완주할 수 있게 됩니다.
갈수록 인간 관계가 피상적으로 흐르고, 관계를 선택적으로 가져가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신앙인의 교제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을 통해 또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신앙인의 교제는 자신의 주도적 선택이라는 생각이 우리 속에 있다면, 그 생각이 고착화되기 전에 벗어나야 합니다.
나 혼자, 혹은 부부끼리만 있다보면, 좁은 울타리 속에 갖혀 단절된 채 서서히 복음의 생명력을 잃어갑니다. 자신의 생각, 방향성,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지향이 바른 것인지에 대해 객관화하는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맙니다. 적극적으로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여 그 말씀을 함께 받은 지체로서 어떻게 이루어갈지 고민하고, 서로 위로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촉발된 비대면 온라인 모임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날이 올 것입니다, 마스크를 벗고 대면하여 그동안의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교제를 누릴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대면이라도, 다소 어색하더라도 마음을 열고 이전과 다른 성도의 교제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접근해야 할 때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요청하는 도움은 단순히 물질적 지원이 아닙니다. 24절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동사 “프로펨프테나이”로, '안내 받다', '에스코트 받다'는 의미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는 바울이 생각한 로마교회의 지원이 물질적, 재정적 지원 그 이상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로마교회 성도 일부가 그곳으로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바랐다는 말입니다. 같이 동고동락하며 복음을 전하다보면, 바울의 복음전도를 본받아 자생적으로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전도자이자 복음전도자를 양성하는 동력가였고, 때로는 복음 안에서 스승이자 동역자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종교라는 한 영역이 아니고,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구체적 삶의 방편임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직업적 소명을 다하면서도 늘 복음 전도를 위한 부담감을 안고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복음에 빚진 자라는 자의식을 바탕으로 오늘 부르신 곳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전도의 일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므나로 장사하는 행위가 바울에게는 이방 지역에서의 지속적인 전도 사역과 예루살렘 교회 성도를 섬기기 위한 모금 사역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오늘 나에게도 므나를 주신 하나님은 나의 손과 발로 무엇인가를 행하기를 기대하실 텐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악한 종이 아니라 착한 종임을 입증하려면 무엇을 고민해야 하겠습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고, 또 알고 있다면 실현하기 위해 지혜와 용기를 구할 때입니다.

(28-29)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앞서 언급했다시피 바울은 이방 교회의 연보를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길입니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십시일반 복음을 나누어준 이방교회의 사랑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왜 예루살렘에 가난한 성도들이 많았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사도행전 11장 28절에 아가보의 예언이 언급된 대로, 큰 흉년의 여파가 계속된 것일 수도 있고, 로마 총독이 파견되는 등의 정치적 난맥상으로 평범한 일상이 위협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예루살렘 교회에는 궁핍하여 외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이방 교회의 연보를 전하려는 바울의 사역 덕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는 계기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해시키셨듯이,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었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바울이 회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궁핍이라는 문제적 상황을 개선하려는 바울의 수고로 말미암아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 일어나고, 서로의 오해가 불식되며,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시는 은혜가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신앙 현실도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기보다는 오늘 내가 받은 므나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살피는 시간이 있어야 하겠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기도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내가 다가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실 때, 하나님께서 깨닫는 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기도 요청(30-33)
30절부터 33절까지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감당하려는 사역이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31-32)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바울이 기도를 요청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먼저는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 불신자들입니다, 이 불신자들에게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를 요청합니다. 두 번째로는 바울이 이방교회의 연보를 전달하러 가는데, 이 일을 예루살렘 교회가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를 요청합니다. 세 번째로는 무사히 두 가지 일을 마치고 로마에 도착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저버린 변절자로 치부되었던 바울이, 유대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예루살렘 교회 내부에서조차 거의 변호받지 못했다는 것을 사도행전을 읽으며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어떤 그리스도인도 그를 변호하려 했다는 흔적을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목숨을 걸고 그 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전해준 이방교회의 연보가 예루살렘 교회가 받았는지, 받았다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에서 처했던 형편, 곧 옥에 갇힌 사람으로 대우 받았고, 로마군의 호위를 받으며 가이사랴로 이감되었고, 스스로 자신을 변호할 수밖에 없었던 형편을 기억한다면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환경과 형편은 32절의 언급대로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그가 겪는 모든 역경과 환난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바탕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 삶에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자세로, 므나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착한 종이라 칭찬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한 므나를 여전히 맡기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려 영적 열심을 가지고 주님의 손과 발로 살아가야 합니다. 은행에조차 넣지 않고 수건으로 고이 싸 두어, “악한 종”이라 규정지어지고, 심판의 자리에 이른 악한 종과 같은 삶을 오늘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앞에 놓여진 환경과 형편이 하나님의 뜻임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오늘이 모여 삶의 이력서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들을 신실하게 감당하여 므나를 남기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성탄을 기리고, 다시 오심을 대망하는 대림절기를 보내며, 과연 오실 주님을 상한 심령으로 기다릴 만큼 말씀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봅니다. 환경과 형편 탓을 하지 않으며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믿으며, 신실하게 삶의 이력서를 써내려가는 오늘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는 그날까지 신실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은 무엇입니까?(23-24)
2. 지금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25-27)
3. 이방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도와야 하는 당위는 무엇입니까? (27)
4. 바울이 로마교회에 부탁한 기도의 내용을 정리해보세요. (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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