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363장 ‘내가 깊은 곳에서’
오늘 말씀은 11장에서 15장까지 이어지는 정결과 부정의 규례를 다루는 논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레위기의 절정인 16장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부정에 노출되어 있고 속죄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특히 레위기 15장은 남녀의 성기에서 분비되는 액체로 인해 생기는 부정의 문제를 자세히 논합니다. 다소 민망한 주제일 수도 있지만 성경은 거침없이 이 주제를 다룹니다.
유출병(1-15)
(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 그의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함이 이러하니 곧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든지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막혔든지 부정한즉
개역개정이 누구든지라고 옮긴 부분을 원문으로 확인해 보면 어떤 남자가 만약 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남성에게 해당하는 사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몸이란 기본적으로 우리의 신체를 뜻하지만, 생식기를 완곡하게 나타내는 표현으로 봅니다. 또 사실 히브리어에 유출병이라는 말이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흐르다 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명사형을 유출병으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보다 명확하게 표현합니다. “어떤 남자가 성기에서 고름을 흘리면, 그는 이 고름 때문에 부정하다” 그런데 흐르다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소변이나 사정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용어와 다르기 때문에 보통 성병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생식기에서 점액이 분비되는 증세를 말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비액이 흘러내리든, 고여있든 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선언합니다.
유출병이라는 말과 흐르다는 말이 같은 단어라는 사실을 의식한다면, 15장에 특별히 이러한 표현이 많이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가나안 땅을 상징하는 관용구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흐르다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일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 거주하는 자들의 타락한 성생활을 따르게 되면 피와 고름이 흐르는 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고발하는 무서운 표현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성적 방탕에 빠져 살아갑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서 살아가면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속이며, 또는 하나님도 우리의 쾌락을 바라신다고 자신을 기만하며 문란한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굴욕을 언제까지고 참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생명의 법을 뒤집고, 자신이 정한 삶의 법이 더 우월하다고 믿으며 하나님보다 자신을 우선 삼는 악에 빠진 모든 사람은 자신이 마침내 피고름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 모릅니다.
(4-7) 유출병 있는 자가 눕는 침상은 다 부정하고 그가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하니 그의 침상에 접촉하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이 있는 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이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이 말씀에 근거할 때 유출병 있는 자는 진 밖으로 추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족이 큰 불편을 겪기는 했겠지만, 가정 내에서 거주하며 함께 생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누웠던 침상이나, 앉았던 자리가 모두 부정하고 그 몸에 접촉하는 자도 부정하게 됩니다. 부정하게 된 사람은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고 저녁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다시 정결하게 되어 일상 활동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레위기 15장은 침상을 많이 언급합니다. 11장 음식법으로 시작된 정결 예식이 마지막 15장에 와서는 가장 은밀한 부위와 활동인 생식기와 성행위를 다룹니다. 식탁과 침실 두 자리가 가정과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이기에, 그 두 곳이 정결해야 공동체가 정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조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역시 우리의 정결함을 살피며 가정에서의 식습관부터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그 면면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육체를 위하여 먹고 마시고 옷 입고 집 짓고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 역시 예수님께 굴욕을 드리는 일입니다. 핸드폰의 기능은 유사하다고 할지라도 아이오에스와 안드로이드 핸드폰의 운영체제가 다른 것처럼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 같더라도 그 삶을 움직이는 원리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의 삶이 철저히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고 있는지, 아니면 세속적 가치에 근거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속적 가치에 휩쓸렸다면 우리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 궁극적인 옷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가 마시는 물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8-12) 유출병이 있는 자가 정한 자에게 침을 뱉으면 정한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이 있는 자가 탔던 안장은 다 부정하며 그의 몸 아래에 닿았던 것에 접촉한 자는 다 저녁까지 부정하며 그런 것을 옮기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이 있는 자가 물로 그의 손을 씻지 아니하고 아무든지 만지면 그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이 있는 자가 만진 질그릇은 깨뜨리고 나무 그릇은 다 물로 씻을지니라
유출병이 있는 자가 뱉은 침이 튄 사람, 타고 다닌 안장, 깔고 앉았던 모든 것이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가 접한 질그릇은 깨뜨리고 나무 그릇은 씻도록 명합니다. 유출병에 걸린 이는 강력한 부정의 원인이 되어 주위 사람과 물건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출병이 걸린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극도로 자제하고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지 않도록 움직임을 최소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하게 된 물건이나 사람은 반드시 물로 씻게 하여 부정의 상태에서 정함의 상태로 나아오게 했습니다.
유출병에 관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11장의 음식법, 12장의 출산에 관한 규례, 13장의 피부병, 14장의 집에 생긴 색점에 관한 규례가 외적으로 보이고 판단이 가능한 것에 대한 평가임에 비해 유출병은 개인 스스로가 밝히지 않으면 타인이 알 수 없는 죄, 즉 개인이 사적으로 진단하는 죄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출병과 같은 은밀한 죄가 있다고 한다면 자신의 운신을 억제하고 하나님 앞에 깨끗함을 받기까지 자중해야 합니다.
(13-15) 유출병이 있는 자는 그의 유출이 깨끗해지거든 그가 정결하게 되기 위하여 이레를 센 후에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그의 몸을 씻을 것이라 그러면 그가 정하리니 여덟째 날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자기를 위하여 가져다가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한 마리는 속죄제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로 드려 그의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서 속죄할지니라
앞서 다룬 여러 진단법과 마찬가지로 유출병을 고치는 방법이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유출이 멎게 되고 깨끗해지면 정결하게 되는 조건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 그는 다시 이레를 보낸 후에 옷을 빨고 흐르는 몸을 씻으면 정해진다고 합니다. 흐르는 물이란 본래 의미로 살아 있는 물이라는 뜻으로서 고여 있지 않은 수원을 통칭합니다. 그 사람은 회막 문과 번제단 사이인 여호와 앞으로 나와 가장 값싼 제물인 비둘기 두 마리로 속죄와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로 볼 때 유출병으로 발생한 부정은 피부병으로 발생한 부정보다 덜 심각하게 간주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속죄제를 드리는 이유는 유출로 인해 성전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그 오염된 것을 정화하기 위해서이고, 번제는 자신의 속죄를 위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은밀한 죄까지도 기꺼이 주님 앞에 내놓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교회와 가장 가까운 이들이 해를 받고, 또 주님과의 관계가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릎 꿇는 은혜가 우리 삶에 많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설정한 자(16-18)
(16-18) 설정한 자는 전신을 물로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정수가 묻은 모든 옷과 가죽은 물에 빨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남녀가 동침하여 설정하였거든 둘 다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16절부터 18절까지는 비정상적인 유출이 아닌 정상적인 유출을 다룹니다. 여기서 말하는 설정이라는 단어는 씨앗을 쏟아 놓는다는 의미로서, 16절은 몽정, 17절과 18절은 정상적인 성관계를 말하는데 두 경우 모두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둘이 한 몸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제안이 뜻밖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 하나가 되는 과정을 어떻게 부정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은 일상적이고 건강한 생리 현상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정결하게 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점을 우선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당시 종교 제의를 벌이며 성행위를 하던 이방의 풍습과 달리 정상적인 부부의 동침조차 회막에서 거행되는 제사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엄격하게 금지함으로써, 그러한 타락한 이방 의식이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았던 조치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레위기가 생명과 반대되는 개념이나 현상을 부정으로 정의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생명의 결정체인 정액을 몸 밖으로 유출한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부정이라 선언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일 설교에서 다룬 것처럼 삶과 생명을 저해하는 모든 요소를 악으로 보는 관점과 유사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죄악 된 우리 인간에게는 가장 선한 것도 그 한계를 지니며, 죄인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결국은 죄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한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행위인 생명을 창조하고 전달하는 과정도 그 한계가 분명합니다. 인간은 유한하여 그 생명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든 면에서 이러합니다. 물체색의 3원색과 빛의 3원색을 비교해 보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색이라고 할지라도 물체색에서 뽑아낸 색은 섞고 섞을수록 그 검정색이 되어갑니다. 인간에게 아무리 아름다운 성품과 멋진 요소가 있다고 할지라도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점점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해집니다. 인간에게 하나의 가능성은 그 상반되는 요소의 불가능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온유하다고 하면 훌륭한 성품이지만 어떻게 보면 강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친근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무게감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성품을 모두 다 갖춘 사람을 볼 수 없으며,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오히려 가장 사악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또 사람이 한 가지를 성취한다는 말은 다른 가능성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고 성취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그 가능성이 줄어드는 역설을 지닌 존재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 하나님은 빛의 3원색과 같습니다. 아름다운 한 가지 성품을 더하면 더할수록 더욱 환해지고 더욱 온전해집니다. 물체색과 달리 빛의 3원색은 혼합할수록 백색광이 됩니다. 따라서 이 빛에는 제한도 없고 한 빛이 다른 가능성을 제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더 온전한 빛이 됩니다. 이러한 원리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자 공의의 하나님이실 수 있으며, 그것이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밝게 빛납니다. 이처럼 온전한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사람의 생명은 그 한계를 명확히 지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력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난자는 태어날 때부터 그 수가 정해져 있고 정자도 무한하지는 않습니다. 생명이 담긴 이 액체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지만, 생명을 손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듯 체액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사장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 경계를 지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색을 마음대로 섞어버리면 가장 좋고 아름다운 색이 나올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쾌락을 무한대로 추구하면 거기에 만족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성행위가 가장 즐거운 스포츠라고 주장하며 어린 시절부터 자유로운 성생활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합니까? 모든 인간의 행위가 그러하지만, 특별히 성행위에는 창조의 비밀이 숨어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남용하는 순간 오히려 파멸의 기운이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인간의 최대 가능성인 하나님 되는 것을 약속하지만 결국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 사이에서만 엄격하게 성행위를 누릴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권고를 고리타분하게 여기거나 인간을 제한하는 굴레로 여길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은 죽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삶을 최대한 선용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가장 비밀스러운 삶의 영역까지도 주님 앞에 무릎을 꿇려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존경을 드리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의 가장 내밀한 삶까지도 주님께 진정으로 무릎 꿇는 것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을 볼 때는 만족함도, 정결함도 없습니다. 오직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교감할 때 우리의 진정한 만족과 정결이 있음을 알고 오늘도 살아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성경이 사람의 가장 은밀한 영역을 거침없이 다룬다는 점이 어떻게 위로가 되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2. 나는 이 세상의 성적인 타락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나는 자유합니까?
3. 나는 가장 은밀한 죄라도 솔직하게 진단하고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4. 하나님과 사람의 큰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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