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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레위기(새벽)

레위기 20:10-27

 레위기 20:10-27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

별의 자리, 바다의 자리, 동물의 자리, 식물의 자리. 모든 것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바다가 제자리를 이탈할 때 쓰나미가 되듯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리를 이탈하는 것은 재앙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러가지 자리가 나옵니다. 남편의 자리, 인간의 자리, 남자의 자리, 여자의 자리. 한 여자의 남편이란 자리를 이탈해 다른 여자를 취하고, 인간의 자리를 이탈해 동물과 교합하고, 남자와 여자라는 자리를 이탈해 동성과 동침하고. 모두 주님께서 정해주신 자리를 이탈하는 예시들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모두 현상일 뿐 본질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먹은 것, 즉 피조물의 자리 이탈이 본질이요,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경계(10-16절)
(10-12)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누구든지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누구든지 그의 며느리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이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자리가 있다는 것은 경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경계는 ‘무언가를 하지 말라’라는 명령, 즉 금지를 통해 만들어 집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남의 아내, 아버지의 아내, 며느리 등과의 동침을 금지하심으로 경계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금지는 결핍을 낳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할 수 없을 때, 내가 취하고 싶은 여자를 취할 수 없을 때 결핍이 발생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소유하기 원합니다. 여자의 존재 자체가 남자 안에 갈빗대가 하나 비어 있다는, 즉 남자가 온전치 않음을 증거하기 때문에 여자를 소유함으로서 그 공간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경계를 통해 남자가 여자를 마음껏 취할 수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금지로 인해 인간은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 지를 알게 됩니다. 나의 존재 구축을 위해서만 사는 인간은 하나님조차 그저 나의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로 인식하는데, 그래서 우리 삶에서 결핍이 일어날 때 우리는 우리가 잘못된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는, 즉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함을 알게 됩니다.

(13-16)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누구든지 아내와 자기의 장모를 함께 데리고 살면 악행인즉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사를지니 이는 너희 중에 악행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 하여 교합하면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그들을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남의 아내, 아버지의 아내, 며느리, 장모, 동성, 그리고 짐승과 동침하는 사람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말이 무섭기는 하지만 본문에 기록된 계명들이 지키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요즘에야 조금씩 바뀌고는 있지만 세상법도 이러한 것들을 금하고 있을 정도로 인간이면 대부분 동의하는 수준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나 신실한 유대인들에게 오늘 본문은 그닥 지키기 어렵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을 바꾸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기만 해도 간음한 것이기에 간음에 관한 율법을 모두 어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또 요한복음에서는 정작 간음한 여인에 대한 처벌은 막아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주목적이 율법을 우리가 완벽히 행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모두를 경계 안에 가두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경계 안에 가두는 것은 단순히 그 경계 안에 살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는 동시에 그 경계를 소유화 하여 나를 위한 경계로 재창조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성을 알려주시기 위해 율법의 경계를 세우셨지만, 인간은 그 율법의 경계를 통해 나의 존재를 구축하고 확장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나를 위해 변질시키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하체(17-21절)
(17-21) 누구든지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그의 어머니의 딸을 데려다가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들의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그가 자기의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가 그의 죄를 담당하리라 누구든지 월경 중의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네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 이는 살붙이의 하체인즉 그들이 그들의 죄를 담당하리라 누구든지 그의 숙모와 동침하면 그의 숙부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은 그들의 죄를 담당하여 자식이 없이 죽으리라 누구든지 그의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의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이 있는데 바로 ‘하체를 범하였다’는 표현입니다. 원어로 보면 gālâ ʿervâ 라고 써있는데 gālâ는 ‘드러내다’, ‘덮개를 벗기다’란 뜻을, ʿervâ 는 ‘벌거벗음’, ‘수치’ 등을 의미합니다. 정리하면, 하체를 범하였다는 ‘덮개를 벗겨 벌거벗음을 드러내다’, ‘수치를 드러내다’ 정도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취했을 때 인간의 수치가 드러나고 그것을 근거로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처벌이 가해지는 그림이 창세기 3장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를 연상케 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선악과를 먹고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즉 자신의 하체가 드러나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창조 때는 선악과라는 경계를 통해, 오늘 본문에서는 인간의 하체, 특히 여자의 하체를 통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원함을 증거합니다.

창세기 3장 7절을 보면 범죄 후 아담과 하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뭇잎을 만들어 하체를 가린 일입니다. 그 뜻은 수치스럽다는 감정 자체가 죄의 결과라는 뜻입니다. 선악과 먹기 전에 아담과 하와가 옷을 입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처음부터 벌거벗은, 수치가 드러나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들이 주체로서의 삶을 살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속하면 나는 주님 안에서 온전히 삭제 됐음을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예수 안에서라고 표현합니다. 예수의 의로 온전히 덮여져 나는 사라진 상태. 이것이 성도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선악과 먹은 죄인들은 직접 옷을 만들어 입기를 원합니다. 믿음으로만 입을 수 있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예수의 옷보단, 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행위의 옷이 나의 수치를 가리는데 훨씬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 측에서 만드는 옷은 나뭇잎과 같습니다. 나뭇잎으로 하체를 가려봤자 곧 썩고, 바람만 불어도 날아갑니다. 문제는 그럴 때 인간은 가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고, 더 오래동안 썩지 않는 옷을 스스로 만들어서 더 완벽하게 자신의 벌거벗음을 가리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러한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그저 율법을 더 열심히, 더 완벽하게 지키는 것을 목적 삼고 있다면 그것은 나뭇잎으로 하체를 더 열심히 가리려는 것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기만 해도 모두 간음죄를 지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떠한 인간도 자기 스스로 옷을 만들어 수치를 가릴 수 없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며, 그리고는 정작 간음한 여자는 용서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수치는, 그것이 간음과 같이 중대한 죄일 지라도, 모두 예수 안에서 온전히 덮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율법(22-27절)
(22-24)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22절에 보면 약속의 땅이 언급됩니다. 약속의 땅은 빈 땅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오기 훨씬 전부터 그 땅에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살고 계신 집에 어떤 사람이 갑자기 들어와서 이제부터는 내가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게 지금 이스라엘이 하고 있는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 살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 명분이 바로 율법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증거하는 존재들로 가나안 땅에 거주할 때 그곳에서 살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 땅은 이스라엘을 토해낼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증거한다는 것은 앞서 말씀 드렸듯이 그 율법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절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존재 목적은 나를 증거하는 삶이 아닌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삶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고,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킬 수 있는 지를 증거하는 자들이 아니라, 나는 나의 자리를 망각하고 주님이 세우신 경계를 침범하는 존재지만, 그런 나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보혈로 덮으시는 주님의 은혜가 드러날 때, 주님께서 높임 받으십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취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끌고 가시는 장면이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며 우리가 만든 나무잎 옷이 갈기갈기 찢겨 수치스러운 존재로 드러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내가 만든 옷이 벗겨지고 내가 벌거벗겨져야 무고한 짐승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가죽옷을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25-26) 너희는 짐승이 정하고 부정함과 새가 정하고 부정함을 구별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부정한 것으로 구별한 짐승이나 새나 땅에 기는 것들로 너희의 몸을 더럽히지 말라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갑자기 부정하고 정한 짐승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너희 몸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음식법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음식법 또한 위에서 언급한 간음법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간음에 대한 법이 지키기 쉽듯이 음식법도 지키기 어렵지 않습니다. 삼겹살 맛을 이미 한번 본 우리야 돼지고기를 못 먹으면 죽을 것 같지만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혐오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이집트만 가도 무슬림들이 구약과 흡사한 음식법을 아주 잘 지키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왜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냐고 따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율법에 명시돼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손을 씻음으로 정한 음식도 손에 묻은 더러움 때문에 부정해 지지는 않을까 걱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게 나쁜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나름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돼 있는 생각은 자기 몸이 정하다는 착각이었습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만 않으면 내가 정할 것이라는 생각은 내 마음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없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음식법을 주님께서 주신 이유는 아무리 정한 음식만을 먹어도 절대 정해지지 않는 우리의 썩은 마음을 보라고, 그래서 문제는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음을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깐 앞서 언급한 간음에 관한 법과 동일하게 음식법도 그걸 잘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법을 통해 우리의 죄 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27)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본문에서 접신하거나와 박수무당은 사실 두개의 히브리어 명산데 ‘접신하거나’는 ‘ob’ 라는 단어로 ‘영을 부르는 자’를 일컷는 단어며 박수무당은 ‘yidoni’ 라는 단어로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는 자’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영을 불러 그 영을 통해 인간은 알 수 없는 지식을 아는 자, 즉 미래를 점치는 자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래를 알고자 하는 행위는 잘먹고 잘살고 싶어하는 마음, 나라는 우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욕망을 잘 보여줍니다. 성도는 미래를 알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지금까지 은혜로 살아왔음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실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율법이란 경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입고 있던 의의 옷을 하나씩 찢어 버리십니다. 그 과정이 우리에게 고통으로 감지 되지만, 그것이 진짜 복이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죽음,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우리 옷을 계속 입은 상태로는 예수의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벌거벗은 존재로 드러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수치를 가리시는 예수의 피 묻은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수치를 가리기 위해 힘썼지만 이제는 우리가 만든 옷을 찢어 버리시고 주님께서 준비하신 예수의 옷을 입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리는 무엇인가요? 나의 자리에서 어떻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을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율법의 경계를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요?
3. 음식법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우리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4.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삶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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