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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5:33-42

사도행전 5:33-42
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중재 (33-39절)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여러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하자,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잡아 가두는 일을 자행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밤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 옥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옥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 앞에 잡혀 왔습니다. 대제사장은 “이 사람(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르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왜 가르쳐서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느냐?”고 질책했지만,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하며,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달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높여주셔서,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에 대한 반응입니다.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의 올바른 지적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못 박은 것에 대해 참회하기보다는 크게 분노하여 사도들을 아예 죽여버리고자 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구원자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들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지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도들에 대한 그들의 시기와 질투심과 그로 인한 분노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 또한 자신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하나님, 유대 전통이 만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분노에 가득 차 웅성거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가말리엘’은 ‘하나님은 나의 상급이시다’라는 뜻인데,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존경받는 바리새인이자, 율법교사였습니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 성리학의 대표적인 철학사상 2개가 있었습니다. 퇴계 이황 선생으로 대표되는 ‘주리론(主理論)’과 율곡 이이 선생으로 대표되는 ‘주기론(主氣論)’이 그것입니다.
사도들이 활동하던 당시에, 바리새파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샴마이(Shammai) 학파였고, 또 하나는 힐렐(Hillel) 학파였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샴마이파는 보수적이었고, 힐렐파는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가말리엘은 비교적 자유로운 학파인, 힐렐파의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힐렐의 손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말리엘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후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변증하면서, 자신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엄한 율법의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였다.”라고 고백하는 부분 때문입니다.

율법교사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나가게 한 후에 말했습니다.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가말리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호칭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기 감정이나 자기 생각에 따라서 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함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조심하라’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말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드다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이 400명이나 있었던 것은 굉장히 큰 영향력을 미쳤음에 틀림없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다닐 때 처음에 그와 함께했던 사람이 400명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윗이 왕이 되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다. 드다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구세주인 것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그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뭔가 이룰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드다가 죽임을 당하자, 400명의 사람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드다는 정치적인 구세주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흩으셨기 때문입니다.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또 가말리엘은 호적할 때에 갈릴리에서 유다라는 사람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이 호적은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호적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AD 6년경에 수리아의 총독이었던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Publius Sulpicius Quirinius_구레뇨)가 행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인구조사의 중요한 두 가지 목적은 전쟁을 위해 사람을 차출하는 징병(徵兵)과 국고를 채우기 위한 조세(租稅)였습니다. 그래서 피정복지의 사람들은 인구조사를 몹시도 싫어했기에 인구조사에는 국민적인 저항이 뒤따랐습니다.
유대인들 분파 가운데 ‘열심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시몬이 그 일원이었습니다. 이 열심당이 생기게 된 동기가 바로 인구조사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리의 유다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민족적인 운동을 일으켰지만, 이내 로마 제국의 군대에게 진압당하여, 모였던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38-39)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율법교사 가말리엘은 드다 집단과 유다 집단이 모두 한순간에 소멸되어 버렸음을 예로 들면서, 사도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의 하는 것이 사람의 짓이면 드다와 유다처럼 얼마 가지 않아 망할 것이고, 만약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그 반대일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가말리엘이 전하는 말의 핵심은 하나님과 사람은 다르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의 판단은 사람의 판단과는 같지 않음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당신들에게는 사도들이 죽여 마땅한 불순분자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하나님께서 신뢰하시는 하나님의 종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사람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의 바탕 위에 서 있는 가말리엘로 인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어처구니없는 결정하게 되는 어리석음에서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이 이후에 가말리엘은 산헤드린 의회의 의장까지 역임하였지만, 그러나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그의 제자 바울이 신실한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능욕받음을 기뻐함(40-42절)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지적이 틀렸다고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흔쾌하게 수긍한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순순히 사도들을 풀어 줄 수 없어서 채찍질하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협박한 뒤에 풀어 주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채찍질하다’가 헬라어로 ‘데로(δέρω, derō)’인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가죽을 벗기다’입니다. 거기에서 유래하여 ‘심하게 채찍을 가하다’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사도들이 맞은 매는 가벼운 것이었거나, 곤장을 1-2대 맞은 것이 아니라, 유대의 법에서 때릴 수 있는 최고인, ‘사십에 하나 감한 매’이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보내주라는 가말리엘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유대 종교지도자들 속에 있는 분노는 사도들을 그냥 풀어 줄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모진 매를 맞고서도 사도들이 보인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이 불법적으로 감금을 당하고, 채찍을 맞는 등 많은 고난을 당했음에도, 그들은 그것 때문에 주눅이 들거나, 그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예수 그리스도)’을 위하여 욕을 당하는 사람이 된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예전에 종종 불렀던 CCM, 복음성가 중에, ‘예수 그 이름에’라는 노래가 있는데, 앞부분 가사가 이러합니다.
내가 예수 그 이름에 내 삶을 걸었네
내가 예수 그 이름에 내 생명을 걸었네
내가 예수 그 이름에 내 죽음을 걸었네
내가 예수 그 이름에 내 영생을 걸었네
사도들은 정말 주님의 이름에 자신의 삶과 죽음을 걸었고, 영원한 생명을 걸었습니다.
또한 ‘합당한 자로 여기다’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보잘것없는 갈릴리의 어부 출신이었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였고, 자기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또 주님께서 전하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알아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자신들을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일에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주시니, 그들에게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형편없고, 허물투성이인데,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주님의 통로로 사용해 주시는 것이 감사의 제목 아닙니까?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리고 있습니다.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사도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이든, 집이든 어디에서든지 거리낌 없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아’,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즉 사도들은 로마 황제가 구원자가 될 수 없고,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전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면서 배웠음에도,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노라고 암투를 벌이지 않았습니까? 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는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하나같이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특히 베드로는 주님께서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불법적으로 심문과 재판을 받을 때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들이라면 지금 입을 열지 못해야 할 것 같고, 벌써 도망가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투옥당하는 것도, 채찍에 맞는 것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가르치며 전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않고, 사람들은 알지 못해도, 그들은 그들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묘한 역사를 행하시며, 신비한 은총을 베풀고 계심을 믿고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은총이 사도들을 사도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자신들을 편들어 줄 것 같지 않은, 바리새파의 거두(巨頭)인 가말리엘이, ‘사도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그것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그곳에 현존하시며, 우리에게 신비하고도 오묘한 손길을 내미시는 주님을 힘으로 삼고, 그 주님과 동행하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사도가 된 제자들은 본래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그 의미를 바르게 깨달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등극하시면, 거기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3년 동안 따라다닌 것을 충분히 보상 받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보고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투옥을 당하는 것도, 채찍에 맞는 것도, 이스라엘 최고의 권력자들인 종교지도자들의 협박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 당하는 일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김 받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했을지라도, 오묘하고도 신비한 주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이 그들과 함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 속에 눈에 보이지 아니할지도 여전히 역사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과 동행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이 시대의 사도행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언행을 일삼았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언행을 할 때는 언제입니까?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2. 바리새인 율법학자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소행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면 무너질 것이라며, 그들을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예기치 않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때 어떤 영적인 깨달음이 있었습니까?
3. 사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김 받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당신의 삶 속에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서 손해를 보았더라도 기쁨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까? 어떤 영적인 유익이 있었습니까?
4.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며, 그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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