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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6:8-15

사도행전 6:8-15
찬송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성령충만한 스데반(8-10절)
오늘 말씀은 열두 제자가 음식 베푸는 일을 맡기기 위해 선정한 일곱 명 중 스데반의 사역을 그립니다. 헬라식의 이름을 한 일곱 사람 중에서도 특히 처음으로 언급되는 이가 스데반인 것으로 보아 그는 헬라파 사람의 수장과도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사도행전의 중점은 예루살렘에서 변방으로 확장되게 됩니다. 스데반이라는 인물은 그 연결점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데, 스데반이라는 이름은 면류관을 뜻하며 그 이름대로 가장 먼저 순교의 면류관을 쓰게 됩니다. 그의 행적을 살피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8절입니다.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미 3절 5절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는 성령과 지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거기에 은혜와 권능까지 더해집니다. 스데반은 아마도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완벽한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란 카리스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주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호의를 의미합니다. 즉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로 가득하였고 그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감사와 사랑이 넘쳐나는 인물이었습니다. 후에 자신을 죽인 자들에게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고 마지막 기도를 하는 모습이나, 경건한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두고 크게 울었던 장면을 보면 스데반이 받았던, 또 베풀었던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권능이란 두나미스라고 하며, 무언가를 수행할 수 있는 힘이나 능력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힘을 통하여 행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큰 기사와 표적을 사람들에게 행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표적과 기사를 수식하는 말로 크다를 쓴 것은 이 본문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보면 스데반의 사역에 나타나는 능력이 탁월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은혜와 능력이 함께 충만하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은혜와 능력은 사실 서로 상충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인자하고 긍휼한 성품을 말하는 은혜와 큰일을 행하는 강력한 힘을 말하는 능력은 보통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타나기 어려운 상반되는 특징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성격이 좋으면 능력이 없고 능력이 좋으면 성격이 좋을 수 없다고 보통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모두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지혜, 믿음, 은혜, 능력 모든 것이 성령 충만에서 나오는 특성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비록 한 인격에서는 나타나기 힘들다고 여겨지는 요소들도 하나로 통합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특성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성령님께 간절히 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며 멈추지 말고 성령님께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해 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죄로 충만하고 사단으로 충만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 충만함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 뿐입니다. 이를 놓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이는 없어도 좋고 있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믿음과 은혜와 능력을 두고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간절히 사모하며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또 이 말씀을 보면 그 일곱 명을 뽑은 우선적인 이유는 음식을 베풀고 과부를 돌보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그 사역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당시 교회 공동체는 필요에 의하여 사람을 더 선발하기는 했지만, 이는 위계질서나 조직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사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반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스템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자유로운 활동에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였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회당에 가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자유민이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나 그 후손을 뜻하는 말인데, 아마도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회당은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지로서 유대인은 그곳에서 종교 예식을 할 뿐 아니라 음식을 나누고 공동의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따라서 북아프리카에 해당하는 구레네와 알렉산드리아 출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터키에 해당하는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회당에 모였습니다. 누가는 스데반의 출신을 정확히 알리지 않지만, 스데반 역시 그런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그들이 모였던 회당에서 전에 함께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스데반이 거기를 찾아가니 곱게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성경 및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논쟁이 붙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저히 스데반을 도저히 당할 수 없었습니다.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성령으로 충만한 스데반은 성경 말씀을 아는 지혜로 충만했고 때문에 모든 논쟁거리에 대해서 성경과 성령에 근거한 스데반을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거짓 증거를 하도록 만듭니다.

(11-12)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 가는 과정과 흡사합니다. 또 이후에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박해의 양상과도 유사합니다. 즉 신학적 논쟁이 일어날 때 성경으로 당할 수 없으면, 중상모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증거를 근거로 폭력을 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찔릴 때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그 전달자를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거부합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스데반을 억지로 끌고 와 공회, 즉 산헤드린 앞에 세웁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비방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소당한 스데반(13-15절)

(13-14)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그들은 스데반이 말하기를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율법을 뜯어 고치겠다고 전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여길 정도로 큰 죄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소이며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를 헐고 고친다는 것은 신성모독에 해당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알듯이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몸이 유형의 성전을 대신하는 영적인 교회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율법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완성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자신이 궁극적인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성전과 말씀의 참된 의미를 실현하신 분으로 성전과 율법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스데반은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얼굴이 천사와 같이 환하게 빛나는 인물은 우리를 한 사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온 모세의 얼굴이 그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앞으로 7장에서 스데반이 설교할 모든 말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았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스데반이 엄청난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평안으로 가득하였고 담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묵상하는 과정에서 이 천사의 얼굴을 많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내가 봤던 어떤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는지 계속 떠올려봤습니다. 그러자 한 얼굴이 제 마음에 찾아왔습니다. 제3국에서 무슬림을 대상으로 10년 동안 사역하시던 한 선교사님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공개적으로 사역을 할 수 없기에 커피점을 차리고 관계를 맺는 일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관계를 어느 정도 깊이 맺게 되면 자신이 믿는 분은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거기서 더 관심을 보이는 이들에게 접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참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4명 정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성경의 말 그대로 출교이기 때문에 명예 살인을 감내해야 하는 엄청난 결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언제라도 모스크의 이맘이 지시하면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10년 동안 4명밖에 전도하지 못했다면 굉장히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의구심을 품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대학도 나오시고 훌륭하신 분인데 다른 좋은 사역은 없으실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님의 특징은 사역 이야기를 하시면서 계속 웃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가식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참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임을 확신할 때 나오는 평안함의 웃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도 제목을 여쭙자, 주님과 항상 교제가 끊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스데반은 곧 죽게 됩니다. 물론 성경에 큰 부분을 차지한 의미있는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더 많은 이들을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도 이런 일이 꽤 있습니다. 막 사역을 시작하려던 목회자들이 갑자기 죽어버립니다. 선교지에 가서 의욕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려는 선교사님이 병이 들어 귀국하거나 돌연사하기도 합니다. 양화진 언덕에도 그런 이가 적지 않습니다. 또 너무 믿음이 좋은 분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겨우 일어섰는데 불치병으로 죽고 맙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묻게 됩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저분을 통해 더 하실 일이 많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그 답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스데반이 한 천사의 얼굴입니다. 스데반은 그 자리가 마지막 자리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았지만, 그 안에는 하늘의 평안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데반의 피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것,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야 할 것은 이 천사의 얼굴, 천사와 같은 미소와 평안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으신 우리 주님께 우리가 하루만이라도 주님의 목적에 완전히 붙들려 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삶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큰 일을 한다고 한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과연 그 일이겠습니까? 스데반의 다소 황망한 죽음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쓰실까? 생각보다는 내가 과연 오늘 죽어도 천사의 얼굴로 기꺼이 나를 죽이는 자들을 축복하며 하나님께 안길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수님을 바라본 스데반처럼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혜와 믿음과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을 닮기 원합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며 지혜 충만, 믿음 충만, 은혜 충만, 권능 충만하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본 스데반처럼 우리 역시 눈을 떠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성령충만을 간절히 사모하십니까? 성령충만 없이 이 세상의 가치를 이길 수 없음을 절감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2. 스데반처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을 떠올려보십시오. 자신이 그분에 비해 부족한 점을 생각해 보고 그렇게 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3. 건전한 믿음과 신학을 가지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도 박해하는 자는 있습니다. 스데반은 어떻게 반응했고 나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4. 천사의 얼굴을 한 그리스도인을 떠올려보십시오. 오늘 다른 이들이 나를 볼 때 천사의 얼굴을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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