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17-34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
거절당한 지도자 모세(17-32)
스데반과 논쟁했던 사도행전 6장의 자유민들은, 이스라엘에 거주했던 유대인들보다 모세의 율법과 성전에 대해 과도한 충성심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메시아가 성전에 강림하실 날을 기대하며 성전 주변의 회당에 기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럽고도 오랜 타향살이에 지친 그들의 주름진 마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극도로 우경화된 그들은 기존의 성전 체제를 뒤흔드는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반성전적인 메시지를 선포했던 스데반을 고발했습니다.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 그 죄목이었습니다. 신성모독죄로 산헤드린 공회에 소환 당한 스데반이 대제사장의 심문에 답변하며, 2절부터 50절까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그 설교의 정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17절부터 34절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서 모세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스데반에게 씌어진 죄목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인데, 그는 본문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모세를 모독할 만한 그 어떤 진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훈련시키셔서 마침내 사용하셨음을, 존경과 사랑의 언어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자유민들의 고소가 무고임이 자연스레 증명되며, 그들의 스데반을 향한 비난이 정당하지 않음이 오늘 설교를 통해 입증됩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바로로 표상되는 사람의 위협과 나일 강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위협에도 하나님의 섭리로 살아남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로의 딸에게서 길러져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우게 되는 극적인 상황을 그립니다. 그렇게 애굽 왕궁에서 왕자로 자라난 모세는, 나이 사십에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애굽 사람을 쳐죽였고, 오히려 그의 형제들로부터 고발의 위협을 당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칩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으로부터 동족을 구해주었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구로 구원하시는 것으로 깨달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도움을 고마워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모세의 도움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살인 행위를 들먹이며 위협했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들의 위협 때문에 도망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임을 자임하여 동족을 도왔으나 바로 그 동족의 위협 때문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6-27)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불러서 세워주신 요셉과 모세와 같은 지도자들이 다름 아닌 동족으로부터 거절 당하여 고초를 겪는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요셉은 야곱의 다른 아들들에게 거절 당했지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가문을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본문의 모세도 두 유대인 사이에 일어난 싸움을 말리다가 거절 당하고 쫓겨 났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민족의 지도자로 세움 받게 됩니다. 요셉과 모세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민족의 지도자들을 거절해 온 민족적 원류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면면히 흘러 바로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다고 돌려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었던 자유민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에서 살다시피했던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예배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여 그들의 삶 가운데서 책 잡을 것이 하나도 없어야 했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 주님의 진면을 바로보지 못하고, 오히려 구걸하던 맹인이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고백했던 역설이 이곳에도 등장하는 것입니다.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의미없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예배와 기도회 때마다 참석하는 열심은 사람의 마음으로만 지속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치열한 삶을 살아갈수록 내가 틀렸을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유연함이 사라질 때, 위험해집니다. 늘 주위를 살펴 내가 정면으로 주님의 뜻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광야에 임하신 하나님(33-34)
스데반은 성전에 대해 과도한 충성심을 보이고 있던 이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한 곳이 아님을 강하게 선포합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요셉도 가나안을 떠나 있었으며, 본문의 모세도 약속의 땅을 자신의 발로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채 평생을 바깥에서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곳에만 있지 않은데, 왜 당신들은 이곳에만 목을 매십니까?” 이런 뜻으로 가나안 바깥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곧, 그들이 절대시하는 성전 자체가 하나님의 신탁을 받는 유일한 장소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그와 별개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만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3-34)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은 성전이 아니었고, 약속의 땅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저 좌표를 찍을 수 없는 광야의 이름없는 가시나무 앞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전만 거룩하다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이 그 어디든 거룩한 곳임을 칠십인역 출애굽기를 정확하게 인용하며 날카롭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든,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도 계셨고, 비참한 십자가에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관심이 없고, 약속의 땅, 그중에서도 예루살렘, 그 핵심인 성전에만 집착하는 자유민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땅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들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눈에 한없이 어리석어보이는 이들의 모습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서도 자주 발견됩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바라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전통과 역사에만 매몰되어 과도하게 그것들을 지키려는 시도가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면밀하게 관찰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기를 객관화하지 않고,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부족한 나의 기준에만 맞춰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려고 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리저리 쳐내다보면, 우리는 사람의 뜻만 내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마저 내팽개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에 당연히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없었다면 우리 인생에 설명되는 부분이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룬 작은 성공이 오히려 지켜야 하는 우상이 되어 하나님보다도 훨씬 더 절대화하기 쉽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만큼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셉과 모세처럼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실상은 요셉과 모세를 배척하여, 하나님을 인도하심을 거부했던 이스라엘 자손에 가까움을 깨달아야 합니다.
에덴의 동쪽에 사는 인간은 늘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을 잠재울 성벽을 쌓고 그 안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합니다. 정주할 에덴을 잃어버렸기에 어디든 과몰입하여 자신을 보호해줄 무언가를 찾아 나서기 쉬운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 아닌 그 무엇에 몰입하여 그만큼 우상화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스데반을 고발했던 자유민들에게는 그 우상이 성전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서, 우리들이 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머물고, 나를 어디로 부르시는가입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그 삶의 결에서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일로 여기고 임하는 사람은, 주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여기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하겠지만 사람의 일로 여기고 임하는 사람은, 자기 영광만 추구하다 끝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곳, 바로 그곳이 거룩한 곳임을 알고 신을 벗고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 받으시기를 빕니다. 주님 따라 웅성거리며 따라가는 사람들 틈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핏대 올려 외치며 그곳의 온도를 바꿔놓은 구걸하는 맹인처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다윗의 자손임을 드러내는 삶을 오늘도 이어가시기를 빕니다. 그 힘을 주님께서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목숨 걸고 지키려는 것이 복음인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의 전통일 뿐인지 되돌아보기를 소망합니다.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내 생각과 경험으로 재단하지 않으며, 늘 겸손한 마음으로 그 뜻을 받들어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또 우리가 머무는 곳이 거룩한 곳, 구별된 곳임을 깨달아 주님이 다윗의 자손이심을 삶으로 드러내도록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주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모세가 태어나 왕궁에 들어가기까지 명시적으로 나타난 위협은 어떤 것입니까? (19-21)
2. 모세를 거절했던 사람들은 어느 민족입니까? (27-28)
3. 위치를 알 수 없는 광야의 한 지점을 “거룩한 땅”이라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33)
4. 스데반의 설교에서 모세를 통해 알 수 있는 바를 두 문장으로 정리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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