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1-16
찬송가 : 21장 '다 찬양하여라'
하나님의 인도하심(1-16절)
성전과 율법을 거슬렀다고 하여, 스데반이 공회에 잡혀왔습니다. 그 증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제사장은 1절에 스데반에게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봅니다. 스데반은 거짓증언을 한 사람들을 위증죄로 고소하고 억울하다고 표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차분히 변론을 시작합니다.
(2-4)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스데반이 2절에 말한 ‘여러분 부형들이여’는 공회에 모인 사람들을, 겸손하고 공손하게 부른 호칭입니다. 그는 2~8절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메소보다미아에서 부르신 사건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였는데 그곳이 메소보다미아 즉 4절에 나온 갈대아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두 번에 걸쳐 옮기셨는데, 갈대아 땅에서 하란으로 옮기셨고,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너희 지금 사는 이 땅> 곧 가나안땅으로 옮기셨습니다.
스데반이 아브라함 얘기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성전에만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 지역에서 아브라함에 나타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신 곳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오직 이스라엘의 성전에만 머물러 계신 분이시라고 믿었고, 이방 나라에서는 절대로 찾아 뵐 수 없는 분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 자체를 우상화하여 섬겼고, 그러한 이유로 스데반이,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성전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자, 그를 신성 모독죄로 체포한 것입니다.
3절에 아브라함은 “네가 내게 보일 땅으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그러나 5절을 보니 하나님은 그에게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지만, 모든 것이 약속으로만 주어졌고, 실제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75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땅을 유업으로 주고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창12:2-4)’는 약속은 참으로 믿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과연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했을까요? 2절 후반 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였다고 합니다. 그가 보았던 <영광의 하나님>은 과연 무엇일까요? ‘영광’으로 쓰인 헬라어 <독사>는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임재’,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속성 즉 본질’을 의미합니다. 그 본질은 히브리서 1:3에서 말하는 ‘영광의 광채, 즉 빛’인 것입니다. 그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 빛은 우리 마음의 근심과 두려움을 떠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빛은 우리의 삶을 인도합니다. 이 빛의 실체는 말씀입니다. 시편 119:105에서 말하길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창12:4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합니다. 말씀의 빛이 아브라함을 사로잡아 그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문제의 파도가 엄습해오거나, 혹 내 경험과 지식으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 있을 지라도, 우리가 말씀을 따르면, 그 말씀이 우리의 길이 되고,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따르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2가지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과 신뢰의 삶>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에는 철저히 <순종> 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는 한없이 <신뢰>해야 합니다. 순종과 신뢰를 삶에서 실현하는 것이 말씀을 따르는 삶인 것입니다. 말씀을 따를 때 그 빛이 나를 사로잡아 믿음의 길을 가게 만듭니다.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8절에 할례의 언약이 나옵니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원히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약속의 증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낳게 하시고, 이후 야곱을 통해 12조상을 낳게 하시며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할례를 통해 아브라함이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해 의로워진다고 여겼고, 할례의 언약 속에 임하신 하나님을 본질로 삼기보단, 할례자체 만을 본질로 여기며, 자신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본질이 아닌 형식과 의식에 집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직분이 있고, 대를 잇는 신앙가정이고, 또 봉사를 한다는 등’ 이런 현상들을 신앙의 척도와 성숙으로 여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90년대 우리나라는 ‘농구대잔치, 드라마 마지막 승부, 일본 만화 슬램덩크 등으로 인해 농구의 인기가 가장 많을 때였습니다. 더구나 미국 프로농구(NBA)의 전성기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유명한 미국선수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마이클 조던이 가장 인기가 많았습니다. 미국의 스포츠용품업체에서 마이클 조던과 협업하여 이미 84년부터 ‘에어조던’이라는 농구화를 발매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에어조던 시리즈 중 1개가 당시 국내에 수입되었는데, 그 농구화는 최고 인기였습니다. 저도 운동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에어조던 농구화를 신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구화를 신으면, 마이클 조던처럼 점프도 잘 할 것 같고, 슛도 쏘는 대로 다 들어갈 것 같고, 드리블을 해도 현란하게 잘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자신감으로 에어조던을 신고 친구들과 농구시합을 했습니다. 다들 에어조던에 눈이 가고 부럽게 쳐다봤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저는 마이클 조던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합결과는 저희 팀이 졌습니다. 사실 저 때문에 진 것입니다. 에어조던을 신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대로 몸이 움직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내기시합이었는데, 경기에 지자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농구화만 좋으면 멀해?’
에어조던 농구화를 신는다고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실력이 향상되려면,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의 척도는 성숙으로 무르익은 삶입니다. 다시 말하면 언행의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답게 말과 행동을 하기 위해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농구화를 신었다고 해서, 그 자체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성숙을 위해 매일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신앙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성장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성장은 언젠가는 멈춥니다. 그러나 영혼의 성숙은 매일 일어나게 되어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9-14)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9-14절에 스데반이 요셉의 생애를 이야기 합니다. 요셉은 참으로 많은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9절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요셉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환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시는 것을 넘어, 은총과 지혜를 주신다고 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있을 때,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애굽 왕 바로와 같은 큰 문제가 다가올지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은총과 지혜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따라가며, 순종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은총을 얻었던 것처럼, 나뿐만 아니라, 내 가정과 내 주변사람들도 은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15-16)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15-16절은 야곱과 조상들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 언급한 내용입니다. 세겜땅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하여 최초의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세겜땅은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 요셉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삶의 여정의 주체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셨던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셨듯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언제나 성취하시는 분이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문의 나온 이들을 각자의 땅으로 보내셨고 그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셨습니다.
부르심은 <소명>이고, 보내심은 <사명>입니다. 대게 우리는 사명 앞에 <왜>라는 질문을 많이 붙입니다. ‘왜 저런 사람을 감당해야 합니까? 왜 이런 병과 자녀를 주셨습니까? 왜 나만 억울하게 손해보고 참아야 합니까?’ 그런데 <왜>라는 질문은 사명 앞이 아니라 소명 앞에 붙여야 합니다. ‘더럽고 죄 많은 나를 왜 구원하셨나요?’ 주님의 가슴에 못 박은 나를 왜 붙잡고 계시나요? 이기적인 나를 왜 회복시키십니까? 연약한 나를 왜 사용하십니까?’ 이렇게 소명 앞에 <왜>를 붙여서 고백해보면 사명 앞에 질문은 <왜>가 아닌 <어떻게>로 바뀌게 됩니다. ‘자녀에게 배우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사람을 도와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상황이 어렵고 힘들지만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요?’ 그럴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땅은 <변화>가 될 것이고, 평생 주님을 바르게 따르고 섬기는 주님의 팔로우어의 삶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사로잡혀 은혜를 경험하는 하루가 되길 축원 드립니다.
<기 도>
하나님. 아브라함부터 요셉을 각자의 처소에서 부르시고, 세우시며,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로 그들의 삶의 여정을 인도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의 삶도 여기까지 이르도록 인도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인도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삶의 어려운 순간들이 있지만, 말씀의 빛을 따라 신뢰와 순종으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각 자의 땅에서 사명의 책임을 넉넉히 감당하는 오늘 하루가 되길 간절히 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보다, 이를 의심하고 체념한 적이 있었나요?
2. 순종과 신뢰의 삶을 이루기 위한 신앙의 노력은 무엇인가요?
3. 지난 시간 신앙의 성장, 성숙을 위한 삶의 훈련은 무엇이었나요?
4. 주님이 나를 부르시고, 보내신 땅은 어디며, 주신 사명을 내가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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