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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9:19b-31

사도행전 9:19b-31
찬송가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다메섹의 제자들과(19-22)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나 다메섹으로 향했던 것은 다메섹에 있는 주님의 제자들을 색출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는 주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지만, 다메섹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강권적인 은혜를 경험한 이후에 그도 주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사울이 아직 주님을 향한 적대심을 품고 있었던 그 때에 먼저 찾아오셔서 사울의 마음을 180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회심은 언제나 인간의 의지가 아닌 주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기초합니다. 사울은 이제 주님의 진정한 팔로워로 살기 위해 다메섹의 제자들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19b)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당시 다메섹은 나바테아(Nabatean) 왕 아레타스 4세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는 유대인 회당이 30개가 있었습니다. 성막 중심이었던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은 바벨론 포로기에 이르러서는 말씀 읽기와 기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때에는 유대인의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에스라의 사역을 통해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것은 수십 년에 걸쳐 회당 제도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성전 중심의 신앙 생활은 회당 중심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장소일 뿐 아니라 자녀들을 위한 율법 교육과 유대교 공동체의 공적 생활 관리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각 지역에 흩어져 살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었고, 사울은 회당을 복음을 전파하는 전략적 장소로 이용하여 이후에 어느 도시를 방문하든지 회당을 먼저 찾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지체 없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즉시로’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은 사울을 단번에 변화 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성화(聖化)의 과정은 점진적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주시는 신분의 변화는 단번에 일어납니다. 시편 119편의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을 지체하지 않고 신속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말씀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즉시 각 회당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단순히 영적 지식을 깨닫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좇아 살도록 이끄는 인격적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변화 된 삶은 그를 알고 있던 주변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변화가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났을 뿐 아니라 그의 삶의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21-22)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이 복음을 전하였을 때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복음의 내용 보다 복음을 전하는 사울의 변화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누가는 변화 된 사울을 마주한 사람들이 모두 놀랐으며 당혹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21절의 ‘놀라다’로 번역 된 헬라어는 성경의 다른 곳에 ‘미치다.’(고후5:13)로 번역 된 단어이며 22절의 ‘당혹하다’로 번역 된 헬라어는 ‘정신적인 혼란.’ ‘소동.’(행2:6)으로 번역 된 단어입니다. 우리를 잘 알고 있던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어느 날 기독교로 개종했다거나,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는 고백을 했을 때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 보십시다. 신앙 생활은 꾸준히 말씀을 배우고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며 조금씩 성장과 성숙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 생활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부터입니다. 오랫 동안 교회에 출석하며 여러 봉사에 참여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없이는 조금도 앞으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인생에 찾아와 주시고 나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역사적으로 예수라는 사람이 2천년 전 중동 지역에 살았던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라는 사람이 인류의 위대한 스승임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과거형으로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대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실 뿐 아니라 언제나 주님의 사람들을 현재형으로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외없이 변화 된 삶을 살게 됩니다.

사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사도행전에서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처음부터 약속하신 예언의 성취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을 의미하는 용어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기름을 부어 세웠던 제사장, 선지자, 왕의 직무를 예수님께서 친히 담당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신 영원한 제사장이시며,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진리이신 선지자이시며, 모든 피조세계를 다시리시는 권세가 있으시지만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까지 섬김의 통치로 자기 나라를 회복하신 영원한 우리의 왕이십니다.

(23-25)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은 사울이 전한 복음을 기쁨으로 영접하기 보다는 사울을 향해 분노하며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사울은 한 밤 중에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광주리를 이용해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사울은 애초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이제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생명의 위협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제자들과(26-30)
(26-28)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3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갈1:17-18).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제자들은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서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회심을 믿지 못하고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회심한 직후에 그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다메섹의 신앙 공동체와 교제할 수 있도록 아나니아를 준비하셨습니다. 다메섹에서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사울과 바나바의 만남을 주선하셨습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행11:24) 예루살렘 신앙 공동체의 신뢰를 받고 있었고 사울이 제자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경이로운 은혜로 설득하였습니다. 제자들이 현재 주님의 사역자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능력과 자격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한 것처럼, 사울 또한 주님께서 부르셔서 인생이 역전된 것임을 설명한 것입니다.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울은 제자들에게 받아 들여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나바가 제자들을 설득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울의 회심이 참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 공동체로 함께할 수 있는 자격은 참된 회심입니다. 오늘날에는 등록 카드를 작성하는 것만으로 대부분의 교회에서 회원 자격을 부여합니다. 회심의 여부를 확인한 후에 등록을 받아주는 교회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등록 교인이 되는 것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울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묘사하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의도적으로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했다.’와 ‘제자들과 사귀고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즉, ‘교회’와 ‘제자’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이란, 세상의 허무한 것을 좇아 살았던 지난날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에서 높아지고 남들보다 잘 살기 위한 지식을 찾고 배웠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사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회심한 이후에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는 인생의 변화 된 가치관을 고백하였습니다.

(빌 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사울에게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그의 교양을 더 넓히는 일부분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식은 잃어버릴 수 없는 전부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는 것은 자신이 이미 소유한 모든 것들에 하나님을 더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이었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사울이 전한 복음을 믿음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사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헬라파 유대인들은 사울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다고 여겨 죽이고자 했습니다.

(29-30)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사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누가는 사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담대하게’ 선포했음을 2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27절, 29절). 사울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증인을 의미하는 헬라어 마르튀스(μάρτυς)에서 ‘순교자’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martyr)가 나온 것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은 세상의 반대와 거센 저항을 마주해야 할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세상은 돈과 권력과 명예 등이 왕좌를 차지하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왕이심을 선포할 때에 기뻐하며 순순히 순종하기보다는 생명의 위협을 가하기까지 저항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잠시 그의 고향인 다소로 피신시키셨습니다. 다소에서 사울은 단순히 사울의 대적자들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통로요 신약 성경의 저자로써 쓰임 받을 날들을 위해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특별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교회의 부흥(31)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더 이상 전하지 못하고 다소로 피신하게 되었음에도 성경은 ‘교회가 든든히 서 갔다.’고 묘사하였습니다. 교회로 번역 된 헬라어는 단수로 기록 되었습니다. 다메섹의 제자들과 예루살렘의 제자들 뿐 아니라 각지에 흩어져있는 주님의 제자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입니다. 눈 앞의 상황만 보면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있었지만, 영적인 차원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위축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안하며 든든히 세워졌습니다. ‘평안하다.’와 ‘든든히 서다.’는 모두 원문에 수동태 분사형으로 기록 되어있습니다. 즉, 그 모든 상황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으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과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으로 전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세상 속에서 힘들어도 믿음으로 살아내려 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성령님께서 위로하시며 함께 하셨고 초대교회는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위협은 성도의 인생을 망하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고 주님을 경외함으로 믿음의 삶을 사는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주님의 백성으로,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음에도 세상과 주님의 부르심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도하고 세상을 사랑하여 변화되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못한 우리의 삶을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오니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음성을 상기시켜주시고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과 깊은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십시오.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던 우리 인생이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음은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드리오니 우리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복음의 통로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아 세상의 위협 속에서도 변함없는 주님의 헤세드로 인해 감사하며 믿음으로 담대히 살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사울의 회심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켰습니까?
2. 사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3. 바나바는 어떻게 예루살렘의 제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습니까?
4. 그대는 주님께서 먼저 찾아와 만나주신 은혜를 경험하였습니까?
5.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은 사람은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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