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1-18
찬송가 498장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
사도행전 14장은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들에 의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게 되어 도착하게 된 갈라디아 남부 지역(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오늘 본문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겪은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고니온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남동쪽으로 약 145km 떨어진 도시였습니다. 두 도시는 서로 가까운 도시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길도 평지가 아니었기에, 오가는 길이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도가 이고니온으로 가기로 결정하게 된 것은 그나마 이고니온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고니온에서의 전도(1-7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이었던 이고니온은 시리아와 에베소로의 동서부 도로가 통과하는 중요한 교차지였습니다. 교통의 요충지였던 이 곳은 자연스럽게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로마제국의 클라디우스 황제가 클라우디코니움, 곧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이고니온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이고니온에는 로마 황제와 그의 군대의 위용을 담은 웅장한 건축물들이 도시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황제의 위용이 담긴 웅장한 건축물들을 지나 회당으로 갔습니다. 이는 두 사도의 전도여행의 통상적인 관례로, 먼저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성경이 증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핍박을 가하게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핍박도 두 사도의 사역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들은 주를 힘입어 계속해서 복음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통해 이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심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의 함께 하심으로 인해 그들의 말씀에는 힘이 더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힘이 있는 두 사도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4-5)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로 인해 오히려 도시는 둘로 나뉘었습니다. 사도들을 따르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따르는 사람들로 나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도들을 죽이고자 돌을 들고 달려들었습니다.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 핍박자들이 달려들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안 바울과 바나바는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이었던 루스드라와 더베로 가게 되면서 이고니온의 짧은 사역은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고니온의 사역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사역의 끝에 환대와 핍박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말씀이 전해지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살 소망으로 나아가는 복음이 되기도 하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되어, 악감을 품게 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있었던 일이었고, 스데반도 함께 따라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현대 크리스천 역시, 세상을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 뿐 아니라, 심지어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인해 거절 당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고 주님의 역사를 경험해서 우리의 힘이신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사람들에게 나누러 가는 걸음에 외로움이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거절과 외로움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처지에도 불구하고 주를 힘입어 복음을 담대히 전했던 두 사도들을 기억하며, 우리들도 복음을 끝까지 전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손을 통하여 더욱 더 놀라운 일들을 펼쳐 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스드라에서의 전도(8-18절)
가까스로 도망쳐 도착한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남서쪽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는 도시였습니다.당시 하루길에서 하루길 반정도 떨어진 거리로 비교적 가까운 도시였습니다. 루스드라는 이방인들이 중심으로 거주하는 도시였기에 회당이 없었습니다. 회당이 있는 도시였다면, 가장 먼저 회당을 찾아 말씀을 통해 전도를 했겠지만, 이곳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 중심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복음이 펼쳐지게 됩니다. 루스드라의 근방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한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8-10)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루스드라에는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그도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의 한 청중이 되어,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듣거늘’로 번역된 헬라어는 그냥 우연히 듣거나 흘러가는 이야기로 듣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갖고 열심히 듣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형으로, 그가 바울의 메시지를 계속적으로 듣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은 바울의 메시지에 마음을 다하고 집중해서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그를 바울도 주목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 때, 자신을 주목해서 보는 청중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학생이 교단에 선 교사의 눈에 더 잘 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인 이 한 사람은 계속해서 바울에게 집중하고 있었고, 당연히 바울도 그를 주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보니 그는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본문에서의 구원을 치료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즉, 바울의 눈에도 그는 치료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은 바울이 자신의 장애를 치료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으로 인해 바울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그에게 일어설 것을 명령했고, 그는 일어나 걸었습니다. 마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을 일으켰던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역사가 바울과 바나바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행하는 놀라운 이적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의 반응은 바울과 바나바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11-12)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말하고,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들이 믿는 그리스 신화에 빗대어 바울과 바나바를 신격화하고, 신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자신들 가운데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신이 사람으로 위장하여 사람들 가운데 왔었다는 그들이 믿는 고대의 전설에도 있었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평범한 사람으로 위장해서 묵을 곳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일천여 가정에서 박대를 당하였고, 마침내 찾게 된 허름한 집에서 나이든 노부부의 도움으로 묵을 곳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 신들이 그 집을 신전으로 만들었고, 박대했던 모든 집을 파멸시켰다는 전설이었습니다. 2000년 가량이 지난 지금의 의술로도 절대 고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을 고친 바울은 당연히 신격화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의 최고신, 곧 주신(主神)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전령을 담당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은 헤르메스로 여겼다고 증거합니다. 바나바는 그저 옆에 서 있었을 뿐,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을 고친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의 중심에 있던 인물은 오히려 낮은 신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이는 두 사도의 외모에서 비춰지는 모습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그리스 신화의 최고신 제우스는 모든 석상들 가운데 최고의 재료로 만들어지고 가장 크고 멋진 모습으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헤르메스는 전령이라는 작은 신이었기에, 제우스에 비해 볼품 없는 모습으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교적 잘 생긴 바나바를 제우스로, 비교적 볼 품 없었던 바울을 헤르메스로 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이러한 대화를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 신격화가 가시화되는 과정을 겪으며, 이를 이상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놀라운 이적을 보고, 그들을 신격화함과 동시에, 그들을 위한 제사를 준비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면서 두 사도는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말도 못 알아들은 상황인데, 눈 앞에는 영문을 알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두 사도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 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초지종을 듣고서야 지금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적을 보고 자신들을 숭배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대한 두 사도의 반응은 매우 즉각적이었고, 매우 유대적이었습니다.
(14상반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찬양을 받아야 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제사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듣자, 바울과 바나바의 행동은 신성모독에 대한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태도, 옷을 찢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성모독을 좌시하고 있다가 벌레에 먹혀 죽었던 헤롯(12:22-23)과 대조되는 행동이었습니다.
놀라운 이적을 보면서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영접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 앞에 나약한 존재임을 자인하며 옷을 찢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루스드라 사람들도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람들이 당황해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15-17)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바울과 바나바의 메시지는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자신들을 신격화 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편에서는 자신들은 신이 아닌 사람이라는 측면으로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루스드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신관에 하나님을 입혀서 설명했습니다. 그리스 신화 안에서 천지를 지배하는 신은 제우스였기 때문에, 제우스의 자리에 하나님을 두었던 것입니다. 온 세상을 만드신 분도, 그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그들이 믿는 신은 헛된 것이라고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목도했지만, 믿음이 없었던 루스드라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 제사를 지내려고 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눈으로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것은 그저 우상을 숭배하는 그릇된 신앙의 눈일 뿐이었습니다. 훗날 그들이 믿음이 생긴 후에 자신들의 신앙을 되돌아본다면 우상을 숭배했던 이 날들은 흑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믿음의 여정에 기록될 흑역사를 도리어 디딤돌로 삼아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을 다른 신앙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생활에 빠져 있는 그 시간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디딤돌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복음을 나눌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견고히 세워가실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은 거절을 받게 되기도 하고,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곡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닿을 때, 디딤돌로 사용될 수 있음을 기억하며, 복음은 나누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을 전한다면, 바울과 바나바의 메시지에 집중했던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과 같이, 우리의 메시지에 집중하며 삶의 문제를 해결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전달되는 원동력이 되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은혜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 진정한 해결자 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으며 거부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찾아가 절하며 도움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들을 향해 인생문제의 진정한 해결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전할 담대함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우리가 담대함으로 나아가는 걸음 끝에 그들에게 전해지는 복음이 그들의 마음에 심겨지게 하시고, 과거의 그릇된 신앙마저도 도리어 통로가 되어, 하나님을 더욱 더 잘 믿게 되는데 사용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상대방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그 태도에 따라 당신이 들었던 감정과 태도는 어떠했는지 묵상해 봅시다.
2.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문제로 인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은혜를 입었던 기억이 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3. 지금 당신 옆에 같은 인생의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지를 묵상하고, 그에게 어떻게 다가가 메시지를 나눌지를 묵상해 봅시다.
4. 주님을 당신의 힘으로 삼아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하여 어떤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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