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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26:1-32

사도행전 26:1-32
찬송가 300장 ‘내 맘이 낙심되며’


예수님께서는 지상사역 가운데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게 될 것”(마 10:18)이라고 예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바울이 이 예언의 성취자가 되어, 지난 본문들에서는 총독 벨릭스, 베스도에게, 그리고 이제 아그립바 왕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1-23절)
아그립바 왕이 입을 열어 바울이 말하기를 허락함으로써 바울의 변론 형식을 띤 긴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1세기 변론의 표준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론, 즉 왕에 대한 서론적인 언급(2-3)으로 시작해, 서술, 곧 사건에 대한 이야기(4-18)를 진술합니다. 이어 논증, 즉 사건에 대한 증거(19-23)로 마무리됩니다.
먼저 바울은 서론을 통해 아주 정중한 어조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자신을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아그립바가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말을 너그럽게 들어달라고 부탁하며 메시지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서술은 바울의 간증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간증은 자신의 기독교 이전의 활동과 회심, 그리고 자신이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된 소명에 대해 논합니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이 자신의 성장과 생활을 모두 잘 알고 있다고 말한 후, 자신이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엄격한 배경을 확증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유대 백성들의 소망에 관한 것 때문이라고 말하며, 청중들 역시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유대 백성들의 소망, 즉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심문을 받는 것이라면 이것은 로마에 대한 반항이나 적대적인 행위가 아니며, 정치적인 문제일 수도 없음을 변론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를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하는 것처럼 예전의 자신도 기독교에 대한 동일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 때, 곧 자신이 복음을 반대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때의 극렬함을 생생히 묘사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권한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기소했던 사람이었고, 기독교인들을 죽이려고 할 때, 찬성하는 표를 던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를 가하는 열정적인 인물이었다고 스스로를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바울도 회심을 하고 거룩한 소명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박해를 위해 다메섹으로 향해 가던 바울에게 죽었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 다시 말해 대제사장들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가는 길에서 도리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14-18)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 만남은 바울의 생애에 절대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와 주셨고 자신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변론을 통해 이는 빌라도에 의해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확실한 증거이고, 자신이 그 일의 증인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논증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이 완전한 증거임을 재차 확인하고, 지우려해도 지워지지 않은 확실한 경험으로 인해 자신은 결코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고,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까지 빛을 전하는 것을 거스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는 자신을 심문하는 아그립바와 베스도 앞에 서 있는 지금도 복음을 증거하는 시간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원래의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어그러진 신앙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걸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사울아, 사울아”라고 이름을 불러주시고, “기업을 얻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과의 이 만남을 통해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변화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변화와 만족을 넘어, 자신의 삶을 반추함으로써, 복음의 증거로 사용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또한 과거에 어그러진 신앙의 태도로 살았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주시고, 우리 각자의 신앙에 상태에 가장 잘 맞는 상황으로 말씀하시며, 세상 끝날까지 동행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전의 삶과 변화의 삶을 통해, 세상을 섬긴다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로 흘러가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설교의 결과(24-32절)
바울의 설교는 유대 신앙을 거의 알지 못했던 베스도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바울의 학식은 인정했지만, 그의 그 많은 학식이 그를 미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에 대해서도 참되고 온전한 말을 했다고 답변했습니다.
바울이 베스도를 향해 전하는 메시지였다면, 조금 더 쉬운 언어로 유대 신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더 풀어서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베스도가 아니라 아그립바 왕에게 한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설교의 청자인 아그립바는 바울의 설교를 너무 잘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한번 더 적극적으로 그의 유대 신앙에 지적인 도전을 더합니다.

(26-27)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일련의 사건들이 한쪽 구석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그립바가 모를리 없다고 말하며,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것과 비교하며 도전을 했습니다. 아그립바는 유대 성경에 전문가였기 때문에,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바울이 말하는 것을 연관지을 수는 없었습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를 인정하기에는 부담이 많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결정으로 기독교에 대한 어떤 결정이 내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그립바는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교묘히 답변을 피하는 아그립바를 향해 바울은 마지막 메시지를 전합니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아그립바를 향한 마지막 메시지, 그 뿐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과 같이 되기를, 즉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심문을 받기 위해 죄수의 자리에 선 바울은 오히려 당당하나, 그를 심문하는 아그립바는 오히려 주눅이 들어있는 듯이 보입니다. 죄수가 되어서도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는 바울의 마지막 메시지는 자신의 사명이자 소망이었기에 그 말씀을 전함에 있어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고 거침이 없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모든 심문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판결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베스도와 버니게, 그리고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그것이 그들의 실제적인 판결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황제에게 상소되지 않았더라면 석방이 되야 한다.” 이로써 바울이 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행이 결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고난은 이유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유 없는 고난은 바울의 마지막 메시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곧 복음을 전하는 하나의 씨앗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무고와 그의 열심은 그를 심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무고와 고난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과 같이 사람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후 베스도와 아그립바가 회심한 것에 대해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바울의 학식과 메시지에 큰 관심을 갖고 회심하게 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더 큰 그림에서 이 이유 없는 고난을 비춰볼 때, 이를 통해 바울은 로마를 향한 첫걸음을 떼게 되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를 향해 바울이 발을 옮기고 그곳에서 복음의 사역이 이어지도록 하나님의 큰 계획을 차근차근 이어가시고 계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비단 바울 뿐이 아닙니다. 삭개오도 태어나면서부터 이유 없는 고난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그의 삶의 큰 걸림돌은 작은 키였고, 그로 인해 불가촉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세리장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 없는 고난이 그를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야”라고 불러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입게 했고, 주님이 함께 머물러주시는 은혜까지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 끝에 그의 삶은 변화했고, 순종의 삶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는 그의 실천은 비로소 당시 시대를 밝히는 진리의 등불로 세워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유 없는 고난이 우리의 삶을 답답하게 하고 있다면, 그 고난을 통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음성 이후, 그 고난을 통해 우리 삶에 한 켠을 채워가시고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시는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 앞에서도 주님과의 만남을 소망하고, 그 교제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 결단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삶을 변화의 자리로 이끌어가시며, 그 자리를 통해 은혜와 복음의 꽃이 만개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바울의 처지가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심문하는 자리마저 간증과 설교의 자리로 바꾸어, 판결권을 가진 사람들보다도 더 당당히 서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담대함은 자기를 불러주시고 함께 해주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이었음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을 의탁드립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도 주님의 은혜로 채워주셔서 우리의 일그러진 신앙이나 이유 없는 고난을 변화의 자리로 바꾸시는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변화의 삶을 살길로 결심할 때의 믿음의 결단이 어땠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2. 최근 당신의 신앙의 열심이 어떤 것들 있으며, 그 열심이 다메섹을 향한 바울의 일그러진 신앙의 열심과 같이 맹목적인 열심은 아닌지를 묵상해 봅시다.
3. 바울의 마지막 메시지와 같이 신앙의 후배들에게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의 자랑스러움이 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4. 일그러진 신앙의 단면이나 이유없는 고난에 직면해 있는 당신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당신의 힘으로 삼아 변화의 자리로 이끌어가기 위해 어떤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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