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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27:27-44

 사도행전 27:27-44
찬송가 : 383 '눈을 들어 산을 보니'

표류에서 상륙으로(27-44절)
바울이 탄 배는 열나흘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아드리아 바다를 표류해왔습니다. 바울을 제외한 그 누구도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앞선 26절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는 바울의 예언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27-29)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27절에 보면 사공들이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했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중인데 어떻게 육지가 가까워진 것을 알았을까요? 본문에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아마도 사공들은 해안가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듣고 육지가 가까운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28절에 사공들은 물을 재어 보았다고 하는데, 이는 바다 아래로 납덩이를 던져 수심을 측량한 것입니다. 처음에 길이는 이십길(36미터), 조금 가서 다시 잴 때는 열다섯길(27미터)이었습니다. 수심이 급격하게 얕아진 것은 배가 육지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항구가 조성되어 있지 않는 해안에 정박을 시도할 때는 암초와의 충돌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그들은 전진하지 않고, 날이 밝아져서 육안으로 해안의 상태를 확인 할 수 있을 때까지, 고물(배의 뒷부분)에 있는 네 개의 닻을 내리고 기다렸습니다.

아마도 육지가 가까워졌다는 소식에 배에 탄 사람들은 흥분과 기대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도 아드리아 바다 같은 고난 가운데서 이리 쫒기고 저리 쫒기는 상황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바다에서 언제 건짐을 받을지 기대하며, 혹여나 고난의 깊이가 줄지는 않았는지, 재어보기도 합니다. 한편으론 고난의 파도에 더 이상 휩쓸러 가지 않기 위해, 닻을 내리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어서 이 암흑이 그치고, 광명한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오늘 본문과도 같습니다.

(30-32)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0-32절을 보면, 사공들은 도망가려고 이물(배 앞머리)의 닻을 내리는 척을 하다, 거룻배(lift boat, 구명정)를 바다에 내려놓습니다. 거룻배는 주로 돛이 없는 작은 배를 칭하는데, 사공들은 이를 타고 몰래 도망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바울은 “이 사람들이 배에 있어야 너희가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여 그들의 도주를 막았습니다. 현 상황에서 선원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날이 밝은 후 항구가 아닌 암초가 많은 육지에 대기 위해서는 선원들의 노련한 경험과 기술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군인들은 거룻줄을 끊어 거룻배를 바다에 버렸습니다. 이제 이 배에서 살아 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암초를 피해 배를 육지로 안전하게 정박하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닫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잘 가기 위해서는, 내 안의 거룻배를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룻배는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은 탈출구입니다. 신앙의 길을 가다가 힘들 때면, 거룻배를 타고 신앙의 바깥으로,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습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서, 또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내 안의 거룻배를 꺼내어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배 안에서의 내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있는 자리에서 맡겨주신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책임과 역할을 감당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기고, 배는 정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과 연결된, 죄와 연결된, 내 안의 거룻줄을 끊으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골3:1-3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33-38절을 보면 날이 새는 상황에서 바울이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오랜 풍랑 속에서 두려움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탈진해 있던 사람들이 어느 정도 기력을 차리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의 양식입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영의 양식은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입니다. 우리가 그 <어루만지심>을 간절히 사모할 때, 우리는 위로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의 엘리야는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이세벨 왕비의 위협을 받아 심적으로 큰 낙심이 왔습니다. 그리하여 광야로 도망가서 심지어 죽기를 원했습니다. 즉 그에게 큰 영적침체가 찾아 온 것입니다. 더 이상 기도할 힘이 없고, 가슴 속 소망과 열정이 사라져, 무엇도 꿈꿀 수 없을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온도는 영적 침체의 신호입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재차 보내어, 그를 어루만지시고, 음식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원어를 문자적으로 하면 “그 길이 너보다 크기 때문이다”로 직역됩니다. 맞습니다! 우리 삶의 길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큽니다. 그러나 주님의 위로하심이 있고, 일으켜주심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 보다 더 큰 삶의 길을 넉넉히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위로를 받은 엘리야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40일이나 걸리는 광야길을 걸어서 목적지인 하나님의 산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것! 내 고난과 문제를 내 경험과 상황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으로 해석하고 말씀으로 답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내가 회복되는 것이고, 본문에서 배 안에 있는 276명이 34절의 말씀대로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정도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39-40)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39절, 날이 새자,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고대했던 이름 모를 육지였습니다. 본문에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라고 얘기했는데, 이는 ‘모래사장으로 된 포구’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배를 댈 수 있는지 논의하였습니다. 이후 배를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 닻을 끊고, 돛을 달아 천천히 해안을 향하여 진입했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되나 했는데, 그들에게 큰 위기가 또 찾아왔습니다.

(41-44)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배가 두 물살이 합치는 곳을 만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그만 모래톱에 좌초되었습니다. 뱃머리는 움직이지 않고, 배 뒷부분은 거센 파도에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혼비백산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인들은 죄수들이 헤엄쳐 도망갈지 모르니 모두 죽이자는 제안을 합니다. 당시 로마법은 군인이 담당하는 죄수가 도망갈 경우, 그 죄수가 받을 형벌을 담당 군인이 대신 처벌받았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죄수들을 놓치느니, 자신들을 위해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죽음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백부장을 통해 바울을 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3절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먼저 육지에 나가게 했다‘고 합니다.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이 말이 마음에 참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살리시기 위해 군인들의 뜻을 막으셨습니다. 군인들의 제안은 그들의 관점에서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 악한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모든 악한 뜻을 막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우리가 피값으로 사신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며, 우리를 온전하게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내 삶에서 문제의 소용돌이로 인해 앞으로 못 나가는 상황, 문제의 파도로 내 마음을 깨뜨리고 부서지게 하는 악한 뜻이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계획이, 악한 뜻을 막으시고, 우리 삶을 이끄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오늘 새벽기도가 끝난 후, 각자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는 평안의 발걸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변질의 삶을 청산하고 변화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란, 주님의 시선이 우리 삶에 전염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상황과 형편이, 나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으니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으로 나의 상황, 나의 형편, 내 인생의 미래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세상에 무릎을 꿇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울면, 세상 앞에서 울지 않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으로 오늘 하루 살아가실 때, 문제의 바다에서 벗어나, 주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땅에 상륙하여 내 삶이 구조되는 기쁨을 누리는 시간들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 도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아드리아 바다와 같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은혜의 손길을 베푸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때론 세상의 길로, 죄악의 길로 도망치고 싶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 손길로 가녀리고 상처받은 저희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먹여주시고, 다시 일으켜주셔서 저희가 가야할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힘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혹 저희 삶에 큰 문제와 위기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람과 환경을 통하여 역사하여 주셔서, 저희에게 해가되는 악한 뜻을 막아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아드리아 바다에 표류하는 것과 같은 내 삶의 고난의 시기가 있었나요?
2. 거룻배는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은 탈출구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어렵고 힘든 점이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영적침체를 겪은 적이 있나요?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어루만져주시고 회복시켜주셨는지 나눠봅시다.
4. 내가 큰 문제를 겪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은혜를 베푸신 경험이 있다면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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