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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2:1-17

창세기 2:1-17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앞서 우리는 창세기 1장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세상을 보시기에 아름답게 창조하셨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은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음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거주할 에덴 동산을 준비하셨음을 증거합니다.

안식하시니라(1~3절)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앞서 6일 동안의 창조의 내용은 통일되고 일관된 문체로 진행되다가 일곱째 날에 대한 내용은 전혀 다른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일곱째 되는 날이 창조의 진정한 클라이맥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 이루어지니라'로 번역한 히브리어 '칼라'는 '완성하다, 또는 끝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사역을 완벽하게 마무리하셨음을 증거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부족함이나 아쉬움을 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놀라우신 섭리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그대로 녹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이 세상을 마주할 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송축해야 합니다.
시편 104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음에 놀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04:24)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우리의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지와 만물을 둘러 보십시다. 그러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2-3)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자신의 창조 사역을 마치셨을 뿐만 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명령하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출 20:8-11).
일곱째 날이 창조의 진정한 클라이맥스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날은 일곱째 날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6일 동안의 창조 과정 속에서 공간과 연결되는 어떤 것도 '거룩하다'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거룩하다'의 히브리어 동사 '카다쉬'는 '구분하다'는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안식하는 한 날은 활동하는 여섯 날과 구분됩니다.
창조의 의미로서 일곱째 날은 우리에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구분하는 거룩한 한 날이 됩니다. 우리는 6일 동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로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가능성을 발휘하며 주어진 자리에서 많은 일을 행하고 또 성취하며 만족을 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일곱째 날, 우리는 그 날을 구별하여 모든 일을 멈춰야 합니다. 일곱째 날에 모든 일을 그치고, 우리가 유한한 피조물이며, 창조주 하나님과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거룩한 한 날이 되어야 합니다.
앞서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의 내용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 )째 날이니라'는 표현으로 그 날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는 이 문장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6일 동안 창조 사역을 완전하게 마치신 하나님께 그 후로 영원한 안식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일주일에 한 번씩 반복되는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누리고 계시는 영원한 안식을 조금이라도 맛보지만, 마지막 세상이 끝나는 날에 비로써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의 의미가 창조에서 구원, 그리고 부활로 완성되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창조의 의미에서 명령하셨다면, 그 뒤에 이어진 신명기 5장 15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인도, 즉 구원해 내셨기에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즉, 안식일이 창조의 의미에서 구원의 의미로 승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안식일이 주의 날, 즉 오늘날 주일로 대체되면서(계 1:10), 부활의 의미로 완성되었습니다. 즉,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의 부활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주님의 날, 이날을 구별하며 살아가십시다. 이날은 우리와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을 높이는 날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영원을 허락하신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그 부활에 참여하는 안식을 맛보는 날입니다.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4~7절)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창세기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어는 '~의 계보(또는 후예)가 이러하니라'라는 구절에 표현된 '톨레도트'입니다. 이 단어는 '낳다'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창세기에는 총 10번의 '톨레도트'가 등장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늘과 땅의 내력, 즉 '천지 톨레도트'의 시작이며 4장 26절까지 이어집니다.
4절에서 '하늘과 땅'을 두 번 반복하면서, 그 순서가 '땅과 하늘'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해 이전의 1장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었다면, 앞으로의 내용은 땅의 이야기인 인간을 중심 주제로 내용이 진행될 것을 암시합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표현은 2장 4절부터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앞선 천지창조의 내용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초월적인 하나님을 증거했다면, 이제 인격적이시고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며 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5-6)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이 두 구절은 인간을 창조할 배경이 되는 무대를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고 경작할 사람이 없기에 그 땅에 어떤 초목과 채소가 나지 않았습니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경작할 땅에 풍요로움을 허락해 주실 것임을 암시합니다.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을 다루어 그릇을 빚어내듯 하나님께서 토기장이가 되셔서, 전능하신 손으로 인간이라는 걸작품을 만드셨습니다. 본문에서 인간의 영광과 비천함을 동시에 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땅에서 취한 흙, 정확히 말하면 흙에서 취한 티끌(먼지)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천함입니다. 그러나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직접 빚어지고 그분의 '생기'를 받아 생명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한번 등장하는 '생기'라는 단어가 독특한 만큼이나 인간은 창조주와 독특한 관계를 맺으며, 창조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영광입니다. 무엇보다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얼굴과 인간의 얼굴이 매우 가까운, 즉 그만큼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임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비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흙, 즉 먼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를 받았을 때 드디어 생령이 되었던 것처럼, 주님과 함께 호흡하며 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영광입니다. 오늘날 영광스러운 삶과 비천한 삶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먼지에 불과한 인생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생령으로 살아갈 것인지의 기로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어 넣어주시는 말씀의 생기를 날마다 공급받으며, 생령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반드시 죽으리라(8~17절)
(8-9)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빚어내신 인간을 에덴에 있는 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산에는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가득했습니다. 에덴은 사람이 의식주를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낙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에 두신 나무 중에 특별한 두 나무가 있었습니다. 바로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이 두 나무는 에덴 동산을 상징하는 나무이며 동시에 실낙원한 인간이 회복해야 할 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나무가 무성하며, 그곳에 먹을 열매가 가득한 휴양지에 가게 되면, 여기가 마치 에덴 동산 같다며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고 열매가 풍성이 맺히는 나무가 가득하다 할지라도, 그곳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없다면 그곳은 결코 에덴 동산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발전하고 더 이상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이 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만약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우리의 삶에 심겨 있지 않다면 결코 에덴 동산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 나무가 되시며, 선과 악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곳이 에덴 동산입니다.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0절에서 14절까지는 에덴 동산에서 네 개의 강이 시작되어 세상에 흘렀음을 증거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네 개의 강이 흘러 온 세상을 적셨다는 것은 모든 풍요로움이 하나님의 동산에서 비롯되었음을 증거합니다.

(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동산의 각종 열매를 임의로 먹을 자유를 허락하셨지만,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을 어기는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으라'는 긍정의 말씀과 '먹지 말라'는 부정의 말씀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인간은 동산의 각종 열매를 먹음으로,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먹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에덴은 순종의 동산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사람의 자유를 빼앗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에덴에서 인간은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에덴으로의 회복은 곧 순종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순종의 삶이 아닌, 내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불순종의 삶이 익숙합니다. 내 삶에 정말 회복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하루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순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내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십시다. 우리의 심령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차이를 인정하고,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는 하루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담에게 속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먼지에 불과한 비천한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존재가 되게 해 주셔서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이 에덴동산이라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우리의 심령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창조주이시며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의식하며,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일곱째 날이 창조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나의 일주일의 클라이맥스는 언제입니까?
2. 인간의 비참함과 영광은 무엇이며, 나는 어떤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우리가 회복해야 할 에덴 동산의 나무는 무엇입니까?
4. 오늘 하루 하나님 앞에 어떤 순종의 삶을 살아갈지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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