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7:15-27
찬송가 120장 ‘오 베들레헴 작은 골’
오늘 말씀은 어제 말씀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99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러시면서 그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언약을 구체화하십니다. 그리고 언약 앞에 영원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시며 그 언약이 세상 끝까지 이를 언약이 될 것이라고 세 차례에 걸쳐 밝히십니다(7,13,19절). 그 내용은 여러 민족들과 왕들이 그에게서 나올 것과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 될 것,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도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이와 더불어 할례를 행하도록 명하시는데, 할례 역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지킬 언약이 됩니다. 할례는 언약인 동시에 언약의 표징으로서,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언약을 배반한 자로서 끊어질 것을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사래의 이름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의 언약 (15-22)
(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사래라는 이름은 본래 공주 또는 왕비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름을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인 사라로 바꾸십니다. 그리고 사라에게도 복을 주어 아들을 낳게 하실 것이며, 민족의 여러 왕이 나게 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했지, 사라가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고 명시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이 열세 살이 된 시점이 되어서야 사라에게서 아들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여종 하갈에게서 자녀를 얻으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물론 잘못된 것이었지만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고 꾀를 냈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기 위한 대책에 대한 논의로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지만 같은 가치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생명입니다. 코로나를 막기 위해 강력한 봉쇄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 있습니다. 그래야 코로나 감염을 단기간에 끝내서 사망을 막고 생명을 증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그러한 셧다운은 경제 활동을 막아 결국 관련된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죽이게 된다고 맞섭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겪는 다양한 갈등은 좋은 가치를 내세우는 양편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그 이해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가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라의 경우가 그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하란을 떠난지 10년이 되었지만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출산을 막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섭섭한 마음과 더불어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미안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 때문에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어그러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부담이 컸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순되게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뜻대로 행하고 맙니다. 그 과정에서 좌충우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스마엘이 나름대로 장자로 자리 잡은 지 13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하나님은 사라에게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밝히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사라는 결혼의 근본 원칙을 어기고 하갈을 들이게 하였고, 비윤리적으로 내쫓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보다 앞서 하는 일들이 이러합니다. 마치 마스크를 써서 미세먼지를 막지만, 그 마스크를 태워 처분하는 과정에서 미세먼지가 발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공기 청정기를 돌려 미세먼지를 막지만 그 공기 청정기를 만드는 공장과 전기 발전으로 인해 더 많은 미세먼지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생각에 아무리 지혜롭게 여겨지는 방안도 하나님께는 어리석기만 합니다.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고 재단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일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저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라의 경솔한 행동에 잘못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사라에게도 복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이름이 바뀐 여자는 사라가 유일합니다. 이후 사라는 127세에 죽었다고 기록하는데 여인이 죽은 나이가 성경에 나오는 경우도 유일합니다. 편견 없이 보자면 사라는 위대한 여인입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사라는 그저 남편만 믿고 군말 없이 남편이 하는 일에 순종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을 누이라고 속이고 가장의 신의를 버리는 일을 두 번이나 겪으면서도 남편 옆을 계속해서 지켰습니다. 얼마나 큰 믿음과 사랑입니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사라는 분명히 믿음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19)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웃고 맙니다. 이 웃음은 이삭의 이름, 18장에 나오는 사라의 웃음, 그리고 결국 21장에 나오는 사라의 고백 즉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로 이어집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고, 기가 막혀 실소하고, 믿지 못해 조소한 것이 결국에는 참된 웃음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 그러합니다. 너무나 터무니없이 아름답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당하기나 한가! 놀라움에 웃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절망한 자리에서 희망을 주시고, 넘어진 곳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자녀를 주셨다고 한다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아이가 자신들의 아이이며, 자신을 통해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육체와 능력에 대해 절대적으로 좌절하고 포기하고 도저히 희망을 볼 수 없을 때 생명을 주셔서 그 약속이 온전히 하나님이 이뤄주시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만드셨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약속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그 후손에게 해당하는 것이기에 이스마엘과 이후 그두라에게서 난 여섯 아들에게도 이어질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혼란을 막으시고 사라에게서 난 적자인 이삭에게만 그 언약이 적용됨을 알리시기 위해 이삭과 내 언약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에게도 역시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그대로 복을 주십니다.
(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라는 말씀은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이스마엘에게도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 때문에 복이 주어지고 하나님은 그가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복은 영원한 언약에 근거한 이삭이 누릴 복에는 비할 것이 못되었습니다. 웃음이라는 이삭의 이름이 그렇듯이 이스마엘도 그 이름처럼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이스마엘 모두 이름대로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사실 태어나지 않아야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일견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충돌하는 것 같은 장면을 봅니다. 하나님은 왜 자손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후에 10년이나 가만히 계시다가, 또 기껏 이스마엘을 낳게 하시고는 13년이나 지나도록 아무 말씀 없으시다가 느닷없이 나타나셔서 이삭을 주신다고 하셔서 오히려 갈등을 초래하시는지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은 크게 보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 그때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왜 그때 그 일을, 또는 나를 막지 않으셨습니까 묻기도 합니다.
이러한 난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유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소설을 쓰시는 작가로, 우리는 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소설 작가들은 이야기 밖에서 여러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전체적인 줄거리와 그 핵심 메시지는 다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집필을 하다보면 등장인물들은 희한하게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구성해 나간다고 합니다. 작가가 쓸 내용을 그 등장인물이 직접 기술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작가라고 해도 그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을 일순간에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의 맥락이 끊기고 삼류 소설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소설가가 자신을 줄거리 속에 넣으면 이제 이야기의 저자일 뿐 아니라, 이야기 속의 한 인물이 되어 두 차원을 함께 경험합니다. 즉 이야기 전체를 파악하며 통제하는 동시에 그 구성의 일부가 되어 이야기 전개에 따라 직접 그 소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사람과 피조세계에 직접 뛰어들어 구원하신다는 큰 줄거리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우리 제각각이 자신만의 성격대로, 믿음대로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사라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베푸시고 복을 주신다는 것은 확실한 줄거리지만, 그 세부사항은 얼마든지 그들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의 뜻대로 이스마엘을 낳았고 길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이야기를 이뤄 드리는 기특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생각이 완성되고 기대가 다 끝난 시점에 나타나셔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21-22)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하나님은 내 언약이 이삭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보면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이고, 이삭은 약속으로부터 난 자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그래도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뤄보겠다고 하여서 낳은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 보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약속으로만 난 자인 이삭만이 하나님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시내 산의 언약과 같은지 예루살렘의 언약과 같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야기를 마치시고 이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바로 할례의식을 집행합니다.
할례의식(23-27)
(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바로 그날에 이스마엘과 그 집에 속한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포피를 베어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날 포피를 베었고, 이후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도 오래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럼 어찌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하였습니까?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따지거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밝히신 대로 즉시 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때로 어떠한 일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고 하나님의 뜻도 망쳐버렸다고 개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꺾이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실수나 연약함을 통해 더욱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어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잘못은 잘못대로 인정하고 회개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당장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택해야 할 삶의 방법입니다. 지금 우리의 실수와 죄 때문에 오지 말았어야 했던 어렵고 황량하고 목마른 자리에 있는 것 같다는 무거운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곳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자리임을 고백하고 매일 우리에게 들리는 대로, 깨닫는 대로 즉시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어제 말씀대로 할례를 통해 남자는 피할 수 없이 매일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됩니다.
(24-27)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이스마엘도 포피를 벱니다. 그리고 그 집에 속한 모든 자가 할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종족이나 출신 신분 때문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구십구 세가 된 아브라함과 팔십 구세가 된 사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십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선택으로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오늘 아브라함과 사라의 사건으로 우리의 믿음은 전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시기 원합니다. 믿음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지하여 나왔지만 아무 기척도 없고, 이런저런 몸부림을 쳐보고 애를 써봐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시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더 기다리고, 더 인내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내가 믿고 싶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믿도록 인도하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장 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하나님이 죽은 것과 같았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를 살리시는 이유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삶에는 푸른 풀밭도 있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있습니다. 무겁고도 어두운 자리를 지나실 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더 깊이 인식하고 삶이 우리 바람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끝까지 참고 사랑하며 예배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며 약속을 잊고, 말씀을 잊은 채로 조급하여 제멋대로 굴면서 하나님께 승인을 요구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와 죄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때까지 우리의 힘을 빼시고, 우리의 생각을 낮추실 때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기다리게 하시고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즉각 반응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자신의 의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던 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러한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결단할 일은 무엇입니까?
2.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이 지나서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이유를 묵상해 보십시오.
3.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자유가 하나님의 주권과 어떻게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하십니까?
4. 앞이 보이지 않고 절망스러워 하나님의 약속조차 의심스러운 순간 어떻게 믿음으로 대처해야 할지 행동 방안을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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