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12-21
찬송가 120장 ‘오 베들레헴 작은 골’
창세기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허락하신 후손에 대한 약속과 땅에 대한 약속을 확증해 주시며 언약을 체결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우상숭배하는 가정에서 돌이키셨을 때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아직 우상숭배하는 가정에 머물러 있었던 때에 우상숭배의 자리에서 불러내어 믿음을 허락하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셨을 뿐 아니라 믿음의 새 삶을 시작하도록 은혜를 베푸셨고 일방적인 은혜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수 천 년 전에 있었던 하나님과 아브람의 언약 체결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로 영적인 이스라엘이 된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셨고 새 언약에 합당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큰 흑암과 두려움(12-16)
(12)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확증을 원했고 하나님께서는 3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 총 5마리의 짐승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짐승들을 둘로 쪼개어 준비하였고 새들은 통째로 준비하였으며 해가 질 때까지 짐승의 사체 위에 솔개와 같은 맹금류들이 앉지 못하도록 쫓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밤이 맞도록 짐승들을 준비하고 지키느라 피곤하여 잠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깊은 잠으로 이끄셨으며 아브람은 언약 체결에 수동적으로 임할 수 밖에 없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했을 때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는 장차 약속의 후손들이 마주할 고난과 역경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약속의 후손이 400년 동안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될 것과 약속의 후손이 4대째에 귀환하게 될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장차 있을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일어난 일들처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야곱의 가족이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의 초청으로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한 것이 B.C 1876년 경이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온 시기는 B.C 1446년 경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머문 전체 기간은 약 430년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400년의 기간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성경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후대의 사람들이 기간의 일치를 위해 내용을 수정하지 않았던 것은 처음부터 성경의 목적이 미래의 일을 점치듯 예언하고 맞추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드러내는 것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후손은 세상에서 힘이 있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엄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에서 객이 되어 이방인들을 섬기는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약속의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아픔과 고난을 인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인내해야 할 것은 당장 아브람에게 요청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람은 100세가 되기까지 수 십 년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기다려야 했으며, 신체 나이로는 자녀를 얻기에는 불가능한 시기가 되도록 인내해야 했습니다.
교우님들께서는 오랜 기도의 제목이 있으신지요. 우리는 오랫동안 바라고 기다리는 무언가가 해를 거듭할수록 그것에 더 간절해지고 집착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오래 참고 기다린 만큼 그에 따른 보상은 더 크고 분명해야 만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그토록 기다리게 하시는 이유는 기다린 만큼의 더 큰 만족감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기다리다 제풀에 지쳐서 포기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인생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받은 가장 놀라운 복은 약속의 후손과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약속의 후손들은 400년 동안 이방의 객이 되어 힘겨운 삶을 이어가겠지만, 고난 중에도 포기하지 않도록 그들을 이끄는 소망은 400년이 지나면 큰 재물을 얻어 자유의 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 삼아주셨다는 사실과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어려움과 무관하게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고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누리는 풍성한 영적 실존이 우리가 이 땅에서 오감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실제보다 더 분명한 실제입니다.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땅을 얻기 위해 영혼이라도 끌어다 바칠 각오로 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세속적 욕망을 멈추고 믿음으로 인내하는 삶을 시작하게 합니다. 이 땅에서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원망하고 통곡하는 것과 달리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15-16)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평안히’로 번역된 ‘빼샬롬’을 직역하면 ‘평안 안에’입니다. 아브람의 인생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믿음의 경주는 이 땅 위에서 편안한 삶을 이루기 위하여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경쟁하고 더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반칙을 해서라도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샬롬 안에서 시작하여 마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약속의 후손은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4대째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후손들로 가나안에는 아모리 족속 이외에 다른 족속들도 있었지만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전체를 일컫는 표현으로 사용 된 것입니다. 약속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가나안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비어있는 땅이 아니라 죄악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한 사건은 세속적 논리에 기초한 정복 전쟁이 아니라 죄를 제거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고대의 전쟁은 부를 획득하고 국력을 강화하는 가장 빠른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단번에 영토와 재물을 안겨주기 위해 준비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후손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바로 세우고 세속적인 안녕이 아니라 하나님의 샬롬을 주시고자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편안한 삶을 살고자 이웃을 종으로 삼고 동료를 경쟁자로 삼는 세속적 전쟁은 이 땅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잠시 잠깐의 휴전만 있을 뿐 평안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 참된 평화가 있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바로 설 때 우리는 샬롬을 누리게 됩니다.
언약을 세워(17-21)
(17-18)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아브람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타는 횃불을 보았습니다. 원문에는 ‘보라!’는 감탄사를 통해 어둠 속에 타는 횃불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타는 횃불은 어둠을 뚫고 쪼갠 고기 사이를 가로질렀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언약’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고대 근동 지역의 ‘국제 조약’과 유사하다는 사실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계약을 체결할 때에 계약 당사자들은 짐승을 반으로 쪼개서 두 줄로 늘어놓고 그 사이를 걸어가는 의식을 행함으로 만일 계약을 어기게 된다면 죽은 짐승들과 같이 될 것임을 맹세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가로질렀던 것은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언약이라는 단어는 약속, 하나님의 법,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공적인 관계를 법적으로 체결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하는 것의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언약을 세워’로 번역된 원문을 직역하면 ‘언약을 쪼개다’, ‘언약을 자르다’입니다. 당시에 언약을 체결하는 핵심 의식의 의미가 담겨있는 표현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쪼갠 고기 사이로 걸으라 하시지 않으시고 타는 횃불로 임재하신 하나님만 쪼갠 고기 사이를 통과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이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이스라엘이 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실 때 우리에게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게 요청하셨다면 우리 중 누구도 이 자리에 남아 있지 못하고 벌써 목숨을 내놓아야 했을 것입니다.
언약은 ‘약속과 성취’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증언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며 다시 오심을 대망하는 대림절을 지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묵상해 봅니다. 타는 횃불이 어둠을 뚫고 쪼갠 고기 사이를 가로질렀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어둠을 물리치는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가듯 주님의 오심으로 죄와 사망은 힘을 잃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온 땅에 힘있게 뻗어나갔습니다. 언약을 배반한 우리가 목숨을 내놓아야 함에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심으로 언약은 파기되지 않고 새로워졌으며 온전해졌습니다.
코로나19로 참 힘겨운 한 해를 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된 삶은 어디에 있냐며 하나님께 따져 묻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교우님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람에게 흑암과 두려움 중에 언약이 주어졌던 것처럼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의 두려움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분명히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습니다(고후1:20).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셨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삶의 여러 문제들로 눈앞이 캄캄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타는 횃불과 같이 빛으로 오신 주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 주시며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19-21)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땅은 애굽 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였는데 그곳에는 겐 족속, 그니스 족속, 갓몬 족속, 헷 족속, 브리스 족속, 르바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사는 땅이었습니다. 구약의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총 17개의 가나안 족속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본문에 따라 7개(신7:1; 수3:10; 24:11), 6개(출3:8,17;23:23;33:2), 5개(출13:5;왕상9:20;대하8:7), 3개(출23:28)의 족속들만 언급합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한 번도 이 땅을 차지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윗-솔로몬 시대에 가장 근접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온전히 성취하시지 못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번역, 사사기2:1-2) 주님의 천사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고, 또 너희 조상에게 맹세한 이 땅으로 너희를 들어오게 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와 맺은 언약을 영원히 깨뜨리지 않을 것이니,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단을 헐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나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언약을 먼저 깨뜨린 것은 항상 우리였습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을 얻어야 했다면 우리는 모두 실패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광야에서든 세속적 도시의 한복판에서든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아브람이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며 믿음으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의 삶의 자리를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전혀 없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기리고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굳게 붙들어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과 힘있게 동행하길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의 깊은 밤에 메여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건져내어 주시고 아무런 소망이 없던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주시고 어떠한 환경의 지배를 받지않는 살아있는 소망 가운데 살게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문제들로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살거나 놓치지 않도록 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 주시고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동행하심을 신뢰하며 주님을 목적삼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흑암 중에 타는 횃불로 임재하셨습니다. 당신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문제를 만났을 때 어둠 속을 혼자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빛 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 약속의 후손은 이방의 객이 되어 일정 기간을 채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당신이 기대하는 모습과 다를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로 성취하기 위해 변해야할 당신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며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4. 하나님은 아브람이 바랄 수 없는 형편 중에 언약을 주셨습니다.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한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 하루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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