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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18:16-33

창세기 18:16-33
찬송가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아브라함은 지난 13년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응답이 없는 가운데 기나긴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기다려왔습니다. 햇볕이 뜨거운 어느 날 아브라함은 자신의 장막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 셋이 그 장막 맞은 편에 선 것을 보고 놀라며, 그 앞에 엎드려 절하고 그들을 맞아 손님대접을 하는 모습이 창세기 18장 전반부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33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을 예고하시고 이어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 아브라함과 대화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21절에서는 하나님은 소돔 심판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설명해 주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고, 22절에서 33절은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중보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돔 심판 계획(16-21)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6절은 하나님의 일행을 다시 ‘사람들’로 언급하며 소돔 멸망 사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8장 2절은 하나님의 일행을 사람이라고 했다가 13절에서 그 신분을 드러내어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16절에서 하나님의 일행을 사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렇게 표현 한 이유는 아브라함이 사람을 대접하는 것과 19장에서 소돔 사람들이 사람을 대접하는 것을 대조시키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하러 나갈 때는 소돔에 일어날 일을 전혀 모르고 단순히 손님들을 배웅하기 위해 그곳까지 따라 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세 사람과 동행하는 것을 표현한 히브리어 동사의 형태가 분사형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어지는 하나님의 독백은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장소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은 노아에게 세상을 심판하실 계획을 알려 주신 것처럼, 이번에는 아브라함에게 소돔을 심판하실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16절에서는 세 사람이 소돔을 향해 내려갔다고 했지만 17절은 곧바로 세 사람 중에 한 분이 여호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주어 ‘여호와’를 문두에 도치하였습니다. 히브리어의 평범한 문장 구조 배열은 동사 그리고 주어가 또는 목적어가 나오는 구조라고 생각해 볼 때, 주어를 처음에 두며 문장을 시작하는 구조는 17절 이후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중요 지침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침에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에게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18절의 표현들은 눈에 아주 익숙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비의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할 때 창세기 12장 2절 3절에서 한 약속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표현은 ‘그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입니다. 더 정확한 히브리어 원어의 근거에서 보면 ‘그 안에서’ 라고 번역해 볼 수 있습니다. 1차적 해석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복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이 행한 의와 공도로 말미암아 발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만민을 위한 복의 통로로 쓰시는 이유를 19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19절의 시작은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이유는 그로 하여금 그의 자식과 권속에게 명령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명령의 내용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해석해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그가 남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내시려고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을 준행하는 존재로 택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천하 만민이 알게 하려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일 것입니다.

(20-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12절에서 15절에서 하나님은 사라의 웃음을 들었는데, 20절에서 21절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소리는 단순히 군중의 시끄러운 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죄악의 희생자들의 피의 소리이며, 마치 하나님께서 땅에서 하늘로 올라오는 아벨의 피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가 저지른 죄악의 소리를 들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들려온 죄의 소리처럼 소돔과 고모라가 죄를 짓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 소돔으로 내려가려하고 계십니다. 창세기 18장 21절과 창세기 11장 5절은 동일한 동사로 바벨탑과 소돔을 살피러 가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표현 사용은 두 사건을 같은 관점에서 보게 만듭니다. 바벨탑 사건은 당대를 대표하는 범죄이고 범세계적 심판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는 선지자들이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모든 세대를 대표하는 범죄 도시이고 종말론적 심판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돔을 향한 아브라함의 중보(22-33)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독특하게도 아브라함은 22절부터 조카 롯을 위해 중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롯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에게 끌려가는 롯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군사 작전을 펼쳤던 것처럼 곧 멸망 당할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롯을 구해 내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롯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22절에는 등장인물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 사람 중에 두 사람은 소돔을 향하여 떠나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머물러 서 있습니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의 정체가 가장 명확하게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여호와는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나타난 것을 볼 때 구약 성경에서 종종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로 볼 수 있으며, 이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성자 하나님의 강림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23-24)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린 첫 간청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23절의 논리를 더 확대하여 소돔에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이들 50명뿐만 아니라 이들이 살고 있는 장소인 소돔과 고모라도 용서해 줄 수 없는지 하나님께 간청 드리고 있습니다. 소돔의 죄악의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될 정도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포함한 당대의 모든 가나안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창세기 13장 13절의 말씀처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50명을 제시한 이유는 그의 조카 롯과 그의 집안 사람들과 혹시 롯을 통하여 변화된 소돔 사람들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이 숫자의 의인을 하나님께 말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25-26)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은 간청의 정당성을 하나님께 말씀 드리기 위해 바른 재판의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는 것은 부당하며, 의인을 악인과 같이 여기는 것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 땅을 심판하는 분으로 고백하며, 사실상 하나님을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으로 믿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과 소돔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며 사용하고 있는 변론 기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와 공의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브라함이 생각했던 의보다 더 숭고하다는 것은 소돔의 용서를 위해서 아브라함이 50명에서 10명으로 거듭 제시하는 동안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들어 준 것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간청과 주장을 들으신 하나님은 소돔에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그들 때문에 소돔 전체를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하겠다고 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가 의인들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의인들 때문에 악인들도 용서하시는 것임을 본문에서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간청의 근거로 끝나지 않고 18절과 19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이 그의 자손들과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의롭고 공의롭게 사는 것의 중요성과 다른 사람들과 민족들에게 미치는 그 영향에 대해서 가르쳐야 할 하나님의 약속과도 긴밀히 연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27-32)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청을 듣고 너무 쉽게 하락하시자, 소돔에 의인 50명이 있을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27절부터 32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 거듭 간청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먼지와 잿 가루라고 하며, 자신을 지극히 미약한 존재라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이 자세는 25절과 26절에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심판의 원칙을 하나님께 담대하게 말하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많이 대조되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조된 모습은 아브라함의 모순된 인격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겸손하게 중보하는 그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의인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그리고 10명을 소돔에서 찾으면 멸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모두 6차례에 걸쳐 끈질기게 간청합니다. 아브라함이 5명의 의인을 조건으로 간청하지 않은 이유는 조카 롯의 가족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자를 포함하여 최소한 10명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라는 주석가들의 의견도 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청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x명을 찾으면, x명으로 인하여 내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를 반복하며 매우 간결하게 그의 간청을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아브라함의 간청을 모두 들으시고 대화를 마치신 하나님은 떠나시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곳으로 갔는지 본문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온 땅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의와 공도로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한 도시를 심판할 때 다수의 악인보다 소수의 의인에게 더 큰 비중을 두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확인시켜주시고 떠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중보에도 불구하고 소돔은 멸망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그 성의 유일한 의인 롯과 그의 가족들에게만 은혜가 베풀어지고 그 성들은 멸망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돌아보면, 복의 근원으로 부름 받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며, 그 명령을 지키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고, 그 성취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실과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하며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서가 아닐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부터 12절까지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말씀의 근거로 오늘의 본문을 바라볼 때,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 세상의 심판은 이 세상에서 살았던 유일한 의인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과 그의 공로로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은혜로 알 수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를 내어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얼마나 의로우시며, 신실하신지,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그 사랑을 기록한 말씀을 묵상하며, 세상이 알 수 없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한 날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를 친구 삼아, 주님의 계획을 알게 하시고, 세상을 향하여 주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성도로 불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희들의 어리숙한 기도와 질문에도 꾸짖지 않으시고, 응답하시며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항상 실수와 죄악과 모자람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한해를 살아왔고, 마무리 해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시며, 앞으로도 인도하실 주님의 신실함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의인으로 여겨지며, 그 놀라운 하나님의 돌봄을 받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모든 은혜의 근원이 주님의 행하심과 성취하심으로 말미암기 때문임을 잊지 않는 주의 백성 되게 하옵소서. 2021년 남은 날들 동안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되돌아보고, 정리하게 하시고, 새롭게 맞이할 2022년도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주님께서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 이유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명령대로 지키며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나는 지금 그 부르심에 맞게 살아가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2.악한 일들과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 속에서 나는 주님께서 언제나 의로우시고 옳다고 믿고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3.나의 모든 어리숙하고 엉뚱한 질문과 생각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과 거리두기를 하며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4.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을 정도로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친구처럼 대해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나는 지금 어떻게 대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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