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9:1-11
찬송가 366장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앞선 18장은 의인 10명만으로도 소돔 ‘온 지역’을 멸하지 않겠다는 은혜의 하나님을 증거하며 희망의 빛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19장은 어둠으로 시작합니다.
롯의 천사 대접(1-3절)
(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성경에서 시간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낼 때에도 쓰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18장에서 ‘날이 뜨거울 때에’ 즉, 한낮에 천사들을 맞았습니다. 그는 영혼이 맑고 밝은 한낮의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다윗의 범죄 이야기는 ‘저녁 때에’ 이뤄집니다. 마찬가지로 롯도 ‘저녁 때에’ 천사들을 맞았습니다. 롯은 영혼이 어두워진 밤의 사람이었습니다.
낮의 사람 아브라함과 밤의 사람 롯의 영적 상태는 같은 천사들을 맞이하는 각기 다른 태도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천사들이 아브라함을 찾아갈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갔지만(창18:2) 롯을 찾아갈 때는 천사의 모습으로 찾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천사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왔음에도 그들을 알아보고 보자마자 달려나가 영접했지만(창18:2), 롯은 천사들을 봤음에도 제자리에서 영접했습니다.
롯이 천사들을 만났을 때는 크로노스 즉, 시간의 흐름으로는 일상 중 어느 한 날의 저녁 때였지만, 카이로스 즉, 하나님의 때로는 소돔성 멸망전야였습니다. 멸망전야에 롯이 머물렀던 장소는 성문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재판, 상거래 등이 이뤄지는 성의 중심지였습니다. 그가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소돔 사회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턱밑까지 차올랐을 때 롯의 일상은 세속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고, 영적으로는 밤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멸망전야의 롯의 모습은 이미 예견되었습니다.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소유가 많아 더이상 동거할 수 없어 나뉘어야 했을 때 아브라함은 양보했고, 롯은 창세기 13장 10-11절처럼 행동했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롯은 자기 눈을 들어 바라보았고, 그 결과를 따라 동으로 옮겼습니다. 성경에서 동쪽으로의 이동은 하나님을 떠나는 삶을 상징하는데 가인이 그랬고, 롯도 그러했습니다. 롯은 안목의 정욕을 따라 하나님을 떠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계속 이어져 멸망전야의 그의 자리 역시 안목의 정욕을 따른 성문이었고, 영혼의 눈을 잃어 밤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반면 롯과 달리 아브라함은 자기 눈을 들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눈을 들어 바라보라’라고 하셨을 때 비로소 눈을 들었습니다(창13:14). 그후 아브라함은 그의 거처를 헤브론 마므레로 정했습니다. 헤브론은 ‘교제의 자리’라는 뜻을, 마므레는 ‘활발한’, ‘뜨거운’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살아있고 뜨거운 교제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롯과 달리 멸망전야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소돔을 위해 중보했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의 선택은 곧 멸망전야의 우리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안목의 정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선택은 다음이 아닌 오늘 있어야 합니다.
(2-3)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밤의 사람 롯은 천사들을 형식적으로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천사들이 충분한 쉼을 누리도록 권했지만(창18:5) 롯은 일찍이 떠나라 했습니다. 이에 천사들도 거리에서 밤을 새우겠다며 그의 형식적인 청을 거절했습니다. 롯은 간청하여 천사들을 집으로 들였지만 이내 그의 진심이 드러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고운 가루 세 스아, 송아지 고기, 엉긴 젖과 우유로 천사들을 대접했지만(창18:6-8) 롯은 누룩도 넣지 않은 무교병만을 대접했습니다. 이처럼 전심을 다하는 낮의 사람, 아브라함과 형식만 남은 채 마음은 빠진 밤의 사람, 롯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소돔성의 죄악(4-11절)
두 천사가 소돔성을 방문한 것은 소돔성의 죄악과 더불어 의인 10명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앞선 18장에서 이미 소돔의 죄악이 심히 무겁고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들렸기에 즉결심판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두 천사를 보내시며 소돔이 돌아올 기회를 끝까지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의인 10명도 찾을 수 없는 죄의 도시임이 확증되었습니다.
(4-5)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두 천사가 무교병을 먹고, 발을 씻고, 잠자리에 눕기까지 수 시간도 채 되지 않았을 그때, 소돔 백성들은 연령 및 장소를 불문하고, 다 같이 롯의 집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모인 목적은 낯선 나그네인 두 천사와 상관 즉, 성적 관계를 맺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소돔성이 온통 죄악에 물들어 의인 10명을 찾을 수 없는 곳임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소돔이라는 뜻이 ‘불타는’, ‘그을린’이듯이 그 성에는 정욕에 불타고 그을린 땅의 사람들만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하늘의 사람은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는 형식만 남은 신앙인, 롯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소돔 사람들과 동화된 롯의 모습은 그의 말에서 드러났습니다.
(6-8)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라고 외치는 롯의 모습은 언뜻 의로운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말은 아연실색하게 만듭니다. 그는 나그네에게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며 두 딸을 대신 내놓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딸이고, 정혼하여 결혼을 기다리고 있음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롯은 그저 소돔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서 성문에서의 자리를 내려놓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롯 역시 정욕에 그을렸습니다.
롯이 자기 딸을 언급하며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행하라’라고 한 말은 소돔 성이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사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안목의 정욕을 따르는 소돔의 생활방식을 날마다 보았던 롯은 죄 자체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기준 즉, 바른 분별력을 상실하여 영혼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나 롯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9)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정욕에 눈먼 사람은 자기 영혼도 정욕에 잡아먹힌 채 타인 또한 자기 정욕 해소를 위한 소비재로 만들어버립니다. 소돔 사람들은 두 나그네를 범하기 이전에 롯을 위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롯을 구해주었습니다.
(10-11)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두 천사는 롯이 이미 소돔 사람들과 동화되어 마음을 성문에 빼앗기고, 자신들을 형식적으로만 대했음에도 그를 구해줬습니다. 그러고나서 그들은 문 밖의 무리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 초자연적 현상으로 눈이 멀었으면 두려움에 떨며 눈을 뜨기 위해 애써야 할 것 같지만 눈먼 소돔 사람들의 반응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문밖에 있었음에도 문을 찾느라 헤매었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었음에도 여전히 문을 찾아 부수고 들어가 낯선 나그네 둘과 상관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1차로 임했음에도 돌이키기보다 정욕을 멈춰 세우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1차로 임했을 때 정욕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이켰다면 소돔은 멸망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정욕에 그을린 채 문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우리도 코로나라는 경종이 울려 마지막 때 임할 심판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욕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문을 찾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다.
오늘은 2021년의 끝을 3일 앞둔 연말입니다. 연말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해볼 수 있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같은 날 아비 집을 떠나 같은 장소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지만 멸망전야에 그는 밤의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안목의 정욕을 따라 선택한 결과 마음은 세속의 한복판에 빼앗긴 채 영혼이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두워져 가고 있는데 성문을 바라보며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 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다. 그리하여 멸망전야에 밤의 사람으로 남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깨어있으십시다.
나아가 헤브론 마므레를 선택하고 낮의 사람이 되어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를 이루었던 아브라함처럼 우리 영혼도 맑고 밝기를 소망합니다. 코로나 속에서 연말을 보내며 마지막 날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오늘, 우리 삶의 자리가 소돔을 벗어나 헤브론 마므레로 옮겨져 영원히 의로우신 하나님만을 목적 삼고 살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은혜의 하나님!
세속적 가치관에 흔들리는 우리 영혼에 등불을 비추시며 낮의 사람 되기를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원히 의로우신 하나님을 목적 삼고,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신앙인 되게 하옵소서. 혹여나 정욕의 자리에 머물렀었다면 묵은 해와 함께 내어버리고, 다가올 새해에는 헤브론 마므레를 선택하며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를 이루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자기 눈을 들어 바라보고 따라간 롯과 하나님 말씀을 기다리고 말씀이 지시하는 곳을 따라간 아브라함 중 나는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2. 안목의 정욕으로 출발했던 롯의 선택은 멸망전야에도 성문에 앉아있는 밤의 사람이 되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내 삶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이라면 돌이켜야 할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3. 하나님의 1차 심판이 임했음에도 여전히 정욕에 그을려 문을 찾아 헤매었던 소돔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개입하셨음에도 돌이키지 않고 있는 삶의 자리가 있다면 어디입니까?
4. 내년에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며 아브라함과 같이 예배를 즐거워하는 낮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계획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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