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9:23-38
찬송가 586장 ‘어느 민족 누구게나’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전에 두 천사는 롯과 그의 가족을 성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돔이 곧 멸망한다는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사위들은 성에 남았고,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두 딸만 황급히 성 밖으로 나왔습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는 두 천사의 명령을 들은 롯은 산 대신에 소알로 도망하기를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생떼에 가까운 롯의 요구까지 들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타협하여 소알로 도망하게 된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두 딸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다룹니다.
뒤를 돌아보았으므로(23-29)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해가 돋을 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합니다. 성경에 나온 많은 심판 장면이 밤에 일어나는 사건인 것과 달리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낮에 일어납니다. 낮에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불꽃은 밤에 멀리서 잘 보이고, 연기는 낮에 멀리서 잘 보입니다.
(24-25)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본문 중에서 실제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재앙에 대한 묘사는 24절과 25절에 국한됩니다. 정확히는 24절이 사건을 설명하고, 25절은 결과를 설명합니다.
24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를 친 재앙이 자연적인 재앙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나아가 기자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셨다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신 것은 ‘유황과 불’입니다. 이것은 ‘유황불’이나 ‘타는 유황’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큰 지진이 일어나 성들을 초토화 시킨 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지진은 요단 골짜기에서 곧잘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맹렬한 지진이 발생하는 동안 고열, 가스, 유황 및 역청이 갈라진 지층의 틈새를 통해 뿜어져 나왔고, 지진에 동반되는 벼락이 가스와 역청에 불을 붙였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라는 구절을 무시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성들에 불타는 유황 덩어리를 내던지셨다는 분명한 인상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다(눅 17:29)”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유황불은 두 성과 그 성들에 사는 모든 사람, 넓은 들과 땅에 심은 채소를 다 엎어 멸하였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에게 독립하여 이곳을 택할 때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이 지역의 푸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푸르름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무와 채소까지 탔으니 짐승들의 멸망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성경 기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설명할 때에 본보기로써 자주 언급됩니다.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뒤를 돌아보는 롯의 아내의 행동은 창세기 19장 17절에서 두 천사가 내린 명령을 직접적으로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창세기 19장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창 19: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두 딸을 성 밖으로 이끌어 낸 두 천사는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고 분명히 명령했습니다. 그럼에도 롯의 아내는 이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구약학자인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멸망 당하느냐 아니면 도망치느냐 하는 가능성만 있으면, 다른 제3의 대안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롯의 아내는 두 가지 길에서 제3의 길을 선택했고, 결과는 지금 보시는 대로 소금 기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종말의 때에 대해 가르치시며 롯의 아내를 언급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 31-3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눅 17:31-32)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예수님은 종말의 때에 뒤로 돌이키지 말고 피신해야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예로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몸을 돌이켜서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았기에 그 성들처럼 멸망한 롯의 아내를 반면교사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기자는 롯의 아내가 왜 뒤를 돌아보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롯의 아내는 자신이 남겨놓고 떠나야 했던 것에 미련을 두면서 망설이다가 소돔과 고모라와 운명을 같이 했을 것입니다. 포기할 것을 과감히 포기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미련을 두다가 가장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잃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뒤를 돌아 썩어질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혹 세상의 것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남아 있지는 않으십니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 9:62)”라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닐런지요.
(27-28)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창세기 19장에서 처음으로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바라봅니다. 여기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유일한 곳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그렇게 말이 많았던 아브라함이 여기서는 말을 잃었습니다.
그가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말을 잃었겠습니까?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던(창 13:10)’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처참히 멸망한 모습이 그의 입을 막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성들에서 떠오르는 연기 기둥을 보고, 모든 생명이 완전히 멸망했다고밖에 결론 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조카와 조카딸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계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고 있지만, 당시에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의 생사에 대해 알 길이 없었습니다.
(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기자는 하나님이 왜 롯을 살려두었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롯은 그의 삼촌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인해 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두 차례나 조카 롯의 생명을 구해주었습니다. 비록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했지만, 롯과 그의 딸들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인해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중보기도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이 임박한 세상 속에는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많은 영혼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명령처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벧전 4:7)” 합니다.
깨닫지 못하였더라(30-38)
(30)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
두 천사는 롯이 소돔을 떠날 때 산으로 도망하여 죽음을 피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롯은 근처에 있는 작은 성읍인 소알로 가서 피하게 해 달라고 생떼를 부렸습니다. 롯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롯과 두 딸은 소알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준엄한 심판 속에서도 롯의 생떼를 들어주셨지만, 롯은 이제 변덕을 부립니다.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뒤늦게 산으로 향한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리고 소알로 향했던 롯은, 이제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에 올라가 굴에 거주합니다.
이러한 롯의 변덕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생떼를 부리고, 혹 하나님께서 그 생떼를 받아 주시면 얼마 후에 그 마음이 바뀐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기보다는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혹시 이 새벽에도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내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마음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 눈에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보기에 옳은 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길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롯과 같이 자신의 고집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쉬운 길을 돌아가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므로 단번에 순종하여 바른길을 걸어가는 2022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1-35)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그 밤에도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롯의 큰딸은 작은딸에게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라고 말합니다. 롯이 재혼하기에는 너무 늙어 대를 잇게 해줄 아들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롯의 딸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목격하였기에 아버지 롯이 홀아비로 남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이처럼 노년의 롯은 자신의 딸들에 의해 애처로운 인물로 묘사됩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노년에도 범사에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창 24:1).
계속해서 큰딸은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다”고 한탄합니다. 소돔이 멸망하기 전에 롯은 사위들에게 함께 떠나자고 제안하였지만, 그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했던 롯의 사위들은 소돔과 함께 멸망하였고, 롯의 딸들은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이에 롯의 딸들은 롯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차례로 롯과 동침하여 롯의 후손을 이어가기로 모의합니다. 딸들이 이런 모의를 하고 있음에도 성경 어디에도 롯이 이런 모의를 알아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되려 이틀에 걸쳐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진 딸들의 동침 후에도 롯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한때는 아브라함에게 버금갈 정도로 부와 권력을 자랑하던 롯이 이제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무기력한 존재로 몰락했습니다. 이것은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목도한 후에도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롯은 멸시와 환난과 우환이 미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더욱 깊은 죄의 수렁으로 빠져 버린 것입니다.
또한 롯의 딸들은 자신들의 눈에 옳은 것을 행하는 사람들의 본보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에 세상의 방법을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생각을 우선시하였던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비극을 대변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영원히 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잊지 않고,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으십니까? 우리 눈에 옳게 보이는 것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살아 가십시다.
(36-38) 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
두 딸의 부정한 계획은 결국 성공하여, 둘 다 임신하였고, 각각 출산하였습니다. 큰딸은 아들을 낳고 ‘아버지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모압’이라고 부릅니다. 그에게서 모압 족속이 시작되었습니다. 작은딸도 아들을 낳고 ‘나의 친족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벤암미’라고 부릅니다. 벤암미에게서 암몬 족속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압과 암몬 족속이 이렇게 시작되었기에 유대인들은 이 두 족속을 유난히 더 멸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족속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훼방하였기에 미워하셨습니다(신 23:3-6).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두 민족이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며, 창세기 19장이 끝맺습니다.
롯은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생떼를 부리다가 뒤늦게 산에 올랐고, 무기력한 존재로 노년을 보내게 됩니다. 롯의 아내는 자신이 남겨놓고 떠나야 했던 것에 미련을 두면서 망설이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롯의 두 딸은 자신들의 눈에 옳은 대로 세상의 방법을 따라 행하여,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두 민족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롯의 두 사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다가 소돔과 함께 영원히 멸망하였습니다.
롯과 그의 가족의 비참한 최후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세속적 가치관에 매몰된 사람들의 본보기입니다. 혹 이들의 모습이 우리의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이 아닌지 돌아보십시다.
2021년에 마지막 하루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연말연시의 들뜸과 분주함에 마음을 뺏겨 오늘 하루를 낭비하지 마십시다. 그리고 올 한해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인 ‘영과 진리로’ 매일의 삶을 예배하는 삶으로 가꾸었는지 주님 앞에서 잠잠히 살펴보십시다. 다른 곳이 아닌 주님 앞에서 한 해의 끝맺음을 잘 할 수 있는 하루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올 한해 우리가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생떼를 부렸던 것은 아닌지, 혹 세상의 것에 여전히 미련을 두면서 망설였던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또 우리의 눈에 옳은 대로 세상의 방법을 따랐던 것은 아닌지, 혹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통해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를 이루라고 말씀하신 주님 앞에서 한 해를 돌아보는 하루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가 아직 미련을 두고 있는 세상의 것은 무엇입니까?
2.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해 중보기도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까?
3. 자신의 고집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낭패를 당한 적이 있습니까?
4. 하나님을 내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마음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5.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눈에 옳게 보이는 것을 따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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