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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20:1-18

 창세기 20:1-18 


찬송가 374장 “나의 믿음 약할 때”

성경은 역사 속에 등장했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사람들 대부분은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기 보다 죄에 쉽게 넘어지거나 믿음이 연약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소극적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이라면 믿음이 좋은 사람들만 등장해야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런 사람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이 연약한 믿음을 갖고 실패하는 모습을 더 선명하게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주인공은, 믿음의 사람이 아닌, 아무리 연약한 사람조차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견고한 믿음을 갖게 만드시는, 하나님이 주인공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말씀도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후, 아브라함의 행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랄로 이주하는 아브라함(1-7절)

(1)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아브라함은 20여년 정도 정착했던 헤브론의 마므레를 떠나 네게브 땅, 그랄로 이주하였습니다. 참고로 네게브는 헤브론 남쪽의 광활한 방목 지대로써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는 곳입니다. 성경에서는 그가 떠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도 아브라함은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게 되는데, 그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바로에게 아내인 사라를 누이로 속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1절의 본문을 읽을 때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불길한 예감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랄 왕으로 소개된 아비멜렉은 그 이름의 뜻이 ‘내 아버지는 왕이다’입니다. 그의 이름속에 담긴 가치관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아브라함과 어떠한 충돌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데려갑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또다시 사라를 누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실망스러운 아브라함의 대처 때문에 사라는 또다시 다른 남자에게 나아가야 했습니다. 다만 이때 사라는 경수가 끊어지고 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에, 동맹의 목적으로 데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3)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아비멜렉에 현몽하셔서 사라를 보호하십니다. ‘그 밤에’란 원문에서는 ‘바로 그날 밤에’를 의미합니다. 절대로 틈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하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꿈에 나타난 하나님께서는 아주 강력한 메세지로 아비멜렉이 사라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4-5)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가까이 하지 않았다’의 원문 의미는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다’입니다. 즉 아비멜렉은 사라를 데리고 오기는 했으나 성적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지 않았다면 그녀를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합니다. 5절의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이란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다른 사람을 손으로 해한 일이 없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의 기준에서 아비멜렉의 행동은 도덕적인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나, 당시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의 행동은 왕으로서 합법적인 권한이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아브라함의 말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행한 것임을 하나님께 주장했던 것 입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비멜렉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6-7)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나도 알고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소개합니다.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밀하고 가깝습니다. 아브라함을 단순히 여러 족장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아비멜렉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특별하게 구별시킨 존재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 특별한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어떤 일도 가능합니까? 7절에서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무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위기 앞에서 아내를 두번이나 외면했던 상습범이었습니다. 우리로 치자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으로 다뤄야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다음 본문인 21장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삭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바로 그 직전까지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다운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죄한 듯 보이는 아비멜렉을 나무라시며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호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귀한 존재여서 하나님이 뒤치다꺼리를 하신거겠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포기함 없으신 사랑과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 교우님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새벽에 우리의 눈이 나 자신 혹은 다른 엉뚱한 곳을 바라보기보다 오직 나의 도움이 되시는 주님께만 향하며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으시길 소망합니다.

아비멜렉의 책망과 아브라함의 변명(8-17절)

(8)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아비멜렉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하들을 빠짐없이 다 불러 꿈에 만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일하시면 성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반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9-10)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합당하지 아니한 일’, 차마 해서는 안되는 일을 자신에게 행했다고 책망합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그 일이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지하기보다 인간적인 처세술을 사용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일을 뜻합니다. 그의 이러한 연약한 믿음 때문에 무고한 이웃이었던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들은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로 표현하자면 교회 밖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안에 성도들을 향하여 믿음없는 행동을 책망하는 셈입니다.

(11-13)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아비멜렉의 책망을 들은 아브라함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습니다. 아브라함의 두려웠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럼에도 그의 잘못은 아비멜렉과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성도인 저와 우리 교우님들에게도 이러한 상황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해서 성도인 우리들에게 고난과 핍박이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크고 작은 위기 앞에, 죄와의 타협이 최고의 선택지로 보여진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스스로의 신앙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어려움이 다가올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타협하기 보다 유일한 나의 도움되시는 주님께만 눈을 들고 주목하는 은혜가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14-16)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후한 선물을 줄 뿐만 아니라 사라도 안전하게 돌려보냅니다. 이는 20여년 전 애굽의 바로가 사라를 취하려했다가 아브라함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바로가 그러했든 아비멜렉도 이 선물을 통해 아브라함의 마음을 얻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여러 족장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교제하는 선지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의 호의를 받은 아브라함이 반응합니다.

(17-18)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아브라함의 중보 덕분에 아비멜렉의 집안에 내려졌던 모든 저주는 사라졌습니다. 문제의 발단과 해결 모두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 땅에서 성도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저와 교우님들에게 묵직한 메세지로 받아들여 집니다.

물론 오늘 이 말씀을 듣고서 ‘나는 예수를 믿으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이 나를 잘 봐주시겠지’라고 오해하며 유아적인 신앙생활을 해서는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비록 처음 그의 믿음은 연약하였지만,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2022년, 첫번째 월요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작년보다 올해, 더 믿음이 성장하여서!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주님만을 목적으로 삼으며 담대히 살아가시는 우리 100주년기념교회 교우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 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2022년 첫 새벽기도회에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깨닫게하시고 결단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브라함을 보면 도무지 믿음의 조상다운 모습을 찾기가 어렵지만, 결국 하나님의 포기함이 없으신 은혜와 사랑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갔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번번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해드리는 결정과 행동을 할때가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신실하게 반응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도 오직 주님께만 우리의 눈을 듭니다. 복된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반복하고 있는 불신앙적 습관이 있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2.하나님의 말씀과 현실 사이에서 회피하거나 타협했던 적이 있습니까? 그 상황을 복기해보고 지금의 나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생각해봅시다.
3.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아비멜렉의 어려움이 해결되었습니다. 나의 중보기도를 필요로하는 가족 혹은 이웃은 누구이며 이유는 무엇입니까?
4.올 한해, 주님께만 집중하기 위해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결단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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