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546장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말씀하신 대로 이삭을 주심 (1-2절)
오늘 본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자녀, 이삭이 오랜 기다림과 하나님의 은혜 끝에 태어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격적인 상황과는 다르게 오늘 본문은 이삭의 출생에 대해 비교적 짧게 언급하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27절부터 시작된 아브라함에 관한 약속의 정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성경은 이삭의 탄생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인생 최고의 정점이 ‘이삭의 탄생’ 즉 약속의 성취 그 자체이기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행동이었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장면’이, 그의 인생에서 더욱 빛났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의 이야기는 아브라함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불신앙으로 인해 벌어진 오류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수정해 주시고, 복원해 주셨다는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이름을 크게 해주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며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큰 민족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자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라의 불임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장 눈앞에 보여지는 현실이 하나님의 약속 보다 더 크게 보여, 자신의 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 잘못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교정해 주셨습니다. 1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1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사라에게 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은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당연히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실재 우리의 삶으로, 즉 나의 이야기로 가지고 오면, 그 상황과 체감은 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벌을 받기도 하고, 복을 받기고 한다는 사실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돌보시고, 지키시는 은혜를 반드시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행동의 합당한 결과를 결국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과 같이 여호와의 말씀은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종종 성경 속 인물들이 예언을 하는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그 예언들은 모두 본질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언인데, 그 예언의 의미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믿음으로 거하면 살고, 영원한 복을 받는다는 내용이며,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없다 여기며,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 밖으로 나가는 자는 죽게 된다는 기본적인 원리를 따르는 예언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여러 사람들과 사건들을 통하여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 42장 8-9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사야 42:8-9)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이를 종합해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하신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었으며, 이 본문에서 나타나는 이삭의 출생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인간의 눈에 보일 수 있도록 드러난 것에 불과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직접 개입하시어 언약의 후손인 이삭을 낳게 하신 것은 생명의 탄생, 나아가 모든 백성들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에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본문 2절의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라는 표현은 앞에서 강조된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이 다시 한 번 강조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돌보시자 약속대로 사라가 임신을 하고, 이삭을 건강하게 낳고 키우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세상의 사람들은 노년의 부부가 아이를 낳은 사건에만 자신의 관심을 둘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의 시선은 이런 사건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 때’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는 외부로 나타난 현상만을 보는 세상의 사람들과 다르게, 신자들은 모든 일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기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비록 더딜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저는 사라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아이의 출산을 가까이에서 본 아빠로써, 사라가 아이를 건강하게 낳았다는 사실이 더 놀랍고, 이 노년의 사라가 아이를 낳고도 건강을 회복했다는 사실이 더욱 더 놀랍습니다. 임신은 순간적인 사건이지만, 이 아이를 열 달 동안 잉태하고, 출산하며, 건강을 회복하고, 키우는 일은 연속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지속적인 힘을 주셨고, 그 결과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에게 맡겨진 생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11-1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죽은 자는 복의 근원, 생명의 근원이 되어, 많은 후손을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죽은 자와 같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어 이는 자신들의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믿음의 조상으로 생명을 감당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 (3-5절)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본문이 계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늙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2절에서 노년의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은 것을 기록하였는데 3절에서 또다시 그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았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반복과 약속 성취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약속이 흔히 말하는 철학적인 의미나, 추상적인 개념을 넘어, 우리의 손에 직접 만져지는 가장 실재적인 필요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약속임을 보여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과 약속이 육체적 욕망으로 추구하는 것과 다른 고상한 것이라고 하여, 그 복이 우리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종류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실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허락하신 복은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복임과 동시에 영원히 가장 안전하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실재적인 복을 받은 뒤에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웃음’이라는 의미로, 이삭과 관련된 여러 사건에서 이 이름이 ‘언어유의’와 같이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잘못된 ‘비웃음’으로 반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성장과정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고 비웃는’ 장면에서 다시 한 번 이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의 본래의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난 곳은 이삭이 태어난 순간 일 것입니다. 이삭이 태어나는 순간, 이삭은 자신의 부모인 아브라함, 사라에게 ‘웃음을 주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과 그 성취는 우리에게 참 기쁨과 웃음을 주는 내 삶에 꼭 필요한 복된 은혜임을 기억하고 이를 믿음으로 이 약속을 기다리고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의 두 번째 행동은 이삭이 태어난 지 8일 째에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본문 4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례를 행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그의 집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명령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명령에 즉각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말씀하신 다른 명령 즉 아브라함 집에 남자가 태어나면 그가 누구든지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의 탄생과 함께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본문 1,2절에서 나타난 사라의 출산이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을 강조한 것이라면, 3,4절의 이삭의 이름과 할례를 행하는 모습을 통해, 아브라함의 순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순서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근거한 약속과 그 성취로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순종 역시 동시에 요구되는 신앙의 모습이 됩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으로 적용해야 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아브라함이 100세에 사라가 90세에 아이를 낳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라는 물음은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의미가 없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시에 불가능한 것이 없으시며, 이삭의 탄생보다 더 신비한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가 당연히 믿고 신뢰한다면, 이는 더 이상 과학적 증명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으로 봐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성경은 과학적 증명을 위한 책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영광, 그리고 그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물론 간혹 성경 속 이야기 안에 놀라운 과학적 사실이 숨어있기도 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으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것을 진리, 그렇지 않은 것을 비진리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성경적이지 않는 판단이며,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진실과 거짓을 판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가장 비과학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우리는 과학 공부를 통해 알게 됩니다. 일예로 휴대폰과 네비게이션과 같은 과학 기술을 사용할 때, ‘양자역학’이라는 이론을 사용하지만, 이 이론은 아직도 그 작동 현상을 응용을 하여 사용을 할 수 있을 뿐, 아직 양자역학의 원리와 그 모든 것을 증명하지 못한 이론 중 하나입니다. ‘양자역학’은 아주 작은 세계를 다루는 학문이라 관찰을 통한 증명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은 원리 하나도 온전히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데,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완전히 증명하고, 그렇게 증명된 하나님을 진리로 인정하겠다고 주장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말씀과 은혜의 산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만나게 되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에 대한 사라의 반응 (6-7절)
(6-7)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6-7절에서 사라는 몸서리가 처지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맛본 자신의 출산의 기쁨을 한편의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의 첫 번째 연인 본문 6절에서는 이삭의 이름의 뜻인 웃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웃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삭의 출생 소식을 들은 모두가 나에게 웃는다고 한다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두 번째 연인 본문 7절에서는 사라 자신이 불임 신세에서 맛본 출산의 기적을 기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라는 자신이 “아들에게 젖을 먹일 것이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누가 말하랴?’라는 질문은 사람으로서는 그 누구도 늙은 사라가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 할 수 없었었고, 오직 하나님만 이를 약속하실 수 있고, 그 약속을 이루실 수 있다는 대답을 유도합니다.
오늘 나의 상황과 기도의 제목들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이 약속하실 수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마땅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그 기도를 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는 바른 금식과도 그 맥을 같이 합니다. 바른 금식은 내가 무엇을 이루어 내겠다가 아니라, 나의 문제와 나의 기도의 제목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사라는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의 유일한 능력되시며, 우리의 목적되시는 우리 하나님을 만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기쁨과 위로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유일한 희망, 기도의 응답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쉽게 정의내리는 일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안에서는 이루어짐을 확인하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기도의 자리를 통하여
나의 문제와 나의 기도의 제목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노라 고백하며 주께 나아가오니,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나아가는 만큼,
주님께서 주신 기도의 결과도 믿음으로 받고,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는 우리가 되게 해 주옵소서.
그 결과 오늘의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기쁨과 웃음,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나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믿고 있나요?
2.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함에 있어 나의 믿음을 가로막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3. 우리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약속 말씀을 끝까지 붙잡고, 살아가는 인생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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