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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21장 8-21절

 창세기 21장 8-21절 


찬송가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었을 때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커서 젖을 뗄 때가 되었습니다.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 지라(8-11)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아이는 이제 젖을 뗄 만큼 컸습니다. 그때 아버지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냥 잔치라 하지 않고 큰 잔치라고 한 것으로 보아, 노년에 얻은 아이로 인한 기쁨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이 성장하며 그의 존재감이 아브라함의 큰 잔치로 나타날 때, 첫째아들 이스마엘은 이름도 없이 ‘하갈의 아들’이라고 표현됩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입니다.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성경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는 이스마엘을 ‘아브람과 그 아들’이라고 하던 것과 다르게(17장), 이제 ‘하갈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여종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립니다.

놀렸다는 말에 대해서 학자들의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놀렸다는 말 하나로 그것이 핍박이었는지 조롱이었는지 단순히 짓궂은 장난이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 사건은 단순한 아이들 사이의 다툼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는 문제를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종과 주인의 갈등, 미래에 있을 상속권의 문제, 하나님의 약속의 문제 등이 이 작은 표현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 사소하고 유치해 보이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사건이 인간적인 관계의 문제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의 한 유형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배경을 가지고 해석하면 권력의 문제로 볼 수도 있습니다. 첩이 낳은 서자가 정실부인이 낳은 적자를 놀리는 권력 갈등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차후에 있을 상속권 문제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갈의 아이가 이삭을 놀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사람마다 어떤 사건을 보는 관점이 다르고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그 차이는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고 있는지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어린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사소한 이 사건을, 사라와 아브라함이 다르게 대하고 있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대하고 있는 관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세상을 보는 하나님의 관점과 뜻을 알 수 있습니다.

(10-11)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요구합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이 사라의 눈에 가장 먼저 띄었고, 사라는 그들을 내쫓으라고 합니다.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한 것이 사라이지만, 이제 사라는 하갈을 내쫓으라고 합니다. 사라가 그들을 내쫓으라고 할 때, 내쫓다는 말은 원어로 ‘추방하다’는 뜻으로, 명령형으로 쓰여 관계를 청산하고 상속을 받을 권리를 끊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사라가 그들을 내쫓으라고 한 이유는,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상속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법적인 관행(Nuzi 문서)에 의하면 정실 부인이 낳은 아들의 상속권은 종의 아들의 상속권보다 우월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삭의 상속권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사라가 상속권의 문제로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한 것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기 때문입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임신했을 때 주인 사라를 멸시했는데, 이제 그 아들이 자신의 아들을 놀리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은 사라는 더 이상 하갈을 봐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로 아브라함은 사라의 요구에 매우 근심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진심으로 자신의 아들로 여겼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식을 주지 않아도 되니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노라고 할 정도였습니다(17장).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십여년 동안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유일한 독자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이스마엘을 내어쫓는 것은 매우 근심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어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기에 더욱 근심했을 것입니다(17:20). 이스마엘도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된 도리와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 큰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사소해 보이는 그래서 인간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기 쉬운 사건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넘은 하나님의 뜻을 넘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사건에 대한 그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12절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12-13)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근심하지 말고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곧, 사라가 말한 것처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 사라의 손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스마엘이 있음에도 이삭과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7:21). 그리고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고 하시며,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자손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스마엘은 악하고 이삭은 선하기 때문도 아니고, 이스마엘 보다 이삭의 믿음이 더 좋아서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낳게 하신 자식이 아니었고, 이삭은 하나님께서 낳게 해주신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란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약속을 했지만, 가나안에 와서 10여년이 지나도 자식이 없자, 첩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은 사라의 생식능력이 다 끊긴 후에 주셨습니다. 이삭을 낳을 때 사라에게 생식능력이 전혀 없었기에, 이삭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자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누가 옳다 누가 잘못했다는 식의 판단을 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언약의 결과가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부성애와 인간적인 도리를 무시하지 않으셨으며, 사라의 괴로움과 가족의 분열 또한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그것들을 넘어서 그가 하신 언약의 결과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성취되어 가도록 특단의 대책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인간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라처럼 인간적인 감정과 이해득실로 판단하기도 하고, 혹은 아브라함처럼 인간적 애정과 도리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부터 눈을 들어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사라는 과거의 자신의 멸시당한 것과, 현재 자신의 아들이 종의 아들에게 놀림 받는 것과, 미래에 있을 두 아들의 상속의 갈등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 또한 과거의 이스마엘과 쌓은 정과 현재의 부성애과 미래의 이스마엘의 삶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멀리를 보셨습니다. 갈데아에 있는 아브람을 부르신 목적과 이삭의 후손과 맺을 영원한 언약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이삭의 후손은 야곱이며 그가 낳은 유다와 그의 먼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또한 이 사건 속에서 눈을 들어 아브라함과 사라를 넘어 이삭을 넘어 야곱을 넘어 유다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까지 바라보아야 하나님의 이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하나님 이십니다. 하갈이 광야로 도망갔을 때는 주인 사라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셨다가, 이제는 그녀를 다시 광야로 내쫓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이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 언약은 모든 민족에 복을 주는 것이며 곧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지금도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대속하시고 영원한 나라로 들이도록 하신 그 언약이 지금도, 각 사람에게 성령을 통해 성취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언약이 이루어져 가는 대서사시 속에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소한 사건들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시기와 질투와 인간적인 동정으로 뒤얽힌 인간적 욕망의 산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한 집안의 정실과 첩의 자식 간의 다툼 속에서,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을 보시고 그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실 것인가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3절에서 ‘여종의 아들도 네 씨’라고 할 때, 원어는 12절의 이삭에게서 난 자만 ‘네 씨’라고 하는 것과 다르게 쓰고 있습니다. 12절의 ‘네 씨’는 계보를 강조하고, 13절의 ‘네 씨’는 혈통을 강조하도록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잇는 계보로 지칭하며, 이스마엘은 육체의 후손으로 지칭합니다. 이 이스마엘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기에, 아브라함은 근심하지 않고 사라의 말대로 그들을 내보낼 수 있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삶을 돌봐 주실것이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삭이을 통해 자기에게 한 언약을 이루어 갈 것이란 것 알았기 때문입니다. 근심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함께 계시매(14~21)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날 아침임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 신속하게 순종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란에서 그를 불렀을 때도 신속히 모든 가속과 소유를 이끌고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도 아침 일찍 일어나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이와 여자를 광야로 보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의 순종의 근원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서는 순종 할 수 없습니다. 순종에 앞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바르게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삭을 통해 언약을 이루어 가는 것 이지만, 이스마엘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이스마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며 그에게도 복을 주시겠다 약속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담아준 가죽부대의 물이 바닥나고 이스마엘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지자 하나님께서는 하갈로 샘을 발견하게 하시고 이스마엘이 생명을 잃지 않고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17-18)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목숨을 살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언약이 아닌 육체를 따라난 자손의 소리도 하나님께서 듣고 응답하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삭은 복주고 이스마엘은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언약은, 이삭에게도 복을 주며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의 종류가 다릅니다. 이삭에게 언약한 복은 영원한 복이지만, 이스마엘에게 약속한 복은 이 땅에서의 복입니다. 이스마엘에게는 이 땅에서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열두 두령을 낳아 큰 나라가 되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두 가지 모두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입니까? 같은 집안에 살며 같은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그 두 명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명이 모두 복을 약속 받지만 그 복은 다른 종류의 복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크고 작은 일을 해석하며 풀어가는 방식을 봄으로, 우리가 어느 편에 서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사소하게 보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다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뜻은 눈에 보이는데 있지 않고 영원한 것에 있습니다. 현실의 문제가 우리를 애워싸고 숨 쉴 틈 없게 만드는 것 같을지라도,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신 새언약을 바라보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새언약을 통해 우리 삶을 대하고 해석한다면, 우리의 삶은 영원에 잇댄 삶이 됩니다. 그러나 눈앞에 문제와 고통과 이득으로 우리 삶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삶은 이스마엘처럼 번성할 지라도 이 땅에서의 삶이 다일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한 언약은 복음이며, 이스마엘에게 한 언약은 율법입니다. 오늘 하루도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루신 새언약으로 삶을 대하는 하루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을 때, 사라는 분노해 내쫓으라 했고, 아브라함은 근심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대로 판단하셨습니다. 저희가 우리의 삶의 크고 작은 문제와 사건들에서 인간적인 관점에만 머물지 않게 하시고, 그 너머의 하나님의 영원한 뜻인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을 볼 수 있게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영원에 잇댄 삶을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사라는 왜 하갈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했는지 생각해보고, 나는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고 사라처럼 판단하는 것은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아브라함은 왜 근심 했는지 생각해보고, 나는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고 아브라함처럼 판단하는 것은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셨으며 왜 그렇게 하라고 했는지 생각해보고, 하나님의 관점과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 묵상해봅시다.
4.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약속하셨는데, 그 복이 이삭에게 언약한 복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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