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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21:22-34

창세기 21:22-34 


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는 네 명의 믿음의 족장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첫 번째로 등장한 믿음의 족장 아브라함에 대해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랄 왕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나눈 대화의 내용과 그 결과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이들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앞서 이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브람(존귀한 아버지)이 아닌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이 되었음에도(창 17:5), 그는 또다시 애굽에서와 같이 그랄에서도 그의 아내 사라를 자신의 누이로 속였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곧 사람을 보내 아브라함의 누이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이 모든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보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밤에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친히 사실관계를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랄 왕은 아브라함을 불러 선물과 함께 사라를 돌려보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아내와 여종을 고치셔서 다시금 출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본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그의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인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사라와 함께 그랄에 살면서 이삭을 낳았고, 이삭이 젖을 뗀 후에는 하갈, 이스마엘과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그 무렵에 그랄 왕 아비멜렉은 그의 군대 장관 비골과 함께 친히 아브라함을 찾아왔습니다. 이는 과거 아비멜렉이 사라와 아브라함을 자신에게로 불러들였던 것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만나러 가면서 그의 군대 장관 비골과 동행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잘 훈련된 체계 잡힌 군대를 거느린 왕 다운 면모를 잘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그가 이방인에 불과한, 게다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였던 아브라함에게 전한 고백은 실로 놀랍습니다.
(22 하)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체계 잡힌 군대를 거느린 그랄 왕이 노년의 이방인 아브라함에게 이같이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꿈에 나타나 주시고,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와 여종들을 고치신 은혜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이 고백과 함께 한 가지 요청사항을 말했습니다.

(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요청한 내용은 이후로 그의 아이들과 자손들을 속이지 않겠다는 맹세였습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아브라함을 후대한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자신과 그의 백성들을 후대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비멜렉이 말하는 그가 아브라함에게 베푼 후대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인 결과는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그랄에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인 결과는 애굽에서의 주어진 결과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창 20:14-15)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아비멜렉은 아내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며 자신을 속인 아브라함을 징벌하기는커녕, 도리어 가축들을 내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그랄 땅에 거주할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애굽에서와는 전혀 다른 결과 덕분에 아브라함은 사라 함께 그랄에서 살며 이삭을 나아 양육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인생을 수학 공식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한 손에 연필을 한 자루를 쥐고, 다른 한 손에 연필을 한 자루를 쥔 것을 보고서는 우리는 둘이라고 말합니다. 또 한 손에 연필을 한 자루를 쥐고, 다른 한 손에 지우개 하나 쥔 것을 보고서는 우리는 역시 둘이라고 말합니다. 전자와 후자 모두 사물을 양손에 하나씩 두 개를 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연필 두 자루와 연필 한 자루와 지우개 한 개를 놓고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그 과정이 비슷해 보인다고 해서 그 결과를 쉽게 속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순간순간이 우리 눈이 보기에는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피조 된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때마다 해야 할 것은 다른 결과를 따져 묻는 것이 아닌, 눈을 들어 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요청에 아브라함은 바로 대답했습니다.

(24-25)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요청에 분명하게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장 아비멜렉의 종들이 자신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대해 단호히 말했습니다.
여기서 ‘책망하매’로 번역된 원어(원형) יכח(야카흐)는 ‘논증하다’, ‘다투다’, ‘보여 주다’ 등의 뜻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새번역 성경에서는 ‘항의하였다’로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따졌다’로 영어 성경 NASB와 NIV에서는 ‘complained’로 기록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항의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입니다.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물을 꼽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물과 땅에서 솟는 물이 없이는 누구도 척박한 땅에서 살아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물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영역이었기에, 유목민들에게 우물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한때 몽골에 살면서 근거리에서 유목민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지구상에 얼마 남지 않은 유목민들이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한 가지 원칙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장막을 반드시 우물가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가축들과 함께 이동하며 풀이 무성하게 자란 곳이라고 해서 아무 곳에나 장막을 치지 않습니다. 어제 내린 비에도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초원에서 이보다 중요한 것은 눈앞에 푸르름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에 숨겨진 물의 유무였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유목민들이 제 마음이 가는 대로 장막을 세우는 것 같지만, 그들은 결코 무질서하게 장막을 세우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능수능란한 칼 솜씨를 가진 비골이 옆에 섰음에도 아비멜렉에게 이처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우물이 삶의 자리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이었을지를 가늠하게 합니다. 아비멜렉은 곧장 대답했습니다.

(26)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아비멜렉은 원어(히브리어)의 강한 부정을 의미하는 표현인 לא(로)를 세 번이나 사용해, 자신의 결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와 같은 내용을 알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고, 아브라함을 포함한 그 누구도 자신에게 말해 주지 않았음을 밝혔습니다. 이는 앞서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왔던 날 밤에 꿈에서 하나님과 나눈 대화를 상기시킵니다.

(창 20:4-5)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심판 예고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음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곧장 언약을 세웠습니다.

(27-30)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양과 소를 선물하면서 둘 사이에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는 곧 새끼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떼어 드리면서는 우물의 소유권을 확인한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일곱 마리를 취한 것은, 완전을 상징하는 거룩한 수인 일곱이 그들이 맺은 계약의 완전성과 불변성을 상징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히브리어로 일곱을 뜻하는 שׁבע(쉐바)에서는 맹세를 뜻하는 שׁבע(솨바)가 파생되었습니다.

(31)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באר שׁבע(브엘세바)는 우물을 가리키는 באר(뻬에르)와 맹세를 가리키는 שׁבע(솨바), 이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우물의 이름을 ‘맹세의 우물’로 명명함으로써 명실공히 브엘세바는 공식적으로 그랄 왕이 인정하는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습니다.

(32-34)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운 아비멜렉과 비골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곧 브엘세바에 강한 생명력을 지닌 에셀 나무(상수리나무:tamarisk tree) 심었습니다. 이는 영원토록 변함없이 은혜를 베푸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기념하고, 아비멜렉과 맺은 언약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과 지식이 깊어지면서 공적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전 영토를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남쪽 경계, 브엘세바가 이스라엘의 영토에 속하게 된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그랄에 브엘세바 세워지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했던 일은 무엇이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랄 왕은 분명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하고 계신다고 확신했지만, 정작 그랄에 머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동행을확신했었는지 의심이 생깁니다.
여기서 우리의 아브라함이 아닌 창세기의 주인공 되시는 하나님께 눈을 들 때, 오늘의 자리에서 살아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와 같이 그랄에서도 그의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그를 내치지 않으시는 하나님.
군대를 거느린 그랄 왕으로부터 그와 그의 가족을 지키(보호하)시는 하나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우물, 브엘세바를 허락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도 눈앞의 것들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것이 아닌, 언제 어디서나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 때, 허락된 삶의 자리는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는 예배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2022년 허락된 한 해를 시작하면 우리는 분명 이전과 다른 새해를 기대했지만, 지난 5일(닷새)을 돌아보니 묶은 해의 연장선에 선 것만 같아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애굽에서와 같이 그랄에서도 생존을 위해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이기에 주저함이 없었던 또 한 명의 아브라함이 오늘 여기 있음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아브라함과 함께해 주셨던 것처럼, 오늘 저희와도 함께해 주고 계심을 기억하며 하루를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오늘 하루도 저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며,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존중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정리해 보시겠습니까?
2. 아브라함이 우물을 빼앗겼을 때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헤아려 보시겠습니까?
3. 은밀하게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낀 경험이 있다면 되새겨 보시겠습니까?
4.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가 눈을 들어야 할 이유로 무엇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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