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말씀-이삭을 드리라(1-8절)
※ 앞으로 금요일 새벽기도회는 공동담임목사들이 돌아가면서 인도하고, 다른 요일은 이전처럼 전임 교역자들이 돌아가면서 인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일’은 어제 나눈 내용, 22장 후반에 있는 아브라함과 그랄왕 아비멜렉이 맺은 협정입니다.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은 일이 있었는데, 아비멜렉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어린 암양 7마리를 주고, 그 우물을 자신이 팠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맹세했고, 아브라함은 그 우물을 ‘브엘세바_맹세의 우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이 될 때 영원한 것을 목적 삼고 살아갈 수 있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살 수 있습니다. 즉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여러 날’을 지냈습니다(21:34). ‘여러 날’은 ‘오랜 기간(for a long time, for many days)’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21장과 22장 사이에는 약 1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성경에서 ‘시험’은 그 주체가 사탄이면 ‘유혹’이라는 의미이고, 그 주체가 하나님이면 ‘훈련’, ‘테스트’가 됩니다. 즉 사탄의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이 목적이고,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세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에 ‘정관사’가 있습니다. 즉 ‘그 하나님이’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인도해 오신 분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나를 잘 아는 부모님이나 친한 친구가 목적지를 말하지 않고 함께 가자고 하면 따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생면부지의 사람이 함께 가자고 하면 도망갈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것이 자신을 세워주기 위하심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아들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번제로, 제물을 다 태워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완전히 태워서 드림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즉 100세 난 아들이 네 아들이 내(하나님의) 것임을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에게 속한 것, 가정, 일터, 재능, 소유 등등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곤 합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지만, 그 과정을 지나면 믿음에 깊고 높은 진보가 있습니다.
(3-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지 않기에,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있던 브엘세바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리아산까지는 약 75km 정도입니다.
흔히 아브라함에게 이 3일이 깊은 고뇌, 갈등, 짓눌림 등의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의 상태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재지 않고,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마침내 결단의 순간에 아브라함은 종들을 머물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시험을 받는 대상은 자신이지 종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인가를 결단할 때는 자신이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기에 더욱더 자신이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자신과 이삭이 예배드린 후에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We will come back to you)”라고 말합니다. 번제는 제물을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도 돌아오리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던 것이었습니다. 제 말이 아니라 히브리서에서 그렇게 증언합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9).”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7-8)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이삭은 아브라함을 ‘내 아버지여’라고 부르고,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라고 부릅니다. 둘의 관계가 친밀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삭의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대답으로 보아, 이삭은 아직 자신이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물-이삭 vs. 숫양(9-14절)
(9-10)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굉장히 극적이고 다급한 장면입니다. 이삭이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진 것을 보면, 적어도 15-6살 정도는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하다면 아브라함은 115-6세나 됩니다. 힘으로 하면 이삭은 충분히 아버지를 밀치고 도망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지만, 성경은 이삭이 믿음이 좋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다급해진 것은 이삭이나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11-12)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사자가 얼마나 급했으면, 아브라함의 이름을 2번을 연거푸 불렀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은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자기의 아들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확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로 바치라고 한 이삭을 드리는 것을 중지하셨다면, 다른 제물이 있을 것을 믿은 아브라함은 눈을 들었습니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은 이 번제를 굉장히 감동적으로 드렸을 것입니다. 아들을 살렸음과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셨음을 확인하며 벅찬 감동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 숫양은 그저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십시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소까지 가는 도중에는 수풀(덤불)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진행하는 데 방해가 되었을 것이고 짜증이 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수풀(덤불)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숫양이 걸렸고, 그것으로 번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수풀(덤불)은 방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다양한 종류의 덤불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천천히 가야 했고, 돌아가야 했으며, 때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한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그 덤불이 방해물처럼 여겨졌는데, 그 덤불 때문에 우리가 바르게 갈 수 있었고, 새로워질 수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덤불이 은총이었음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가 있습니다.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이 이 상황에서만의 고백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길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할 때도 있고, 돌아갈 때도 있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지나온 날을 돌아보면, 아브라함과 같이 ‘여호와 이레’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15-19절)
(15-18)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그에게 말씀하셨던 복을 주실 것을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중요한 것은 16절의 ‘맹세하다’입니다. 일반적으로 맹세는 신하가 임금에게, 국민이 국가에 하는 것입니다. 즉 낮은 존재가 높은 존재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앞에 두고, 자신에게 맹세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하나님께 하신 것입니다. 즉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노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종들은 다시 브엘세바까지 75km를 사흘에 걸려 돌아왔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떠날 때의 마음과 지금 브엘세바로 돌아가는 마음은 아브라함에게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있는 감격과 감사를 종들은 모를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만의 비밀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비밀이 크고 많을수록 신실해지고, 믿음이 깊어집니다.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족보(20-24절)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동생 나홀의 족보로 막이 내려옵니다.
(20-24)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나홀의 족보가 나오는 것은 생뚱맞게 보입니다. 이 족보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아브라함의 동생이 나홀인데, 그가 브두엘을 낳고,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습니다. 즉 나홀-브두엘-리브가입니다. 그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입니다. 이삭은 이때로부터 약 25년 후에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결혼 25년 전에 이미 그의 아내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듣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말씀을 듣고, 눈을 들어 보았더니 수풀에 걸린 숫양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눈을 듦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올 한해는 물론 오늘도 우리의 눈을 듦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은 75살에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이후 여러 가지 일을 겪은 후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났고, 마침내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일까지 순종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연륜이 길어질수록 믿음이 성숙해지게 하여주시옵소서. 또한 우리가 걷는 길을 막는 것처럼 보이는 수풀이 있을지라도, 그것 역시 여호와 이레에 속하는 것임을 잘 새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 중 순종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순종 또는 불순종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받았습니까?
2.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지만 번제할 양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당신의 믿음생활 중,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3.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까지 가는데 수풀(덤불)로 인해서 걷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풀이 있어서 번제물 숫양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믿음생활에 수풀(덤불)과 같은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수풀로 인해서 어떤 유익이 있었습니까?
4.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기 위해, 또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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