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4:50-67
찬송가 379장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사라가 죽은 지 3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별세 이후에 35년을 더 살았지만, 성경은 의도적으로 사별 이후 아브라함의 35년의 세월을 축약하여 기술합니다. 창세기 24장은 사라의 죽음과 아브라함의 죽음 사이에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은 내용을 긴 호흡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창세기 24장은 창세기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장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종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내어 이삭의 아내를 찾아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나홀 성의 한 우물 곁에서 리브가를 만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임을 확신하였습니다. 리브가는 집으로 돌아가 아브라함의 종을 만난 일을 전하였고 리브가의 오빠 라반이 아브라함의 종을 만나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의 가족들을 만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정에 베풀어주신 은혜와 그가 리브가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으로 확신하게 된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리브가의 오빠 라반과 그녀의 아버지 브두엘은 아브라함의 종의 간증을 경청한 후에 지금까지의 일이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50-56)
(50-51)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리브가의 아버지인 브두엘 보다 그녀의 오빠 라반의 이름이 먼저 등장하는 것을 통해 브두엘이 이미 별세했거나 너무 늙고 병약하여 라반에게 가정의 책임을 넘겨주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는 또한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세대가 교체되는 것처럼 이제 한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함을 보여줍니다. 라반과 브두엘은 리브가의 혼사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끌고 계심을 고백하며 순종하는 태도로 임합니다.
최초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세워주셨으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을 때 부부의 사랑은 깨어지고 서로를 향해 비난하며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결혼과 가정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인간의 선택과 결정이 더 중요해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비단 결혼과 가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태도는 종교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을 통째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라반과 브두엘이 사위가 될 이삭을 만난적도 없고 양가 부모가 한 자리에 모여 상견례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혼사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라반과 브두엘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고 아브라함의 종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는 만남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라반과 브두엘의 신앙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12:1) 가정을 이루었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딸을 떠나보내려는 가정과 혼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뿐 아니라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의 방식은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를 물리치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형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반영하듯 오늘날 우리 삶의 자리는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주도적인 삶의 방식으로 자유와 풍요로움을 얻기를 기대하였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돈이 주도하고 쾌락이 주도하며 명예가 주도하고 체면이 주도하는 삶에 그저 종노릇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삶에 참된 자유와 평안이 없고 걱정과 근심이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의 본래적 지위와 영광을 되찾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52-54)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도 보물을 주니라 이에 그들 곧 종과 동행자들이 먹고 마시고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히브리어 성경은 아브라함의 종이 라반과 브두엘의 대답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렸음을 계속적 용법으로 묘사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반응하는 즉각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준비한 은금 패물과 의복을 리브가의 가정에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곧장 리브가와 함께 아브라함의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만나기까지 약 800km의 긴 여정으로 많은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하룻밤으로 여독을 달래고 주인의 집으로 가기를 서둘렀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800km에 달하는 먼 거리를 여행한다는 것은 강도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 등 여러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 험난한 시간을 보냈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여정을 자신의 힘으로 지나왔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겼다면 충분한 휴식과 양질의 음식으로 힘들었던 지난 시간에 보상을 받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은 그 모든 걸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알았기에 지체함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달려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55-56)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브라함의 종의 요청은 리브가의 가족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사랑하는 누이를 시집 보내는 것은 단순히 800km의 광야 길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딸을 시집보내야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조금이라도 아브라함의 종의 발걸음을 붙잡고 싶었을 것입니다. ‘며칠 또는 열흘’로 번역된 원문을 직역하면 ‘며칠 혹은 10’입니다. 탈굼은 ‘1년 또는 10분’으로 해석하고 칠십인역은 ‘열흘 정도’로 번역하였습니다. ‘며칠 혹은 10’이라는 표현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문화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어느 정도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리브가의 가족에게는 아직 리브가를 떠나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은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라며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그가 리브가를 떠나 보내는 가족들의 슬픔과 아쉬움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리브가가 떠날 길은 고생의 길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형통한 길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지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리브가를 만나기까지 신실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걸음도 책임져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가는 길은 비록 광야 길일지라도 두려움과 염려 대신 기대함으로 갈 수 있습니다.
리브가가 일어나(57-61)
(57-6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아브라함의 종의 단호한 태도에 리브가의 가정은 당사자인 리브가의 의견을 구하기로하였습니다. 리브가의 가족들도 리브가가 당장 떠나기 보다는 얼마간 시간을 함께 보낼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의 대답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료하였습니다. ‘가겠나이다’라는 짧은 대답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리브가의 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리브가의 의지를 확인한 가족들은 리브가를 떠나 보낼 준비를 하였습니다. 리브가는 그녀의 유모와 함께 친정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리브가의 가족들은 다음과 같이 그녀를 축복하였습니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누이라는 호칭을 통해 축복의 주체가 리브가의 오빠이자 가정의 대표 역할을하고 있는 라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22:17)고 말씀하셨고 라반은 리브가에게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이어가도록 예비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약속을 받았음에도 이방 땅에서 위기의 순간에 그의 아내를 지키지 못하였지만,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초월적인 은혜로 사라를 지켜주셨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를 보존하심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작은 믿음이 크신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역사하시며 우리의 작은 믿음을 연단하시고 훈련시켜 주셔서 하나님의 복 받은 인생답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즉, 우리의 믿음의 분량만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에 넘치는 복을 주시고 거기에 합당한 믿음의 삶이 되도록 빚어가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리브가는 신랑이 될 이삭을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주저함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리브가는 유모와 함께 여종들과 낙타를 타고 800km나 되는 광야 길을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 나섰습니다.
눈을 들어 보매(62-67)
(62-64)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아브라함의 종이 800km나 되는 광야 길을 어떻게 이동하였는지 세세하게 기술하지 않았던 것처럼 리브가가 여인의 몸으로 800km나 되는 광야 길을 어떻게 헤쳐 왔는지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어떤 간증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삶 속에 역사하셨는지를 고백할 때 우리의 고생과 수고를 장황하게 설명하다가 간증을 마무리하며 하나님께서 도우셨다고 짧게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가는 길은 비록 험난한 광야 길일지라도 형통한 길이기에 인간적인 수고와 고생을 자세히 묘사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떻게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 역동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집에 거의 다 왔을 그 때에 이삭 또한 브엘라해로이로부터 왔습니다. 브엘라해로이는 헤브론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살아계시며 지켜보시는 자의 우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 하갈을 위로하셨던 장소였고 결혼 후 이삭은 그곳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삭이 저녁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한 무리의 약대가 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묵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딱 한 번, 이곳에서 사용되었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묘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칠십인역은 ‘명상’으로 번역하였고 탈굼은 ‘기도’로 번역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삭은 결혼을 위해 수동적 적극성으로 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요행을 바랬던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고 주님의 일하심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빵의 논리인 세속적 가치 기준을 따라 결혼을 준비하는 모습은 결혼을 앞두고 들에서 묵상하던 이삭의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많은 결혼 정보 업체들이 결혼을 앞둔 남녀를 스펙과 자산 등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비슷한 등급의 사람들을 연결시켜 줍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비슷한 배경과 학력 그리고 경제적 능력 등의 사람을 찾고 만나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구하는 것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그려지고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처럼 결혼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중심으로 준비되고 이뤄집니다. 리브가와 이삭의 결혼은 세속적 가치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묵상할 줄 모르는 우리를 흔들어 깨워줍니다.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믿음과 삶을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는 유혹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속적 가치에 눈이 밝은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목적삼고 사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65-67)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낙타를 타고 있던 리브가는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이삭을 발견하고 아브라함의 종에게 누구인지 물었고 그는 그가 바로 리브가의 신랑이 될 사람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리브가는 곧 너울로 얼굴을 가렸고 이는 이삭을 향한 겸손과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를 보낸 아브라함에게 그간의 일을 보고하는 대신 이삭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아직 아브라함이 생존해 있었지만, 이를 통해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세대가 교체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이삭은 이제 리브가를 통해 위로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단호한 믿음을 보여준 리브가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바라보던 이삭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우리 눈을 혼란스럽게 하는 세속적 가치들 속에서 얼마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에 눈이 멀어 세속적 가치에 함몰되어 살아가던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늘에서 땅까지 단숨에 내려오신 주님은 한 번도 만난적이 없었던 우리를 단번에 알아보셨습니다. 이 땅에 매여있던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맞추고 영원히 주님과 사랑하며 살도록 우리를 주님의 신부로 불러주셨습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 오늘 하루도 주님을 의지하며 약속의 말씀을 힘써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형통한 길로 가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속적 가치들에 눈먼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을 목적삼고 사는 은혜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험난한 광야 길을 형통한 길로 여겼던 아브라함의 종의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길을 나섰던 리브가의 용기를 주시옵소서. 이삭처럼 우리 삶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여유를 주시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삶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라반과 브두엘은 아브라함의 종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순종해야 할 영역은 무엇입니까?
2. 아브라함의 종과 리브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주저함 없이 길을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면서도 주저하고 있는 결단과 결심은 무엇입니까?
3. 이삭은 묵상하다가 리브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삶에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한 믿음의 수동적 적극성을 어떻게 적용하시겠습니까?
4. 하나님께서는 라반과 브두엘의 눈을 들어 세속적 가치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목적삼고 살아가기 위해 맞서야 할 당신의 세속적 가치는 무엇이며 어떻게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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