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5:1-18
찬송가 481장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어제 살펴본 24장 마지막 말씀은 이삭이 리브가를 얻음으로 사라의 장례 이후 위로를 받았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다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아들인 이삭이 결혼을 통하여 새로운 사랑으로 상실감에서 회복했다는 것은 그렇다 치지만, 남편인 아브라함 역시 후처를 얻었다고 연결하는 점이 다소 의아합니다. 그 의미를 조금 더 살펴보긴 하겠지만, 성경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조금도 미화를 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어서 이 아브라함의 죽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삶과 족보를 다루고 이삭을 새로운 시대의 전면에 등장시킵니다.
그두라와 자손들 (1-6)
(1)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본절은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다고 하여 사라의 죽음 이후에 그두라를 들인 것처럼 표현합니다. 하지만 역대상 1장 32절에는 아브라함의 소실 그두라라고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소실이라는 단어는 정식 아내 외에 데리고 사는 여자라는 뜻으로서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첩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사라의 죽음 이후에 그두라를 들였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라가 백이십칠 세에 죽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은 나이는 일러야 백삼십칠 세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칠십오 세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길어야 38년을 함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려 여섯 자녀를 뒀고, 그들은 아버지를 떠나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란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히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은 백세 된 사람으로서 어찌 자식을 낳을까 하고 말하여 신체 능력이 상당히 저하되어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생식할 수 있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가질 수 있도록 그의 육체를 회복시키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왜 그두라를 들였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른 일이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일종의 일탈행동이었는지 아니면 관습에 따른 행동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삭이 결혼한 후에도 아브라함은 35년을 더 살았지만 성경은 의도적으로 그 기간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치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대가 분리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백사십 세에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을 목격했고, 백육십 세에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것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서도 15년을 더 살았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구성한 이유를 따져 보면 이삭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를 나타내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특별히 그 기간에는 후대에 전할만한 믿음의 사건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성취하시고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두라에게서 난 여섯 자녀 역시 큰 민족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2-4)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이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여섯 아들을 통한 후손들은 가나안 남쪽과 동쪽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에 욕산의 후손과 미디안의 후손을 보다 상세하게 서술합니다. 이들이 후에 이스라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미디안인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려가는 상인들로 등장하고, 모세가 결혼하면서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가족 중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이후에는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드러납니다.
(5-6)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
하갈을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두라를 취한 것 역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꼭 원하시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다고 아브라함의 선택을 막지는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결과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고 그두라에게서 여섯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시며 큰 민족이 되게 하십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고 또 믿음으로 감당했습니다. 한 번 이렇게 예를 들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특별히 코로나와 미세 먼지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우리나라 안에서 코로나와 미세 먼지를 멈출 방법을 다 알고 있습니다. 코로나의 경우에는 2주 동안 철저하게 전 국민 격리를 실시하면 됩니다. 모든 국민이 2주 동안 집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다고 한다면 코로나는 해결될 것입니다. 또 미세 먼지 문제는 모든 공장 가동을 중지하고 차량 및 대중교통을 완전히 멈추면 해결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행한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서자들에게도 각기 재산을 주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삭을 떠나 동쪽 땅으로 가게 만듭니다. 아무리 이삭이 약속의 자녀였다고 할지라도 낳고 기른 다른 자녀들에게도 정이 있었을 것입니다만 아브라함은 냉철한 판단을 합니다. 이삭이 유업을 이을 자로서 그 지위가 흔들리지 않도록 생전에 조치한 것입니다. 이스마엘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그리고 10대 소년 시절에 두 번이나 아들을 떠나보냅니다. 성경은 이때 아브라함도 큰 고뇌에 빠졌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죄의 영향력 아래 놓인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이런저런 죄가 만들어낸 교착 상태에 빠져 이 죄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애쓰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어서 절망감에 몸부림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희망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인간의 머리로 해결이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결정을 내린 아브라함을 본받아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삶에 주저리주저리 매달려 있는 결과물들을 과감히 잘라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마엘을 내쫓고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으며 그두라에게서 얻은 자식을 내보내는 아브라함의 행위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7-10) 아브라함의 마지막
(7-8)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아브라함은 이렇게 삶의 모든 마무리를 짓고 백칠십오 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오랜 기간 신실하게 아브라함을 지키셨고, 창세기 15장 15절에서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라고 약속하신대로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기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제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표현은 히브리 사람들의 사후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문구입니다. 사실 8절에서 열조라는 단어는 이스마엘이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라는 17절 말씀에서 나온 백성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모두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라고 옮겼습니다. 다만 창세기 15장 15절 말씀을 따라 아브라함에게는 열조라고 바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그 진정한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후 세계관을 드러낸 것입니다. 즉 죽음은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으로서 먼저 죽은 조상들과 만나 교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9-10)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와 함께 막벨라 굴에 장사됩니다. 사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리라 약속하신 땅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대가를 지불하고 구매했고 거기에 사라를 장사했으며, 본인과 그 후손도 거기에 묻히게 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각에게도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 우리의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거기에 거주하면서 그 값을 직접 치러야 하고 결국은 우리의 목숨을 바쳐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땅과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선교사님들이 그러셨듯이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땅에서 인내하며 거주하고 결국 죽어 거기에서 장사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우리에게 오늘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영토를 이러한 마음으로 지켜나가기를 소원합니다. 거기에 뼈를 묻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후에 야곱이 그 땅을 사모하고, 요셉 역시 그 땅을 간절히 소망하여 뼈가 묻히기를 원했듯이 우리의 후손들도 우리 믿음의 흔적을 찾고 거기에 기꺼이 자신을 장사하여 믿음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또 흥미로운 사실은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장사에 참석했다는 점입니다. 자신을 두 번이나 어머니와 버린 아버지를 찾아온 이스마엘의 심정이 어떠할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마엘은 그 자리를 찾아 함께 슬퍼하며 애도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도 아버지의 복을 누리게 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라함이 죽은 후 하나님은 이삭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이삭에게 넘어가고 이삭이 계승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삭의 족보를 다뤄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 이스마엘의 족보를 다룹니다.
(12-18) 이스마엘의 족보와 자손
(12-16)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12절에서 말하는 족보란 톨레도트라고 하여 앞선 새벽기도회 설교에서 몇 차례 다루었듯이 창세기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됩니다. 따라서 창세기 11장 27절 데라의 톨레도트로 시작된 아브라함의 역사가 마무리되고, 12절부터 이스마엘의 톨레도트가 삽입된 후에 19절부터 바로 이삭의 톨레도트가 시작되면서 아브라함의 시대가 완전히 저물고 이삭의 시대로 이행되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열두 아들을 낳는데, 이는 하나님이 창세기 17장 20절에서 이미 약속하신 열두 두령을 낳으리라는 말씀의 성취를 말합니다. 이스마엘도 복을 받아 열두 지도자들이 다스리는 큰 나라가 된 것입니다.
(17-18)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이스마엘은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다고 기록합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나이가 높고 늙어서 라고 하였지만 그러한 표현은 생략되어 약속의 자손은 되지 못함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넓은 땅을 차지하고 큰 민족이 됩니다. 이사야 55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스마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도 헛되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그두라의 자손과 이스마엘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들을 의지하며 붙잡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소원합니다. 그래서 땅을 내려다보며 땅에 시선을 팔리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지막을 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하나님이 부르실 때 숨을 멈추는 존재임을 확인합니다. 우리의 길지 않은 삶을 주님 원하시는 곳에 드릴 수 있게 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뚫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먹고 마시는 것과 입고 즐기는 일에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에 머물며 거기에 죽어 장사되어 믿음의 후손들이 찾는 곳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시고 말씀을 이루셨음을 묵상하여 보십시오.
2. 아브라함처럼 나의 삶에서 과감히 잘라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3.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밭을 사고 거기 장사된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여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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