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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26장 1-11절

본문 창세기 26장 1-11절 


찬송가 424장 ‘아버지여 나의 맘을’

인간은 누구나 미래를 생각합니다. 오늘이 힘들어도 내일은 좋아지리라는 소망을 갖습니다. 그런데 내일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은 오늘이 만듭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일이 결정됩니다. 이는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한 개인의 삶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후손과 사회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은 결과,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노아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그 가족이 구원받은 것은 물론 그를 통해 인류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19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날 한 사람의 일탈이 사회에 얼마나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는 지를 우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노쇼(No-show)”는 고객이 예약을 해놓고 취소의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은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로 인한 직간접적 경제적, 사회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서비스업종 및 연관 제조업체 연간 손해액 약 8조3천억원/ 고용손실 연간 약11만명 –2016년 조사). 코로나19 거리두기 규제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초기에 우리 교회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주일예배 예약제를 실시했습니다. 주중에 신청하신 분들만 현장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는데, 예약을 했음에도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물론 사전에 주일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연락을 주신 분들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No-show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 한 사람으로 인해, 미리 준비한 예배공간과 봉사자의 헌신이 소용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간절히 현장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는 어떤 교우님의 현장 참여 기회를 빼앗은 것입니다. 주님을 믿은 우리를 언약백성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부모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이삭 (1-6)
 
(1a)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75세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왔지만, 그 땅에 기근이 들어서 그는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1b)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라고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이 175세 죽었으니,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흉년으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후에 가나안 땅에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던 이삭(창 25:11)은 흉년을 피해 남으로 내려가던 중에 그랄에 이르렀습니다.

(1c)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그랄은 당시 블레셋이 통치하던 곳으로 가나안의 접경지역입니다. 애굽 왕을 파라오라고 부르듯이, 블레셋 왕을 아비멜렉이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이삭이 그랄에 도착했다고 하면 되는데, 본문은 굳이 ‘이삭이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삭이 그랄에 도착하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b)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흉년을 피해 남하한 이삭의 목적지는 애굽이었습니다. 애굽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달했기에 흉년이 든 가나안보다 상황이 좋을 것이라고 이삭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은 다름 아닌 ‘그랄’이었습니다.

(3-4)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상식적으로는 흉년을 겪고 있는 가나안 땅보다 형편이 훨씬 좋은 애굽으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굳이 흉년이 든 그랄에 거주하라고 하십니다. 한글 성경은 마치 조건절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원문상 의미는 명령형입니다. 즉 “애굽에 가지 말고 이 땅에 거류해라”. 그랄은 가나안의 경계선 상에 있는 지역이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언약의 땅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너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지 말고 이곳에 머물러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가나안에 있어야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모든 언약을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고 이삭에게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현실 너머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형편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을 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언약은 성취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켜주십니다.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신실한 삶을 살았기에 그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인 이삭에게도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언약의 땅 가나안을 벗어나려는 이삭의 발걸음을 붙잡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과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온라인으로 성경통독수련회를 하고 있습니다. 1월28일까지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2시간 30분 분량의 성경통독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씀을 듣고 읽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말씀 안에 거할 때, 매일 매일 주님 안에서 새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랄에 거주했습니다.

(6)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세상의 두려움에 무릎 꿇은 이삭과 하나님의 보호하심 (7-11)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블레셋 사람들에게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이 자신을 제단에 눕히고 칼을 들어 찔러 죽이려고 하는 순간에도 목숨을 구하고자 반항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누워 죽음도 불사했던 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제 살펴보았듯이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자 그는 20년 동안 하나님께 자식을 간구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려던 계획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바로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랄에 정착하는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이같은 믿음의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아내를 누이로 속였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마태복음 14장에는 예수님께서 거친 갈릴리 호수 위를 걷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신도 물위로 오라고 명령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지만 도중에 물에 빠졌습니다. 그가 물에 빠진 이유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기 때문이라고 증거합니다(마 14:30).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시선이 세상을 향하면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기도의 사람인 이삭도 시선이 하나님이 아닌 블레셋을 향했을 때, 그는 아내를 탐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혹시 죽을까 두려워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치졸한 짓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아내를 세상에 버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다윗도 시선을 세상으로 향하는 순간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고 부하를 죽이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우리 보기에는 이삭도 다윗도 모두 용서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과 리브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보게 하셨고, 아비멜렉은 이삭을 불러 자칫하면 블레셋을 죄악에 빠뜨리게 할 뻔 했다고 꾸짖고, 블레셋 백성에게 리브가를 범하지 말하고 공표합니다(8-11).

그런데 하나님은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다윗의 경우, 간음해서 낳은 아들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셨고, 쿠데타를 일으킨 아들 압살롬은 백주에 백성들 앞에서 아버지 다윗의 부인들을 범하지 않았습니까! 개인적으로 이 사건으로 이삭과 리브가의 부부관계가 비정상적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삭이 늙었을 때, 리브가는 이삭을 속이고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정상적인 부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한 한심하기 그지없는 이삭의 모습이 바로 아브라함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100년 전, 75세의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가나안으로 왔지만 기근이 닥치자 애굽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그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고 애굽의 파라오는 그녀를 데려갔습니다. 또한 창세기 20장에 의하면 70년 전에 그랄에 이주한 그는 또 다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고, 아비멜렉이 그녀를 데려갔습니다. 두 번 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아내 사라는 무사히 남편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는 이삭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자녀를 키우면서 아이들을 통해 과거의 저를 보곤 합니다. 그런데 저의 잘난 모습이 아니라 어리석고 못난 모습이 그대로 투영됨에 하나님께 무릎을 끓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지난 과거를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오늘이 소중합니다. 오늘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가 자녀가 어떤 내일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아무리 막 살았다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을 산다면 아이들은 오늘 보다는 더 희망적인 내일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자녀들에 물려주어야할 것은 허망하게 썩어 없어질 세상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복된 나날들로 가꾸어 가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의 삶이 나는 물론 자녀들의 내일을 결정짓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참으로 힘든 나날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암울한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낙담하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주옵소서.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언약의 가나안을 떠나려 하는 나약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그리고 이 사회에 바른 신앙인의 발자취를 남기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언약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본문이 100년 전 사건을 떠올리게 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2. 하나님이 이삭에게 그랄에 거주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3.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4.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 우리의 유산(遺産)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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