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창세기 27장 전반부에서는 큰아들 에서를 축복하기 위해 준비하는 이삭, 이삭의 계획을 엿듣고 작은아들 야곱이 대신 축복을 받도록 계략을 꾸미는 리브가, 형처럼 자신을 꾸며서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는 야곱이 차례로 등장하였습니다. 장자의 축복을 두고 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큰아들이 한 편이 되고, 어머니와 작은아들이 한 편이 되어, 속고 속이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이제 카메라 렌즈는 사냥을 마치고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에서에게로 향합니다.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30-36)
(30-31)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가짜 에서가 이삭을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남김없이 받고 나가자, 곧 진짜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기자는 야곱이 나가자 곧 에서가 돌아왔다고 표현합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무사히 빠져나온 야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테고,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에서는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윤리적으로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방법으로 형 에서에게 갈 축복을 가로채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는 말씀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나 연약함을 통해서도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로 우리의 죄를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처럼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롬 6:1). 다만 인간의 불완전함을 통해서도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따름입니다.
에서는 사냥해 온 짐승으로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서 아버지에게 나갑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드시고, 자신을 마음껏 축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32-33)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삭은 자신을 찾아온 에서에게 조금 전 야곱에게 했던 질문을 되풀이합니다. “너는 누구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이삭은 에서가 자신이 진짜 에서임을 밝히자 심히 크게 떨었습니다. 이삭은 “누가 너에게 가야 할 복을 가로챘냐”며 되려 에서에게 묻습니다.
이삭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야곱에게 말한 축복을 취소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장자의 축복은 신적 의지를 전제하고 있었기에 이미 선포된 축복을 무효화시키거나 저주로 바꿀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삭 입장에서는 큰아들 에서에게 빌어 준 축복을 다른 사람이 가로챘다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34-35)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슬피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청천벽력 같은 아버지의 말을 들은 에서는 소리를 지르며 슬피 울었습니다. 이삭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 빌어 준 복을 취소하거나 저주로 바꾸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기에 에서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리를 치며 울면서 다른 축복을 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삭은 그 순간에 큰아들 에서의 복을 가로챈 것이 작은아들 야곱임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자신을 속여서 에서에게 갈 복을 빼앗았다고 말합니다.
이삭을 크게 떨게 만든 실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이삭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이런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가정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가정 밖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신앙의 모범을 보이면 그 영향력이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미칩니다. 가정을 말씀의 집으로 가꾸어 가십니다.
(36)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에서는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서 자신의 복을 가로챘다는 사실에 분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야곱에게 속은 것이 이번이 두 번째라고 말합니다. 이전에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창 25:33). 그런데 그때는 야곱이 에서를 속였다기보다는 에서 자신이 당장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았습니다. 그럼에도 에서는 아버지 앞에서 그 일도 자신이 야곱에게 속은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마치 아담이 범죄 후에 여자를 비난했던 것처럼(창 3:12)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에서는 동생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를 잡다’ 또는 ‘속이다’를 의미하는데, 야곱은 태어날 때 에서의 발꿈치를 손으로 잡으며 나왔고, 또 오늘 이삭을 속여서 에서에게 갈 복을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야곱이라는 이름이 어느덧 그의 간교함과 사기성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택하신 것이 신비로울 뿐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값을 톡톡히 했습니다. 다만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이름값을 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살고 있습니까?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37-46)
(37-38)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에서가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하고 야곱은 원래 이런 놈이었다고 항변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이삭이 남김없이 야곱을 축복했기에, 에서에게 빌어 줄 복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위해서도 복을 빌어달라고 애원하지만, 이삭은 야곱이 이미 그가 빌어 준 대로 복을 받고 잘살게 될 것을 선언할 뿐입니다. 이미 좋은 것은 모두 야곱에게 빌어 주었으니 자신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큰 것을 빼앗겼는지를 새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에서는 소리를 높여 울면서 자신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의 몫을 억울하게 뺏기고 오열하며 복을 빌어달라고 애원하는 에서의 모습이 측은하게까지 보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 정도로 망령된 자(히 12:16)였기에, 오늘 그가 장자가 받을 축복을 야곱에게 빼앗기는 것도 어찌 보면 필연적입니다.
(39-40)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이삭은 이미 다 끝난 상황임에도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에서에게 복을 빌어 주는데, 그 내용은 저주에 불과했습니다. 야곱에게 빌어 준 복의 반대되는 것을 빌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에서가 ‘기름지지도 않고 비도 잘 내리지 않는 땅에서 칼을 의지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칼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은 전쟁과 전리품에 의존하는 약탈자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에서는 짐승을 사냥함으로써 살아왔는데, 앞으로 그의 후손은 사람들을 사냥함으로써 살아갈 것입니다.
또 이삭은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인데, 미래 어느 지점에서 매임을 벗을 때에야 비로소 야곱의 멍에를 떨쳐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삭의 말처럼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은 훗날 유다 왕 여호람에 대항한 반란의 결과로 유다에게서 완전히 독립합니다(왕하 8:20-22).
(41-45)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자신이 받아야 할 복을 가로챘으니 에서가 야곱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아버지 앞에서 나온 에서는 이를 갈았습니다. ‘미워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사탐’은 폭력적인 보복을 염두에 둔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분노를 뜻합니다.
에서는 아버지가 별세하면 야곱을 죽이겠다고 벼릅니다. 형제 살해를 계획하는 에서는 가인의 전철을 밟으려고 합니다. 에서는 아버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원수를 갚을 날도 멀지 않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에서의 기대와는 달리 이후 이삭은 43년을 더 삽니다.
야곱은 자신의 형인 에서의 마음에 증오를 일으키면서까지 그의 축복을 가로채서는 안 되었습니다. 야곱처럼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세속적인 가치관입니다. 야곱이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기 위해 세속적 가치관을 따른 결과는 보시는 대로 에서의 불타는 증오와 한 가정의 파괴입니다.
리브가는 에서의 복수 계획을 전해 들은 후, 야곱을 친정 오빠 라반의 집으로 도피시키기로 합니다. 에서의 분노가 사그라질 때까지 야곱을 외삼촌의 집에 머물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리브가는 에서의 마음이 안정되면 야곱에게 사람을 보내어 다시 데려오겠다고 말합니다.
리브가는 몇 날만 지나면 에서의 분노가 풀려 야곱이 에서에게 한 일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시간이 모든 상처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서의 분노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는 앞으로 계속되는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리브가가 간단하게 생각한 이 문제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46)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리브가는 이삭을 설득해서 자신이 아닌 이삭이 야곱을 라반에게 보내는 것으로 일을 꾸밉니다. 리브가는 이삭에게 가서 에서의 아내들에 대해 원성을 높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고부간의 갈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야곱도 에서와 같이 헷 사람의 딸들과 결혼할 수 있다는 우려를 말하면서,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갈 명분을 만듭니다. 이삭도 헷 족속 며느리들에 대해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터라(창 26:35) 리브가의 술수는 이번에도 통합니다.
이삭은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해 아내 리브가의 술수에 번번이 당하고, 리브가는 욕망을 위해서는 가정의 불화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속임수로 형 에서가 받아야 하는 축복을 빼앗고, 에서는 복수심에 불타서 동생 야곱을 죽이려 합니다.
이삭과 그의 가족의 모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의 본보기입니다. 축복이라는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어주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자신이 다 정해놓고 하나님은 단지 그것을 이루는 수단이나 조력자로 전락시키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이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이 아닌지 돌아보십시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천하만국에 연연하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붙잡으려 할수록, 어떤 수단과 방법도 마다하지 않게 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가 아닙니다.
삶의 자리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을 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라는 유혹 앞에 설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세상의 방법대로 편한 길로 가라고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에 순종하셨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도 눈에 보이는 천하만국과 세속적인 가치관을 바라보다가 이삭과 그의 가족처럼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지 않게 하옵소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하나님을 목적 삼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하루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가정에서 신앙의 모범을 보이며 살고 있습니까?
2.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살고 있습니까?
3.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뒤늦게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4.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믿으며, 덮어 놓은 문제는 무엇입니까?
5.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새벽기도 > 창세기(새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29:1-20 (0) | 2022.10.21 |
---|---|
창세기 28:1-22 (0) | 2022.10.21 |
창세기 27:1-29 (0) | 2022.10.05 |
창세기 26:26-35 (0) | 2022.10.05 |
창세기 26:12-25 (0) | 2022.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