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을 가던 야곱은 아무것도 둘러봐도 볼 것이 없는 빈 들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십니다. 정신없이 땅에 것만을 보며 도망쳤던 야곱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닥다리로 인하여 눈을 들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 후 그는 동방 사람의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라반의 집에 도착한 야곱(1-14)
(1-2)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히브리어 성경 1절 첫 단어의 초두에는 그리고 라는 접속사 쓰입니다. 이 접속사는 야곱이 28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 서약한 뒤 이어서 곧장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동방 사람의 땅이란 팔레스타인 동쪽 지역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즉 하란 근방을 가리킵니다. 야곱이 여행했던 가나안의 브엘세바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하란까지의 거리는 대략 700-800km나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야곱이 하루에 30-40km 정도를 걸어서 여행했다고 가정하면 그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에 도착하는 데는 대략 20-27일 정도 걸렸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성경 2절 첫 어두에는 감탄사로 쓰이는 ‘보라’ 라는 단어 웨힌네‘가 사용됩니다. 이는 우물을 발견했을 때 오랜 여행으로 심신이 지쳐 있던 야곱의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실감 나게 잘 보여 줍니다. 물이 귀한 중동지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합니다. 낯선 길을 여행하는 나그네는 한꺼번에 많은 물을 지니고 여행할 수 없기에 다음 우물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양만큼의 물만 가지고 다녔을 것입니다. 야곱의 기쁨은 단순히 우물을 발견한 것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양 떼를 발견하고 그로 인하여, 양을 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며 그러면 야곱은 자신의 목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란 큰 기대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3-4)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야곱은 목자들이 자신이 최종 목적지로 삼고 있는 하란 근방에서 만난 사람들이고 자신과 직업이 같은 목자들이었기에, 틀림없이 조상이 같은 친척이요 형제라고 생각하고 이들에게 매우 우호적이고 다정한 칭호인 ’형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란 출신의 목자들을 만난 이상 야곱은 더 이상 큰 어려움과 방황 없이 목적지 하란으로 여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벧엘에서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보호와 인도하심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하란의 목자들을 만나게 하심으로 야곱으로 하여금 목적지 하란에 도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5-6)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5절에서 특이한 사실은 야곱이 라반을 거론하면서 그의 아버지 브두엘을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할아버지 나홀을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를 추측해 보면 라반의 가족들이 하란에 살기 시작한 것이 할아버지 나홀 때 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나홀은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형제로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내 사라, 아버지 데라, 조카 롯과 더불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 그는 이 대열에 참여하지 않고 여전히 갈대아 우르 지방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후에 하란으로 이주하여 아브라함과 합류하였으나,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나아갈 때도 역시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가문을 형성하여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나홀은 북방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독립적인 가계를 이루어 아람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하란 출신 목자들에게 삼촌 라반을 아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라반을 굉장히 친숙히 알고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히브리어 동사 ‘야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곧 라반을 만날것이라는 기대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한, 목자들은 라반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 주며, 곧 그의 딸 라헬이 양을 몰고 올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었습니다. 이 대화에서도 ‘보라’라는 히브리어 감탄사가 사용되었는데, 한국어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아직 두 사람은 모르지만, 야곱과 라헬의 만남에서 감탄사를 다시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속에 얼마나 놀랍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7-8)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처음 만났을 때 분 아니라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고 할 수 있는 목자들에게 야곱은 권유의 정도를 벗어난 단호한 명령을 내리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해석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같은 직업을 가졌던 야곱의 눈에 보기에 그들이 너무 안일하고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한 멀리서 다가오는 라헬과의 대화를 방해받지 않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8절에서 목자들의 대답을 들어보면, 그들이 안일하여서 양에게 물을 먹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유목민들은 우물을 공동 소유 하며 공동 관리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개별적으로 물을 먹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정해 함께 모여 물을 먹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9-11)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장차 야곱의 아내가 될 라헬이 다가오는 장면에 이어 라헬이 도착한 후 새로운 상황이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11절은 소리와 관련된 표현과 눈물과 관련된 히브리어 표현을 모두 사용하여 야곱이 목소리를 높여 크게 울었을 뿐 아니라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매우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결코 슬픔의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고 눈물을 흘리며 운 것은 머나먼 길을 여행한 뒤에 친인척을 만난 크나큰 기쁨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 먼 길을 여행하는 동안 자신을 변함없이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2-14)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라반은 라헬을 통해 야곱이 나타났다는 너무나 뜻밖의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실제로 라반은 여동생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간 이후 대략 97년만에 리브가의 혈육을 만났기에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삼촌 라반을 만난 야곱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전부 삼촌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삼촌의 따뜻한 환대가 야곱이 지금까지 아무 곳에도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일들에 대해서 말 할 수 있게 하는 촉매제가 된 것입니다. 라반은 야곱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야곱의 이야기를 다 듣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야곱을 신뢰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말들을 들은 라반은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고 남편이 아내에게 쓰는 표현인 ‘내 혈육이로다’ 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가까운 혈족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친근하고 사랑스럽다는 뉘앙스까지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반의 모략에 빠진 야곱(15-20)
(15)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야곱이 한 달간 라반과 같이 생활한 데 이어서 라반은 야곱의 성실함과 목동으로서의 능력을 발견하고는 이제 정식으로 노동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실리 추구에 야곱을 이용하려는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라반의 제안은 표면적으로는 혈육인 야곱을 정당하게 대우해 주려는 삼촌으로서의 배려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러한 제의 가운데는 야곱을 통해 더 많은 실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라반의 속셈이 짙게 깔려 있다고 해석해 봐도 후일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과도한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라반은 이제 자신과 야곱의 관계가 더 이상 외삼촌과 생질의 관계로만 국한 되지 않고 주인과 고용인의 관계로 재정립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어 단어 ‘품삯’의 원형은 ‘고용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이 단어의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볼 때, 라반의 제의는 호의적이었다기보다는 물질적 욕심이 앞선 제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로 야곱과의 계약을 열 번이나 번복하고 속이면서 철저하게 야곱을 이용한 라반의 간교하고 탐욕스런 모습에서도 명백하게 잘 드러납니다.
(16-17)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앞절에서 라반의 고용 계약 제의에 이어서 라반이 두 딸의 이름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 두 딸이 라반과 야곱 간의 고용 계약 체결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레아는 라반의 첫 째딸인데, 그녀의 이름 뜻은 ‘일하다.애쓰다, 지치다’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이름의 뜻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레아는 딸만 둘 있는 라반 집안의 맏딸로 온갖 힘든 가사를 도맡아 한 부지런하고 성실한 여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녀는 야곱의 첫 아내가 되어 6남 1녀를 낳았으나 동생 라헬, 야곱의 두 첩 실바와 빌하 사이에서 야곱의 사랑을 잃고 마음으로 심한 갈등을 겼어야 했습니다. 17절에서는 레아의 신체적 약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력이 약하다’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약점은 레아에게는 약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이런 외적 조건이 야곱이 아내를 선택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결격 사유로 작용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라헤은 얼굴과 외모에 있어 매우 아름답고 빼어난 여성임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이런 라헬의 외적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18)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사실을 표현하여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의 감정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타는 사랑의 감정 때문에 야곱은 외삼촌에게 7년 봉사를 제의할 수 있었고, 또한 후에 이 문제에 차질이 생겨나 라헬이 아니라 레아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7년 더 봉사하는 것까지 감수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대근동에서는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를 데려가는 조건으로 신부 아버지에게 결혼 지참금을 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외삼촌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야곱은 당장에 결혼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었기에 7년간 무보수로 노동함으로써 결혼 지참금을 대신하겠노라고 약속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7년이란 세월 동안 무보수로 노동하는 것은 결혼 지참금으로서는 엄청난 비용이요 대가임에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위해 이런 수고와 대가를 서슴없이 지불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19-20)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한글 성경에서는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다른 사람보다는 야곱과 결혼하는 것이 좋다라는 느낌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원어상으로 볼 때, 본문은 라반이 야곱의 제의를 매우 좋게 생각하고 너무도 흔쾌히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 ‘토브’가 단지 감정적으로 좋다는 의미를 넘어서 도덕적으로도 선하며 모든 긍정적이고 가치가 있는 일을 가리키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라반의 대답은 ‘어는 면에서 보나 이는 좋다’라는 흔쾌한 승낙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0절에서 야곱은 라헬을 끔찍이도 사랑했기에 라헬을 위해 힘들게 노동했던 7년의 세월을 단지 며칠 전도로밖에 생각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며, 사랑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먼 거리를 헤메고 찾던 야곱이 마침내 삼촌과 아내 될 여성을 만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거짓말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는 도망을 해야 했고, 희망없이 불안에 떨며 살아가야 했었던 야곱에게 다시금 회복의 시간표가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많이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실수로 도망자처럼 여기저기를 헤매야 했던 시기가 있었고, 또한, 뜻밖에 환대를 받으며 무엇이든 잘 될 거 같은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으며, 불같은 사랑의 대상을 찾아서, 이제는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정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인생 여정을 아는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가슴 뛰는 야곱의 인생 여정이 그리 쉽지 않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어둡고 고독한 코로나의 기간을 지나면, 야곱이 경험한 것처럼 누군가의 환대를 받으며, 열렬히 사랑할 대상을 찾을 때도 찾아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도, 기한이 있고, 결국은 또 다른 때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순례자들의 숙제일 것입니다. 그 순례길을 배고픔과 허기짐을 안고 걸어가야만 하고, 때로는 도망자처럼 뛰어야 하는 우리들에게 마귀는 천하만국의 허상으로 우리의 걸음을 여행 도중 멈추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이라는 순례길에서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만을 섬기며 바라보고 완주하는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실수로 도망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시작을 경험케 하시며, 다시 안정감을 기대하며, 다시 사랑할 대상을 찾아갈 수 있는 좋은 희망의 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어려운 시간을 지나가며, 어디로 향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방황하며 살고 있는 저희들에게, 때를 잘 구분하며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게 하시고, 지금은 고통하고 아파하는 이 때가 지나보면,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한 때 였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저희의 삶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의 예배도 사모하게 하시고, 한주간의 시름과 아픔도 주님의 보좌 앞에 내려놓고 쉼을 얻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야곱처럼 목적지는 알지만, 막연히 찾아가고 있는 삶의 여정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어떻게 인도하고 삼촌 라반을 만나게 하셨는지 묵상해 봅시다.
2. 답답하고 고독한 인생의 때를 살고 있다면, 목 놓아 울 수 있고, 내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나의 영적 혈육은 없는지 점검해 봅시다.
3. 라반은 야곱을 욕망의 대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혹시 나에게도 남을 이렇게 대하고 싶은 욕망은 없는지 점검해 보시고, 삶의 목적의 대상이 하나님이신지 묵상해 봅시다.
4.라헬을 사랑한 야곱은 7년을 며칠처럼 여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어려운 현실을 돌파하게 하는 사랑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고, 그 대상이 없다면 난 지금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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