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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29장 21-35절

 창세기 29장 21-35절 
찬송가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라반에게 속은 야곱 (21-30절)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자신의 신부로 얻기 위해 야곱이 약속한 7년은 당시 혼인 계약에 필요했던 대금을 지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비용은 신랑이나 신랑의 가족이 신부의 가족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일종의 보험금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보상금은 자신의 딸이 갑자기 이혼을 당하거나, 남편이 죽을 경우를 대비하여,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지키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문서에 의하면 결혼을 위한 지참금은 일반적으로 30-40세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목자의 일 년 급여가 10세겔이었기에 아내를 얻기 위해 7년을 일한 야곱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두 배가 되는 비용을 지불한 셈이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한 가족이라고 하였지만, 남들보다도 못한 조건으로 일을 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야곱은 자신의 외삼촌 라반에게 이제 당당히 라헬을 요구합니다.

(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이 구절의 원어적인 어감을 살려 번역하면 ‘당신은 나의 여자를 주라’입니다. 야곱은 명령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외삼촌이자 장인이 되는 사람에게 이처럼 단호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라반의 다음 이야기를 보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딸을 한 남자에게 보내는 입장에 있는 라반은 이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의 최대치를 야곱으로부터 빼앗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딸을 시집을 보내면서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라반의 이 지독한 모습 때문에 야곱은 이미 상당 부분 그 마음이 상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렇게 당당하게 라헬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라반이 자신의 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또 야곱을 자신의 조카로서 아낀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끔찍한 것은 라반의 욕심이 아직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도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라반은 야곱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단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라반과 같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게 하심으로, 야곱 스스로가 많은 것을 느끼고, 그간 자신이 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기를 바라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22-24)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이 결혼식을 준비할 때부터 이미 야곱을 속일 계획을 세운 라반은 그 지역 사람들을 모두 다, 힘써 모아, 혼인 잔치를 열었습니다. 라반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의 풍습대로 정식으로 혼인을 치러 이 결혼이 법적인 효력을 갖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결혼을 하면, 야곱은 첫째 딸 레아와의 결혼을 함부로 취소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인물이 또 한 명이 있는데 그 사람은 결혼의 당사자 중 한 명인 ‘레아’입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야곱과 함께 지낸 레아는 야곱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여동생 라헬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7년이라는 계약이 왜 시작되었는지도 레아는 모두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라반은 자신의 첫째 딸을 물건을 속여 팔 듯이, 야곱을 속여 결혼시키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강요를 못 이기고, 야곱에게 가는 레아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들었겠습니까? 레아는 자신의 집에서도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레아의 이러한 불행은 안타깝게도 야곱과의 결혼 후에도 계속됩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보았을 때 레아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야곱의 잘못도 크지만 근본적으로 라반의 잘못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레아에게 작은 희망과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여종 실바였습니다. 실바는 누구보다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고, 자신과 항상 함께 하는 자신의 시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의 이야기를 보면 결국 실바도 레아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행한 레아에게 유일한 위로이자, 희망이 되어 주시는 분은 누구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나타나는 레아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그 유일한 희망과 위로의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야곱이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자신이 기다리던 둘째 딸 라헬이 아니라, 레아가 자신의 옆에 누워있었습니다. 어제 결혼식이 진행되었던 밤, 라반이 야곱의 술 취함과 신혼 방의 어두움, 신부가 얼굴에 쓰는 베일을 총동원하여 야곱을 속인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간절히 사모했던 것만큼, 또 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과 분노가 컸습니다. 이는 마치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시력이 약하다고 하여, 아버지를 속이고 에서의 복을 훔친 것을 떠오르게 하는 사건입니다. 과거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형이 느꼈을 분노를 이제 야곱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강하게 항의하며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라고 한 ‘속이다’라는 단어는 야곱이 이삭을 속일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정말이지 ‘뛰는 야곱’ 위에 ‘날으는 라반’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며,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깨닫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래도 거두리라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우리는 이 땅에서 매일 무엇을 심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의 모든 결정과 행동은 ‘죄악 된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무엇을 심는지 인간의 눈으로는 서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장차 올 마지막 때에 결국 우리 각자는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입으로만 외치는 구호가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심고, 그 열매를 얻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 나와 하나님께 부르짖는 교우님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을 따라 선한 것을 심는 분들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삶에 선하고 좋은 것을 계속해서 심는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한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야곱의 이야기를 통하여, 믿음의 사람은 결국 무엇을 심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금 설명하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26-27)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속이는 자 야곱보다 더 고단수인 라반은 야곱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이미 결혼한 첫째 딸 ‘레아’와의 결혼을 확정하는 주간인 7일을 채우고, 이를 지키면, 둘째 딸 ‘라헬’과도 결혼을 하게 할 것이니 그 대신 다시 7년을 일하라는 조건이었습니다. 라반의 이 표현으로 인하여 그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라반이 처음 야곱을 보았을 때는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라고 외치며 스스로가 인정이 많고 고상한 사람처럼 야곱에게 접근하였으나, 라반은 본래 사람보다 물질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많은 청년들을 만나고, 이들의 고민과 함께하면서, 결혼에 있어 물질적인 조건이 너무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아직 신앙이 연약한 청년들보다 이들의 부모님이 더욱더 물질적인 조건에 집착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자녀가 지금 보다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야 같은 마음이겠지만, 적지 않은 수의 부모님이 지나치리만큼 물질적인 조건에 집착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신앙으로 살아보겠다는 젊은 커플을 놓고 어떠한 조언도 할 수 없어 말문이 막힌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신앙의 고상한 말을 하여도,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결국 물질이라면 그 사람은 물질이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라반’처럼 말입니다. 귀한 믿음의 청년들이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신앙입니까? 돈입니까? 우리는 이 답을 머리로 생각하는 수준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는 어떻게 결혼해야 할까? 라는 지점에까지 고민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라반의 정체성이 결국 라반의 행동으로 드러났듯이, 우리 개개인의 정체성은 결국 우리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8-30)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라반이 제시한 조건을 야곱이 결국 받아들여, 둘째 딸 라헬도 야곱의 아내가 되었으나, 이 두 번째 결혼식은 첫 번째 레아의 결혼식처럼 사람들을 모아 성대하게 치렀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라반의 입장에서 이제 목적한 일을 이뤄졌으니, 쓸데없는 곳에 비용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라반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그가 자신의 두 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장면입니다. 결국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다시 7년을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야곱의 이러한 행동을 순수한 사랑의 모습처럼 보기도 하지만 성경은 야곱의 이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율법을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레위기 18장 18절입니다.

(레위기 18:18)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의 자매를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여 그로 질투하게 하지 말지니라

물론 야곱은 이 율법이 선언되기 이전의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법은 과거와 오늘, 영원히 다르지 않다는 점과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 이들과 동행하시며, 삶의 기준들을 알려주신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미 자신의 아내가 된 레아가 있음에도 그녀의 여동생인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더 일하는 야곱의 선택은 하나님의 기준 보다, 자신의 정욕을 따르는 선택임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선택 즉, 나쁜 것을 심는 삶의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처음 7년을 보냈을 때에는 그 시간이 “며칠”같이 지났다는 표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그 다음 7년에는 ‘며칠’과 같이 그 시간이 지나갔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이처럼 두 번째 7년은 야곱에게 힘들고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야곱은 어느덧 자신의 장인 라반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야곱의 가정 안에는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여종들 간의 긴장이 끊임없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바람과 계획과는 다른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선택의 순간에 가장 좋은 선택은 나의 욕심을 따라가는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따르는 선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지혜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만약’이라는 말처럼 무의미한 단어는 없겠으나 만약에 야곱이 라반의 두 번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첫째 딸 ‘레아’만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아내로 받아 이를 만족하고 살았으면 어떠했겠습니까? 야곱이 이미 벌어진 상황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따라 자신의 아내 된 레아에게만 집중하였다면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도 그런 것이 야곱의 말년을 괴롭힌 사건들은 하나같이 레아와 라헬을 통해 마음이 갈라진 형제들 간의 분쟁으로 벌어진 사건들이며, 이 사건들로 인하여 야곱은 늙어서까지 편히 쉬지 못하는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죄악과 야곱의 어리석은 판단 속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 자신의 뜻과 구원 역사의 계획을 흔들림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인간의 짧은 계산으로 본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이용하신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의 진행은 시간 밖에 계신 하나님의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 속에서도, 하나님 자신의 계획과 역사하심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입니다.

레아의 자녀들 (31-35절)

(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야곱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레아의 태를 여시여, 자녀를 주셨고, 라헬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아내는 레아였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끝까지 자신의 욕망에 갇혀 레아를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모습은 자신에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않는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과 실수를 외면하고 덮어버리고, 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의 아픔을 세밀히 들여 다 보셨습니다. 31절의 ‘보시고’ 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쳐다본다는 뜻과 함께 ‘이해한다’, ‘알다’라는 의미까지도 가지고 있는 단어로, 하나님께서 레아의 슬픈 상황과 형편을 자세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부르짖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지키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레아의 인생은 지금 꼬일 때로 꼬인 상황으로 출구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녀를 돌보시고, 그녀의 태를 열어 그 어려움을 푸시니 이 순간부터 레아의 인생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각자 어떠한 영역에서 연약하고 미숙하여, 실수를 범한 경험과 아픔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일수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를 외면하고,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상황을 솔직하게 아뢰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을 해야합니다. 그리하였을 때, 우리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돌보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레아가 고백하는 바, 레아는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의 괴로움을 돌보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 아들 르우벤의 이름의 뜻은 ‘보라! 아들이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보았을 때, 레아가 그간 받은 서러움이 이 아들을 통해 상당 부분 위로를 얻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아는 아직 야곱의 사랑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레아를 통하여 두 번째 아들, 시므온이 태어났습니다. 이쯤 되면, 야곱도 레아를 자신의 아내로 정식으로 인정하며, 그녀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졌어야 합니다. 하지만 야곱의 이상한 고집과 집착은 아직도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레아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야곱의 이러한 모습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자녀를 낳을 때 마다 반복되는 레아의 고백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그녀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으로 성숙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므온의 이름은 ‘듣다’, ‘주의하다’, ‘이해하다’라는 뜻을 가진 ‘쉐마’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신앙 고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름입니다.

(34)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레아가 또 임신을 하여, 세 번째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의 이름을 ‘레위’ 라고 한 것은 그 뜻으로 ‘밀착하다’, ‘결합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제 자신이 자녀는 셋이나 낳았는데, 야곱이 아무리 부정하여도 자신을 야곱의 첫째 되는 아내로 결합되어 인정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레아는 이제야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여,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스스로 달라진 상황과 위치를 얻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레아의 네 번째 아들 유다의 이름은 ‘감사하다’ ‘찬송하다’ ‘찬양하다’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야곱으로부터 줄곧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서러움을 당하던 레아는 네 명의 아들을 얻게 되자 그 기쁨과 벅찬 감격을 주체할 수 없어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 아들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의 ‘유다’로 지은 것입니다. 이런 찬양에 응답이라도 하시듯 레아는 결국 야곱으로부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아내라는 사실을 인정받습니다. 이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 야곱이 죽기 전 자신의 자녀들을 축복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49:30-31)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아브라함부터 이삭, 그리고 야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배우자를 함께 장사하는 가족 무덤에 아브라함은 사라를, 이삭을 리브가를 장사하였고, 야곱은 그곳에 레아를 장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레아에게 허락하신 상징적인 은혜였으며, 결국 야곱도, 자신의 잘못된 결정을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뜻에 순복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오늘 나의 삶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망가져 버린 것과 같은 절망 속에서 괴로워하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우리의 문제를 기억해주시고, 마지막에 결국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주님 밖에 없으시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붙들고 부르짖을 때, 우리가 최종적으로 거할 자리는 사망과 괴로움, 고통의 자리가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모든 가족들이 함께 뛰노는 영원한 천국, 안식의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의 눈물과 서러움을 기쁨과 찬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서러움과 아픔, 눈물을
기쁨과 찬양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매일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내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세상은 삼촌 라반과 같이 온갖 교활한 술수들을 가지고,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그 때 마다 유혹에 빠져, 술취하고 방탕한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깨어 하나님을 부르짖음으로,
우리의 매일이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따라가는 삶 되게 해 주옵소서.
그 결과 우리의 마지막 자리가, 슬픔과 원망, 부끄러움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며,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누리를 기쁨의 자리게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기존에 알고 있던 야곱과 두 아내의 이야기와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 확인해 본 이야기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2. 내가 야곱이라면 두 번에 걸친 7년간의 종살이에 응하였을까요?
3. 야곱과 같이 나의 실수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덮어버리려고 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4. 레아와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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