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레아와 라헬의 경쟁(1-13절)
앞서 29장에서 언니 레아는 르우벤을 포함하여 아들 넷을 낳았습니다. 사실 야곱은 동생 라헬을 더 사랑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레아의 마음을 살펴주시고 그에게 아들을 먼저 허락해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이 여성의 수치가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분명 남편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니만 아들을 낳게 되자 그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게 됩니다.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여기서 죽겠노라는 표현을 직역하자면 ‘자식을 낳지 못하는 나는 이미 죽었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언니와 자식 낳기 경쟁에서 실패했고 이 때문에 남편의 사랑도 빼앗기고 언약 후손의 어머니가 되는 특권도 상실하게 될 것 같자 절박한 마음에 이런말을 했던 것 입니다. 그러나 라헬이 한가지 간과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태의 문을 여시고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 입니다.
(2)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은 라헬이 임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에게가 아닌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야곱이 라헬의 불신앙을 질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성을 내어’라는 뜻은 극렬한 분노를 의미합니다. 야곱 역시 차분하게 아내를 말씀으로 교훈하기보다 이성을 잃고 불길과 같은 화를 내며 역정을 냈던 것입니다.
(3-5)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이제 라헬은 남편에게 빌하와 관계를 맺을 것을 명령조로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다’라는 말 속에 그녀가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기보다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어머니로서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욕심이 얼마나 강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치기어린 아내의 요구에 야곱이 순순히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즉 2절에서 그가 했던 말이 그저 분노에서 표출된 무의미한 언쟁에 불과했음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성숙한 신앙인이었다면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6-8)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라헬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얻게 되자 하나님이 자신의 호소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언뜻 들으면 그럴싸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칙을 사용하여 아들을 얻었음에도 라헬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고 자평합니다. 과연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경쟁을 해야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지, 과연 라헬이 언니를 이긴 것이 맞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8절에서 ‘경쟁하다’라는 말의 원문 뜻은 ‘격투하다’, ‘뒤틀리다’입니다. 그러니 라헬이 얼마나 극심하게 뒤틀린 감정으로 이 일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드러내려고 애씁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성숙한 신앙인의 관점에서는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9-13)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라헬이 언니를 이겼다고 자랑하자 이제는 레아가 쓴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미 네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 숫자는 라헬의 그것보다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라헬이 만들어 놓은 경쟁구도에 참여하여 라헬이 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아들을 얻으려 합니다. 라헬은 나름대로 계획을 갖고 빌하를 야곱에게 주었던 반면 레아는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데려다가’라는 말은 4절에서 라헬에게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즉 레아가 동생의 도발에 의해 충동적으로 이 일을 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지 성경기자는 이들의 출산 경쟁을 속도감 있게 기록합니다. 보통은 임신하여 출산하였다고 기록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얼마나 치열했던지 9절에서부터는 아예 낳았다는 기록만 남깁니다. 이와 더불어 안타까운 사실은 복되고 은혜로워야할 새생명의 탄생 과정이 왜곡되고 변질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여자사이에 야곱은 이렇다할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으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의 모든 욕망으로 진행되는 역사조차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선하게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두 아내의 왜곡된 출산 경쟁은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로서 상당히 실망스러운 가정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야곱의 가정위에 임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이 가정에서 이스라엘을 이루는 12지파가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든 교우님들에게도, 나의 나된 것은 내가 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임을 매순간 기억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신지라(14-24절)
(14-16)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합환채는 뿌리는 인삼같고 꽃은 향기로우며 작은 귤 크기의 열매를 내는 아담함 크기의 식물입니다. 과거 사람들은 이 합환채를 사랑의 묘약 내지 임신 촉진제로 인식했었습니다. 레아는 합환채를 써서라도 아들을 얻고 싶은 라헬의 요구에 자신은 남편을 빼앗겼다고 말합니다. 분명 합환채가 필요한 사람은 이미 아들을 얻은 레아가 아닌, 아들을 낳지 못한 라헬입니다. 그럼에도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때문에 동생을 향해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17-21)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아내라면 자연스럽게 누려야할 남편의 사랑을, 레아는 합환채를 주고 얻습니다. 왜곡되기 그지 없는 부부관계이지만,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가 다시한번 레아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레아는 계속해서 아들을 낳았고 그것은 그녀의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합환채를 사용한 라헬은 우울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그녀는 아들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태의 문을 열려면 오직 하나의 방법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2-24)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라헬의 부끄러움을 씻을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빌하를 통해서 아들을 구한 것이 그녀에게 실상 의미가 없었음은 그것은 자신이 낳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22절의 ‘생각하신지라’는 가볍게 회상하는 정도가 아닌 깊이 통촉하시고 친히 돌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이 합환채로도 할 수 없었던 일, 즉 그녀의 부끄러움을 씻고 언약 백성의 어머니로서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가정이 보여준 출산 경쟁 속에는 하나님의 방법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과 축복으로 가득해야 할 새생명의 탄생이 인간적인 방법과 시기와 질투로 얼룩져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정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부어주셨으며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베푸실 그 하나님을 눈을 들어 바라보는 오늘 하루가 되십시다. 전심으로 부르짖으며 주님을 찾고, 날마다 변개함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던 시편의 시인들처럼, 우리 안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성숙한 신앙이 자라나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인생을 사시는 우리 모든 100주년기념교회 교우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 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새벽에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시작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되게 하시고 인간적인 방법과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마음들이 제거되어지는 은혜를 허락하옵소서. 오직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분 뿐인 줄 믿습니다. 우리 가정의 필요와 소원을 잘아시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 빵의 논리가 아닌 주님의 방법과 섭리를 따라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아름답고 복된 인생을 살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오늘 하루되게 하실 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가정 안에 편애는 늘 불화를 낳기 마련입니다. 편애를 했던 경험과 이유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2.나의 욕심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화시켜본 경험이 있습니까? 있다면 반성해봅시다.
3.인생의 큰 벽을 만난 구체적인 사례가 있습니까? 그것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습니까?
4.눈을 들어 주님만 바라보며 그분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하기 위해 어떤 결단을 내리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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