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458장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유다와 다말 vs. 시아버지와 며느리(1-11절)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후에
‘형제들이 요셉을 미디인 상인들에게 판 후에’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37-50장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38장은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37장의 마지막이 요셉을 사간 미디안 상인들이 그를 애굽에서 바로왕의 친위대장(경호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9장은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37장에서 39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38장은 연극의 ‘막간극(interlude)’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굉장히 민망합니다. 사실 이런 내용이 성경에 있는 것이 빨리 이해가 되지 않고, 성경에 없었더라면 훨씬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창세기 37장과 39장 사이에는 상당한 세월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다른 이야기를 넣는다면 38장이 가장 적절한 곳이기 때문에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37장부터 50장까지가 주로 요셉의 이야기이지만, 그것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은 37장부터 50장까지는 37:2(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즉 37장부터는 ‘야곱의 족보’ 이야기입니다. 36장이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족보’ 이야기였으니까, 이제는 동생 ‘야곱의 족보’ 이야기가 길게 전개됩니다. 야곱에게는 요셉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13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그래서 38장은 넷째 아들 유다의 족보 이야기입니다. 또 46장에 가면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 가족 70명의 명단이 나옵니다.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그 후에’는 ‘형제들이 요셉을 미디인 상인들에게 판 후에’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점이 아니라 선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전 행동의 결과는 반드시 이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가 팔았는데, 그런 일을 하고 나니까 그들의 마음에도 큰 구덩이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구덩이는 잘 매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다른 형제를 떠나는 것을 택했습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마음에 있는 메우지 못한 구덩이로 인해서 인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그때 조심해야 하고, 지혜롭게 메워야 합니다.
헤브론에 살던 유다가 아둘람에 살던 히라를 찾아갔습니다. 아둘람은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약 24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습니다. 유다 지파인 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에서 도망을 다닐 때, 아둘람에 있는 굴에 피하기도 했습니다.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유다는 ‘수아라 하는 사람의 딸’과 동침을 했다고 합니다. ‘데리고 동침하다’가 한 단어인데,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주된 것은 ‘강제로 빼앗다’입니다. 유다는 수아 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거의 반강제적으로 결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동기가 ‘딸을 보고’입니다. 유다가 그 마음의 구덩이를 메우지 못한 상태로 ‘안목의 정욕’에 빠진 것입니다.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표면적으로는 유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신이 자신의 삶을 방치하고, 정욕에 사로잡히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유다가 결혼한 ‘수아의 딸’은 가나안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위해서 가나안 사람과 결혼시키지 않기 위해서 늙은 종을 고향으로 보냈고, 이삭도 야곱에게 ‘가나안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고 했는데, 유다는 아예 제 발로 자기가 찾아가서 가나인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유다는 장남이 태어나자, 그의 이름을 ‘엘’이라 지었습니다. ‘엘’은 ‘파수꾼’ 또는 ‘깨어있다’의 뜻입니다. 유다는 아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면 좋겠고, 자신도 영적으로 깨어 있는 파수꾼과 같은 삶을 진실로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생각하는 나’가 ‘내’가 아니라 ‘사는 나’가 ‘내’입니다. 즉 사는 모습, 사는 태도, 사는 행동이 자기 실력입니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공부를 잘하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의 시작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유다의 아내는 둘째와 셋째를 출산했습니다.
(4-5)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둘째의 이름은 ‘오난’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뜻은 ‘강한, 힘쎈’입니다. 유다는 자기 아들이 강한 사람, 영향력이 큰 사람이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의 이름을 ‘셀라’라고 했는데, ‘청원, 요구’라는 뜻입니다. 수아의 딸은 남편 유다가 자기를 가까이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공교롭게도, 셋째가 태어날 때 유다는 집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거십(악십)’에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그 뜻이 ‘속이는, 실망하게 하는’입니다. 유다의 삶이 아내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가 세상적인 재미에 빠져 있느라, 셋째가 태어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세월이 흘러, 장남 엘이 결혼할 때가 되었습니다.
(6-7)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는 며느리, 엘의 아내를 데려왔는데, 그 이름이 ‘다말’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다말이 2명 더 나오는데, 다윗의 딸과 압살롬의 딸입니다. 성경은 그 두 사람이 모두 아름다웠다고 전합니다. 유다가 며느리를 보고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하지만 그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아들 엘이 죽고 말았습니다. 엘이 병사했는지, 사고사를 당했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그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당한 원인은 분명히 밝힙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함으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죽음을 막아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엘의 삶이 사람들 보기에는 악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유다는 둘째 오난에게 형수와 결혼해서 시동생의 의무를 다하라고 말했습니다. 형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때에,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서 형의 가문을 이어주는 것을 ‘형사취수법(兄死取嫂法)’이라 하기도 하고, ‘수혼법(嫂婚法, levirate marriage)’이라 하기도 하며, ‘계대결혼법(繼代結婚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고대에는 여성의 인권이 아주 낮았습니다. 그래서 여성 혼자서는 먹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있으면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계대결혼법은 당시 여성을 보호하는 사회 장치였습니다. 이렇게 대신 결혼해 주는 사람을 ‘고엘(구속자, 속량자)’이라고 불렀는데, 그 사람을 굉장히 존경했습니다. 반면에 고엘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때는 신을 벗어서 거부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집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르며 천시했습니다.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오난은 ‘고엘’의 역할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말과 동침할 때마다 임신이 되지 않게 하려고 사정(射精)을 땅바닥에 했습니다. 오난은 재산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자는 다른 형제보다 상속을 많이 받았습니다. 엘이 아들이 없다면, 장자권은 자신에게 넘어옵니다. 그러나 다말이 자신을 통해서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에게 장자권이 넘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하나님께서는 오난의 죽음도 막아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난이 겉으로는 형수와 계대결혼했기에 표면적으로는 율법(말씀)을 따른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정욕을 따랐습니다. 그가 사람을 속일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겉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속도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이르자 유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만약 남은 ‘셀라’가 마저 죽으면 자기 집안에 대가 끊기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말에게 친정에 가 있도록 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셀라가 좀 더 자라서 결혼할 때가 되면 혼인을 시켜 주겠다고 핑계를 대었습니다.
유다와 다말 vs. 남편과 아내(12-18절)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얼마(많은 세월) 후에’ 유다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 세월이 다른 사람에게는 ‘얼마 후에’로 여겨질지는 모르겠지만, 다말에게는 하루하루가 간절한 기다림과 고통의 세월이었을 것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혹시 시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마음이 굉장히 공허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주변에 가족들과 좋은 사람들이 있어야 잘 견딜 수 있습니다. 유다는 곡하는 기간이 지나자 친구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갔습니다. ‘딤나’는 어디입니까? 거기는 ‘며느리 다말의 친정’이 있는 곳임에도 유다는 며느리를 찾아볼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는 참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삶을 살았습니다.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누군가가 다말에게 시아버지가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양털을 깎는 때’는 농사의 ‘추수 때’와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직접 들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들으면 듣고 나서도 마음이 참 편하지 않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가 셀라와 혼인을 시켜 줄 마음이 없는 것을 알고, 자식을 갖기 위한 비상책을 강구했습니다. 그래서 매춘부의 복장을 하고 나왔는데, 유다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객지로 온 유다는 그가 며느리인 줄도 모르고 매춘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감추어진다고 생각하면, 마음과 행동이 흐트러지기 쉽습니다. 해외에서 도박이나 매매춘이 많이 이루어지는 것은 거기에서는 자신이 감추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자신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감추어질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감추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유다는 염소 새끼를 화대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사사기 15:1에도 보면 삼손이 아내를 찾으러 갈 때 염소 새끼를 갖고 갔습니다.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을 팔고, 요셉의 옷에 묻힌 피가 염소 피였습니다. 염소 피로 아버지를 속였는데, 자신도 염소 때문에 구렁텅이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말은 어린 염소보다도 ‘담보물’이 더 필요했습니다. 자신이 임신하게 되면,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밝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다말은 유다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도장(인감)과 유다의 지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담보물로 받았습니다. 당시 끈으로 도장을 묶어서 목에 매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다말은 유다와의 단 한 번의 관계로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다루어지지 않는 인생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샘플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형편없는 유다의 계보를 타고 오셔서 우리의 영원한 고엘(구속자)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오늘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하나님께 다루어지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유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다루어지지 않는 삶이 얼마나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림언어로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다의 무책임함, 유다의 방황, 유다의 하나님 없는 삶이 우리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떨어지지 않는 긍휼의 사랑과 다함이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주님의 족보에 우리를 넣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라옵나니 오늘은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어 쉬는 동안 우리의 영원한 고엘, 구속자가 되시는 주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과 믿음이 날마다 성숙하고 깊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유다는 동생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판 후에, 형제들로부터도 떠나서 공허한 삶을 살았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삶을 살았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그리고 언제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까?
2. 유다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은 사람 보기에는 아니었을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행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지금 돌이켜야 하는 부분은 무엇이었습니까?
3. 유다와 다말의 올바르지 못하게 행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예수님의 족보에 넣어 주시는 은총, 영원한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베푸신 가장 큰 사랑은 무엇이었습니까?
4.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드는 삶,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 하나님께 다루어지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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