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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38:19-30

 창세기 38:19-30 


찬송가 299장 ‘하나님 사랑은’

창세기 38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통로를 통해 이 세상에 오셨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오신 통로이기에 거룩함의 역사여야 할 것 같은 38장은 반대로 민망하고 추잡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계보가 거룩함의 역사가 아닌 은혜의 역사임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뒤 죄의 늪으로 점차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사람 히라와 벗하고,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고, 가나안 여자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며 창녀와 동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언약 가문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유다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돌이켜 회개했음을 증거합니다.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여기서 그는 다말을 가리킵니다. 앞선 14절에서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과 몸을 가렸던 다말이 19절에서는 반대로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었습니다. 이는 앞에서 온 몸을 너울로 덮은 채 다말이 펼쳤던 시아버지의 씨를 받는 일이 종결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다말이 창녀로 위장하면서까지 성을 수단삼아 유다를 대해야했음은 유다의 평소 행실을 보여줍니다. 이방 며느리 다말의 눈에 히브리 신앙인 유다는 권위주의적이고, 소통이 되지 않고, 여색을 밝히는 사람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직장 동료, 가족, 이웃의 눈에 어떻게 비치고 있습니까?

유다의 책임 회피(20-23절)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유다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창녀와의 약속을 지키려했습니다. 며느리와의 약속은 십 수 년 동안 모르쇠로 일관하던 유다가 창녀와의 약속은 즉각 지키려 했습니다. 이는 유다의 자기중심성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자신의 지팡이와 끈 달린 도장을 찾기 위해서 즉각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 셀라는 내어주지 않으려고 다말을 방치했습니다. 유다의 판단 기준에는 타인이 없고, 오로지 자기 상황과 체면만 있었습니다.

게다가 유다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 곧 창녀에게 염소 새끼를 갖다 주는 부끄러운 일은 자신의 벗, 히라를 시켰습니다. 유다는 뒤에서 조종하며 부끄러운 일은 남에게 시키고, 자기 체면은 챙기는 기회주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히라가 창녀를 찾지 못한 것을 21-22절이 상술하고 있습니다.

(21-22)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히라는 유다의 부탁대로 아둘람에서 에나임을 오가며 창녀를 찾으려 했지만 결국 그 여자를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유다에게 전했습니다. 유다가 히라의 수고에 감사의 반응을 보여야 할 것 같지만 그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23)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감사하기는커녕 히라를 탓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와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두 어구 사이에는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히브리어 단어 ‘힌네’가 쓰였습니다. 힌네는 ‘보라’라는 뜻으로 주의를 환기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유다 자신은 염소 새끼를 보냄으로 책임을 다했지만 히라가 창녀를 찾지 못해서 일이 마무리 되지 못한 것이라며 히라를 탓했습니다.

이처럼 유다는 자기 체면을 위해 남 탓했습니다. 유다는 자기 방어와 자기 정당화로 죄를 가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죄를 가리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질 뿐이었습니다.

유다의 죄 폭로와 회개(24-26절)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유다는 다말의 임신 소식을 들었습니다. 며느리의 친정 지역에 방문했을 때에도 며느리는 안중에 두지 않았던 유다가 며느리의 죄 소식에 대해서는 즉각 반응하며 맹렬한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다말을 비판할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유다 자신도 행음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엄격한 죄인의 전형적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런 모습에 대해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간음죄는 투석형으로 처벌했기에 다말은 죽을 운명이었지만 유다는 불충분하다 여겨 최고 극형인 화형을 명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저지른 사람일수록 부끄러움 당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합니다. 깊은 죄의식 가운데 발작적으로 분노했던 유다처럼 불같이 분노하는 사람 안에는 해결되지 않은 심각한 죄가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발작적 분노의 버릇은 죄가 해결되어야 사라집니다.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다말은 유다의 신분을 밝힐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물인 끈 달린 도장과 지팡이를 확보해놓았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화형 당하러 끌려나가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사람을 보내어 침착하고도 정확하게 시아버지에게 의사를 표했습니다.

이제 은혜의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유다의 죄가 폭로된 것입니다. 다말의 호소 중 ‘청하건대 보소서’로 번역된 원어 ‘학케르-나’는 ‘심사숙고하다’는 뜻의 동사 ‘나카르’와 부드럽고도 신중하게 요청할 때 쓰이는 불변화사 ‘나’가 합쳐진 말로 “제발 당신은 잘 살펴보십시오.”라는 뜻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학케르-나’는 앞선 37장에서 유다가 형제들과 함께 요셉 옷에 염소 피를 묻혀 아버지 야곱을 속일 때 썼던 말입니다. 창세기 37장 32절 하반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유다가 자기 죄를 은폐하기 위해 ‘학케르-나’라고 외쳤을 때는 죄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그러나 다말이 ‘학케르-나’라고 외치며 죄를 폭로했을 때, 유다를 얽매고 있던 죄의 고리가 끊어졌습니다.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드디어 유다의 입에서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며 자기 죄를 인정하는 탄식의 고백이 터졌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죄는 은폐하고, 남의 죄는 크게 여기며 발작적으로 분노하던 유다가 자기 죄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자기 죄를 인정한 장소는 밀실이 아닌 공개된 곳이었습니다. 자기 명에 따라 며느리 다말을 처단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습니다. 자기 체면을 그토록 중시하던 유다가 공개된 장소에서도 자기 죄를 인정할 수 있었음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죄를 실토했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셀라를 며느리 다말에게 주기로 약속해놓고, 그녀를 방치함으로 계대결혼법을 지키지 않았음을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유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신의 죄를 민낯 그대로 인정하고 솔직하게 고백했을 때 비로소 죄의 고리가 끊어졌습니다. 그토록 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유다가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고백했을 때 타락에서 회복국면으로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말씀처럼 회개한 유다는 다시는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정욕에 이끌리지 않고, 은혜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계대결혼이 근친상간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지켰습니다. 그렇게 죄의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자 유다 가문에 새 생명이 싹텄습니다.

베레스와 세라의 출생(27-30절)

(27-30)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조부 이삭이 쌍둥이를 낳았듯이 손자 유다도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산파에게는 장자를 구분해야할 책임이 있었기에 산파는 손을 내민 첫째의 손에 홍색 실을 맸습니다.

그런데 홍색 실을 손에 맸던 첫째가 손을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그러고는 둘째가 첫째를 제치고 터뜨리듯 먼저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를 터뜨림, 돌파라는 뜻에서 ‘베레스’라 이름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빛남’, 떠오름’이라는 뜻의 ‘세라’가 탄생했습니다.

성경은 베레스를 장자로 인정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유다에서 베레스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1-3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분명 베레스는 유다와 다말의 불륜을 통해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되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무리 불륜의 핏줄이더라도 영광과 축복의 핏줄로 바꾸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도 죄인의 핏줄로 태어나 영멸을 기다렸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유다 가문이 받은 은혜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했습니다.

창세기 38장은 예수님이 어디까지 찾아오실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분명 유다의 삶의 자리는 추잡하고 어지러웠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폭로된 자기 죄에 직면했을 때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잘못을 시인하는 순간 모든 죄의 고리가 끊어지고 회복이 시작됐습니다.

우리의 죄도 폭로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모친 마리아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앞서 유다가 ‘보소서’를 뜻하는 ‘학케르-나’라며 자기 죄를 은폐했을 때는 죄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말이 ‘보소서’를 뜻하는 ‘학케르-나’라며 죄를 폭로했을 때는 유다의 인정과 함께 죄가 해결됐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보소서’라며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참상을 모친 앞에, 세상 앞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죄의 참상이 ‘보소서’라며 온 천하에 폭로되었습니다. 그러나 폭로된 그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목숨이 끊어짐과 함께 끊어져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다룸 받기보다 하나님을 다루고 싶어 하며 우리 마음대로 삶을 어지럽히고 망가뜨렸지만 주님은 우리를 마다하지 않고 선택하사 찾아오셨습니다. 성령께서 ‘보소서’를 뜻하는 ‘학케르-나’라며 우리 안에 숨은 죄를 조명하실 때 ‘하나님이 나보다 옳도다’라고 인정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고이지 않고 흘러가는 은혜의 특성상 은혜 입은 자는 반드시 은혜 베푸는 자로 살아갑니다. 유다처럼 타인에게 화형을 명하는 정죄와 심판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도 신앙인인 우리가 서야할 자리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유다 같이 추잡한 세상을 십자가로 대하셨습니다. 먼저 은혜 입은 우리도 주님을 따라 은혜로 세상을 대하십시다. 유다와 다말을 품어주실 정도로 깊으신 하나님의 사랑, 나를 품어주실 정도로 넓으신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품어주실 정도로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오늘 한 날도 은혜 입은 자답게 은혜를 베풀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은혜의 하나님, 우리를 죄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죄를 직면시켜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았음에도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는 발작적으로 분노했던 유다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아침, ‘학케르-나’라며 우리의 부패한 심령이 조명되었을 때 더 이상 숨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인정하여 죄의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먼저 은혜 입은 자로서 이 세상에 은혜를 베풀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은혜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방인 며느리 다말의 눈에 비친 히브리 신앙인 유다의 모습은 창녀로 위장해야만 소통이 가능했던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장 동료, 가족 등 주변 사람들에게 신앙인인 내 모습은 어떻게 비치고 있습니까?
2. 부끄러운 일을 행한 사람은 부끄러움 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화형을 명했던 유다처럼 내 안에 해결되지 않은 깊은 죄 때문에 주변 사람에게 분노, 책임 전가 등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3. 예수님은 유다의 어지러운 삶의 자리에 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죄보다 더 큰 은혜를 의지하여 해결하지 못한 죄의 자리를 주님께 고백해 보십시오.
4. 진정 은혜 입은 자는 은혜 베푸는 자로 살아갑니다. 오늘 하루 은혜의 하나님께 눈을 들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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