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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37:18-36

 창세기 37:18-36 

찬송가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였습니다. 분노한 형을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한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이런 과거가 있기에 자신이 부모가 되어서는 편애의 악순환을 끊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이 낳은 아들인 요셉을 편애하므로 어머니의 길을 따라갑니다. 그가 요셉에게 입힌 채색옷은 다른 아들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아들들의 시기와 질투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향한 야곱의 편애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곱은 다른 아들들이 양을 치고 있는 세겜으로 요셉을 보냅니다. 요셉은 세겜에서 형들을 찾을 수 없었는데, 세겜 들판에서 만난 사람의 도움으로 형들이 도단에 간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요셉은 형들이 있는 도단으로 향합니다.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18-24)

(18-19)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먼발치에서 요셉이 오고 있는 것을 본 형들은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비아냥거리며 요셉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형들을 보기 위해 100km가 넘는 거리를 찾아온 동생이 반가울 만도 한데 형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꿈 꾸는 자’로 번역한 히브리어 원문의 문자적 의미는 ‘꿈들의 주인’이라는 뜻이며, 이 말은 형들의 상한 감정을 잘 드러내 줍니다. 형들은 요셉이 아버지에게 자신들을 고자질한 것(창 37:2)과 자신들보다 아버지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것(창 37:4)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요셉의 꿈(창 37: 6-10) 이야기 때문에 많이 화가 났습니다. 요셉을 ‘고자질하는 자’나 ‘편애받는 자’라고 부르지 않고, ‘꿈 꾸는 자’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형들은 어떻게 멀리서 그들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요셉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당연히 요셉이 입고 있는 채색옷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옷은 먼발치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특이했습니다.
결국 야곱이 특별한 애정의 표현으로 요셉에게 만들어 준 채색옷은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만약 요셉의 정체가 먼발치에서 발각되지 않았다면 형들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밀 겨를이 없어 그를 내버려 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채색옷은 요셉을 향한 야곱의 편애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특별한 사랑을 담아서 지어 입힌 채색옷이 결과적으로 요셉의 생명을 위협하였습니다.
우리도 혹시 야곱처럼 누군가를 편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모 중에 어느 한 분, 혹은 자녀 중에 어느 한 명에게만 치우쳐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편애하는 대상에게 지어 입힌 채색옷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형들의 음모는 이러했습니다. 요셉을 죽여서 시체를 구덩이에 던지고, 아버지에게는 험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고 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을 죽여서 그가 꾼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보자고 말합니다. 요셉이 꾼 꿈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형들이 요셉을 죽여서라도 방해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요셉의 꿈입니다.
요셉의 꿈은 형들을 포함한 온 집안의 사람이 요셉을 섬길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레아 혹은 첩의 아들이기에 라헬의 아들인 요셉과 달리 아버지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고 있던 형들은 훗날에도 동생인 자신을 섬길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고 떠들고 다니는 요셉이 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자신들이 요셉을 죽이면 그가 꾼 꿈이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를 죽이기로 합니다.
만약 요셉의 꿈이 자신의 욕망이나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형들의 계획은 결국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꿈이 하나님이 꾸게 하신 거라면 형들의 계획은 성공할 리가 없습니다. ‘엘 샤다이’ 즉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요셉의 꿈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꿈은 나의 욕망이나 야망에서 비롯된 꿈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입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21-22)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다행히 맏형 르우벤은 요셉을 생각하여 그를 구하고자 합니다. 요셉을 살려 아버지 야곱에게 보낼 계획으로 다른 형제들에게 요셉을 죽이지 말고 산 채로 구덩이에 던지자고 제안합니다. 요셉이 산 채로 구덩이에 들어가도 체온 저하나 굶주림, 혹은 탈수 증세 등으로 스스로 죽을 수 있음을 믿게 하는 전략입니다.
르우벤 입장에서는 요셉을 탈출시킬 시간을 벌면서, 동시에 형제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좋은 전략이었습니다. 또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손으로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고 스스로 위안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지 않는 목초지를 말합니다. 요셉이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를 내도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곳이기에 형제들에게 더욱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한편 그러한 곳이기에 형제들의 눈을 피해 요셉을 빼돌리기에도 좋은 곳이었습니다.
‘구덩이’는 우기에 빗물을 모았다가 건기에 사람과 짐승이 마실 수 있게 하는 물 저장 탱크를 말합니다. 석회석을 파낸 웅덩이 혹은 땅을 파내고 물이 새지 않도록 안쪽에 석회나 진흙을 바르는 형태입니다. 작은 것은 깊이가 2미터, 큰 것은 깊이가 8미터에 달했습니다. 물이 없을 때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완전히 마르지 않은 깊은 웅덩이는 진흙 수렁으로 인해 갇혀 있는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었습니다(렘 38:6).
요셉이 목초지에 있는 구덩이에 던져진다면 자기 힘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형제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자리를 뜨면 은밀히 구덩이로 돌아와서 요셉을 끌어올려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려고 계획합니다.
맏형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첩이자 단과 납달리의 어머니인 빌하와 동침하여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이 문제 이후 그는 야곱의 눈 밖에 났음은 물론 형제들 사이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요셉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는 맏형으로써 역할을 충실히 합니다.
만약 르우벤의 계획이 성공하여 요셉을 야곱에게 돌려보냈다면 형제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르우벤이 형제들의 계획을 망치고 그들의 악행을 좌절시킨다면, 요셉을 미워하는 것만큼 르우벤을 미워하지 않았겠습니까? 르우벤 역시 형제들에게 복수의 대상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르우벤은 요셉을 살리기 위해 모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합니다.
군중심리 속에 모두가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할 때, 그것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평정심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론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관에 경도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오늘 르우벤의 모습입니다.

(23-2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형제들은 맏형 르우벤의 제안을 따르기로 하고, 요셉이 오자 그의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눈꼴 사나웠던 요셉의 채색옷을 드디어 벗겨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채색옷이 벗겨진 상태로 구덩이에 던져졌기에 체온 저하, 굶주림, 탈수 증세로 죽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성경 기자는 이 구덩이가 비어 있었고, 그 속에 물이 없었다고 설명하므로 요셉이 구덩이 속에서 진흙 수렁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지는 않았음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한편 구덩이에 물이 없었다는 것은 위에서 물을 내려 주지 않으면 탈수 증세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구덩이에 물이 없어서 살았지만, 또 물이 없어서 죽게 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물 없는 구덩이에 홀로 갇힘으로써 최고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당장 형들의 손에 죽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어떤 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는 오랜 시간에 거쳐 매우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입니다.

보디발에게 팔았더라(25-36)

(25-28)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요셉을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 던져 놓고, 형들은 태연히 앉아서 음식을 먹습니다. 형들의 이런 모습은 그들이 요셉에게 한 행동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형들의 식사 자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다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마엘 상인들의 행렬을 봅니다. 상인들은 길르앗에서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요셉을 죽이느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자고 제안합니다. 그는 요셉은 우리의 동생이고 혈육이기에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요셉이 자신들의 동생이고 혈육이니 죽이는 것은 안 되지만, 상인들에게 노예로 파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가 막힙니다. 그저 한 가지 악이 다른 악을 대체했을 뿐입니다. 유다가 조금이라도 요셉을 자신의 동생이자 혈육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런 제안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유다의 제안을 따르기로 하였고, 요셉을 ‘은 이십’에 상인들에게 팝니다.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고대 근동의 자료를 보면, ‘은 이십’은 당시 남자 노예의 평균 가격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던 요셉이 졸지에 상인들의 노예가 되어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한편 성경 기자는 요셉을 노예로 산 상인들을 이스마엘 사람이라고 했다가 또 미디안 사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이스마엘 사람과 미디안 사람이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고 추측할 수 있으며, 상인의 무리에는 이들이 섞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9-30)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르우벤이 구덩이가 빈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는 것은 상인들과 형제들의 거래가 있을 때 그가 그 자리에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르우벤은 형제들 몰래 요셉을 살려주려고 했는데, 요셉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그 자리에 없었던 것입니다.
구덩이에 요셉이 없는 것을 보고, 르우벤은 옷을 찢으며 괴로워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슬픔과 고통을 참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그는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라고 탄식합니다. 이것은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혹은 ‘어디로 가면 그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의미입니다. 르우벤은 이 일로 인해 평생을 괴로워합니다(창 42:22).

(31-32)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입혀 준 채색옷은 요셉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형들만 있는 도단까지 채색옷을 입고 간 것은 성난 황소 앞에서 붉은 기를 흔드는 것과 같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숫염소를 죽이고, 그 피로 채색옷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그 옷을 아버지 야곱에게 보내며, ‘아버지 아들의 옷’인지 확인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아들의 옷’이라는 말에는 요셉을 자신들의 형제로 인정하지 않는 형들의 마음이 잘 녹아 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의 죽음을 직접 통보하기보다 야곱에게 물증을 보여주고, 야곱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과거에는 남을 속이는 일에 능숙하였던 야곱이 이제는 무력하게 당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의 아들들이 오래전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일 때 사용했던 염소를 사용하여 그를 속입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였고, 형 에서를 속였습니다. 꾀가 많고 눈치가 빨라서 누구에게도 속지 않을 것 같았던 그도 삼촌 라반에게 속았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속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속고 속이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노예가 되어 타인을 속이는 일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합니다. 뒤이어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에게 배운 것이 성경 말씀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속고 속이는 악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 삼아야 합니다. 그보다 더 나은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이정표가 되고, 진리의 길잡이가 됩니다.

(33-35)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야곱은 요셉의 채색옷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요셉이 험악한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옷을 찢으며 애통했습니다. 사실 험악한 짐승이 아니라 험악한 형들이 꾸며낸 일임을 야곱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요셉을 위하여 애통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떠난 보낸 아버지의 깊은 슬픔이 잘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고 아버지를 속인 후, 자신들의 기쁨을 숨기고, 거짓으로 아버지를 위로하려 합니다. 자신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속은 아버지 앞에서 슬퍼하는 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의 모습은 인간이 얼마나 뻔뻔하고 악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야곱은 모든 자녀의 위로를 거부합니다. 대신에 그는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라고 선언합니다. ‘스올’은 당시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위한 지하 세계로 생각했던 곳입니다. ‘스올’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는 곳이 본문인데, 이것은 요셉의 죽음이 야곱에게는 삶의 의미조차 상실하게 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음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야곱이 요셉을 위하여 애통하는 동안 미디안 사람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그를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다시 팝니다. 성경 기자는 보디발의 신분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앞으로 요셉의 삶이 전환점을 맞게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본문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뿐 아니라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결국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노예로 팔아버리는 과정 어디에도 하나님의 개입하심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이대로 요셉을 버리신 것일까요?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필코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형들은 그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상인들의 손에 노예로 팔므로, 온 집안이 자신을 섬길 것이라는 요셉의 꿈이 헛된 것임을 증명하려고 하였습니다. 또 치밀한 전략으로 아버지 야곱까지 완벽하게 속였을 때는, 자신들의 계획이 완전히 성공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습니다. 자신들이 요셉의 꿈을 막으려고 한 행동이 오히려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훗날 요셉의 간증이 이 사실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창세기 50장 20절 말씀입니다.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우리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며, 원수들의 악한 행동을 선한 결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아무리 커다란 어려움이 닥쳐와도 낙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미소로 바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런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드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속고 속이는 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 삼고, 생명의 이정표이며 진리의 길잡이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모두가 잘못된 길을 갈 때도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는 힘과 용기를 주옵소서. 또 인생길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원수의 악한 행동을 선한 결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누군가를 편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사람에게 지어 입힌 채색옷은 무엇입니까?
2. 욕망이나 야망에서 비롯된 꿈을 꾸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꾸게 하신 꿈을 꾸고 있습니까?
3. 군중심리 속에 모두가 잘못된 길을 갈 때, 그것에 휩쓸리지 않는 나만의 방법이 있습니까?
4.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때문에 타인을 속이는 일에 익숙해진 것은 아닙니까?
5.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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