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총리에 임명된 요셉(37-43절)
오늘 본문 37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37)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이 일’은 어제 나눈 바로왕이 꾼 꿈과 그것에 대한 요셉의 해석과 대안을 가리킵니다.
지금까지 요셉의 인생 13년은 표면적으로는 꽈배기처럼 꼬임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에서 종으로 팔린 것만 해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데, 자기 주인의 부인으로부터 억울하게 모함을 당해서 이제는 영어(囹圄)의 몸, 죄수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도 신실하게 살았던 요셉은 죄수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죄수를 죄수에게 맡기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지금 어떤 지위에 있는지, 어떤 자리에 있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자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없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은 자리와 업적은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주고, 술 맡은 관원장에게 복직하게 되거든 바로왕에게 아뢰어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과 그의 부탁을 잊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한자어로 표현하면 함흥차사(咸興差使)였습니다. 아마 요셉의 실망감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고 깊어져 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 2년이 지나고 이제는 바로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살진 암소 7마리가 나일강에서 올라와 갈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데, 그 뒤에 흉측하게 야윈 암소 7마리가 올라와 살진 암소를 잡아먹었습니다. 채식동물인 소가 소를 먹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그렇게 소가 소를 먹으면 배가 터질 듯이 부르거나, 배불러서 죽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소를 먹고서도 전혀 먹지 않은 듯이 야윈 상태로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왕은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다시 꿈을 꾸었는데, 두 번째 꿈도 신비하였습니다. 한 줄기에서 이삭이 7개가 나왔는데 그것들은 꽉 차게 아주 잘 여문 것이었고, 후에 또 한 줄기에서 이삭이 7개 나왔는데 그것들은 잘 여물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나온 이삭이 물을 먹지 않고 앞에 나온 이삭을 먹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왕은 애굽 전역에 있는 모든 점술가와 현인(지혜자)들을 이 꿈을 해석해 주기를 바랐지만, 해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바로왕은 요셉을 불러서 자신이 꾼 꿈이 이야기했습니다. 요셉은 바로왕이 꾼 꿈이 상이하게 보여도 동일한 꿈임과 그 의미가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임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같은 의미의 꿈을 꾼 것은 하나님께서 속히 그 일을 시행할 것임과 그 일을 반드시 행할 것임을 의미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과 세금을 징수하는 방법을 통해서 풍년에 이은 흉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도 알려주었습니다. ‘이 일(이 말)’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신비하게도 요셉이 바로왕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고, 하나님의 길은 길보다 높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7)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요셉이 제안한 7년 풍년과 7년 흉년에 대한 대책으로 명철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을 등용하고, 조세제도를 통해서 흉년을 이길 수 있다는 내용을 바로왕은 물론, 모든 신하도 함께 좋게 여겼습니다. 원문에 가깝게 해석하면 ‘바로의 눈에 좋았고, 모든 신하의 눈에도 좋았다’입니다. 어떻게 바로와 신하들이 함께 좋게 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왕이 요셉이 히브리인이라고 배척할 수도 있었고, 신하들이 바로왕에서 “저 자는 신분이 미천한 노예요, 죄수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의 말을 믿으십니까”라고 상소를 올릴 수도 있었습니다. 또 요셉의 해석이 바른 것이 아니라고 무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왕과 신하들이 요셉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8)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을 일컬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처음 나오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경에 최초로 성령충만했던 사람이 요셉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왕과 그의 신하들은 요셉이 해몽한 것이 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 것임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애굽의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전국 수석은 물론,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최고의 교수가 되었다면, 그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보디발집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줄곧 ‘청소반장’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왕의죄수감옥대학교, 심부름학과’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왕과 신하들의 이런 탄성에 가까운 소리는 요셉의 해몽은 그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요셉이 정말 부럽습니다. 그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또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향내가 난다면 그보다 더 복된 사람, 가치 있게 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실 요셉은 지난 13년 동안 종살이 옥살이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 신실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현재의 일에 신실한 것보다 미래를 더 잘 준비하는 것이 없습니다.
요셉을 칭찬하는 바로의 말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요셉은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을 잘 대비하기 위해서 33절에서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십시오”라고 제안했습니다. ‘명철하다’라는 것은 ‘분별력이 있다’라는 의미로 이론적인 부분이라면, ‘지혜있다’라는 것은 ‘감각이 있다’라는 의미로 실제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론과 실제를 모두 겸비한 사람을 택해서 관리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왕의 말은 “명철하고 지혜있는 사람은 바로 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왕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의 뒤를 봐주시기 때문에 요셉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파격적인 인사가 단행되었습니다.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30살짜리 재상이 탄생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인정받는 정도의 소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보디발 장군의 집을 다스리게 되었고, 감옥을 다스리게 되었고, 마침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집 가운데 하나인, 애굽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지난 13년, 아니 30년 동안의 삶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갑자기’는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눈을 떠 보니 유명하게 되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은 매일 매일의 삶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의 모습에는 과거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요셉의 총리 위임식이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41-43)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바로왕은 애굽 백성들 앞에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그 증거로 자신의 인장반지(옥쇄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에 끼워주었습니다. 그 반지에는 소유자의 이름이나 소유자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대통령이 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세마포 옷은 당시의 고관들이나 제사장이 입었던 옷이었고, 애굽의 왕들이 죽으면 그 시신을 쌀 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옷은 무게로 달아서 팔았는데, 그 값이 금값보다 비쌌다고 합니다. 옷이 신분을 상징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군인이라면, 바로왕은 지금 요셉에게 별이 4개의 대장 계급장이나, 별이 5개가 달린 원수(元帥)의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혀주는 것과 같습니다.
위임식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왕은 요셉을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태우고 대중에게 선포했습니다. 버금 수레는 오늘날로 하면, 버스보다도 더 긴 최고급 리무진 승용차를 관용으로 주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애굽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이방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애굽 최고의 관직에 앉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더 나아가 기분이 나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수천 명, 수만 명이 일하는 공장에서 말단직에 있던 외국인 노동자가 갑자기 그 나라의 최고 기업의 부회장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그를 부하로 데리고 있던 사람들은 훨씬 더 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바로왕이 하사한 버금 수레를 타고 행차할 때마다 앞선 사람들이 “엎드리라”라고 외쳤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임금이나 고관들이 지나가면 머리를 숙이게 했습니다.
요셉의 결혼과 활동(44-45절)
(44)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수족을 놀릴 자가 없다’는 ‘어느 누구도 손발 하나 까딱해서는 안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요셉은 애굽에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되었고, 애굽 전역에 실제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에 있게 되었습니다.
(45)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바로왕은 요셉이 총리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2가지의 배려를 해 주었는데, 이름을 바꾸어 주었고, 결혼하게 해 주었습니다. 바로왕은 요셉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그를 총리로 임명은 했지만, 이방인을 거부하는 애굽사람의 정서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빌 게이츠와 같은 재능을 가진 외국 사람을 국무총리로 세우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국내에 산적(山積)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인슈타인’과 같은 머리를 가진 외국 사람을 총리로 세우려 한다면 국민의 항의가 빗발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그냥 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이름을 빌 게이츠는 ‘문빈’과 같이 개명해 주었을 것이고, 또 아인슈타인은 ‘안한석’과 같이 이름을 바꾸고 세울 것입니다. 요셉의 이름이 바꾸어 준 것이 이와 비슷합니다.
바로왕이 요셉에게 지어준 ‘사브낫바네아’는 그 뜻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 신께서 말씀하시니 그가 살고 있도다’의 의미나 ‘사물들에 알고 있는 그 사람’, 또는 ‘생명의 지탱자’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든지, 요셉에게 애굽의 생명과 애굽의 운명을 맡겼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또한 요셉은 온 지방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도 했습니다. ‘제사장(코헨)’으로 번역된 단어는 ‘제사장’이라는 뜻도 있지만 ‘우두머리, 통치자’, ‘주요 공직자’ 등으로도 번역됩니다. 즉 보디베라는 종교적인 수장과 상당한 지도력을 동시에 가진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가톨릭으로 하면 중세시대 어느 지역의 ‘대주교’ 정도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요셉이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직무를 태만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도 그러했고,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서도 그러했듯이 총리가 되어서도 주어진 일에 신실했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애굽 온 땅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이상, 애굽의 상황을 직접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나온 요셉의 삶은 칠흑같이 어둡고 긴 터널 속을 걷는 것만 같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구덩이, 깊이가 수백 미터나 되는 구덩이 속에 빠져서 그 속에서 도와달라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듣지 못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외면하시는 것 같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신 것만 같이 여겨졌었습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도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응할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즉 요셉은 종살이와 옥살이하는 시간에도 여전히 주님의 은혜의 해 속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의 자리가 쉽지 않아 보여도,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러면 오늘이라는 시간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날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지만 돌아보면 지금의 나를 만든 그것은 그 발버둥보다 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총이었던 것을 깨닫곤 합니다.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과 신앙에서 과정에 충실해야 함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눈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고,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상황과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오늘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날인 것을 확인하고 감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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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을 돕는 질문
1. 요셉은 종살이와 옥살이 13년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쉽지 않았던 삶이 세월이 지나고 나서 그렇게 살았던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은총이었음을 확인되었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2. 요셉의 요셉 됨은 지난 세월 매일 매일 주어진 삶에 신실했던 것의 결과였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 신실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3. 요셉이 입었던 곳은 채색옷에서, 종의 옷, 죄수복, 세마포 옷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의 지난 삶은 어떤 옷들을 입었습니까?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4. 눈을 들어 하나님을 목적 삼으며, 오늘을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의 시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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