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두 땅이 있습니다. 하나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의 땅 애굽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예비하신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리로 가서(1-5절)
(1-5)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왜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들고 애굽은 번성할까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이라고 하면 그 땅은 풍요롭고 인간이 살기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본문은 정반대입니다. 심지어 야곱은 가나안 땅에 아들들과 잘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기근을 보내셔서 그 곳을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런 상황을 직면하면 자기중심적인 우리 인간들은 문제가 땅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빵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의 육이 문제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기근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과 그 아들들, 즉 하나님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약속의 땅을 떠나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는 것은 약속의 땅이란 원래 육을 입은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땅에 맞게 변화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그의 아들들을 약속의 땅에 살기 합당한 존재로 바꾸기 위해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곡식을 좇아(6-10절)
(6-8)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요셉은 총리로서 식량 배분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그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중심에 있습니다. 나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내가 살기 위해, 식량을 찾고 요셉을 찾은 겁니다. 이런 자들에게 요셉은 돈을 받고 식량을 팝니다. 그게 세상 이치입니다. 원하는 것을 갖고 싶으면 그에 합당한 값을 치뤄야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그래서 요셉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여기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살기 위해 찾아갔던 애굽이 잃어버린 형제와의 만남의 장소로 변해야 합니다. 식량에서 관계로, 나의 배를 채우는 것에서 주님을 사모하는 것으로 관심이 바뀌어야 합니다. 마음이 이렇게 통째로 바뀐 자만이 약속의 땅에 살기 합당한 자입니다. 그래서 형들을 보자마자 요셉은 그들과의 관계 회복을 계획합니다. 식량을 팔고 얼마를 받는 것에는 이제 관심이 없습니다. 나중에 보면 돈도 안받고 식량을 넘치게 퍼줍니다. 정당한 대가가 오가는 사이가 아닌 아무런 대가없이 생명을 퍼주는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형들은 관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곡물만 사면 됩니다. 8절에 보면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13절에서 그들은 요셉이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요셉은 없는 자입니다. 없는 자는 단순히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진 자가 아닙니다. 없는 자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 세상의 세속적 원리와 법칙에서 자유로운 자를 뜻합니다. 없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포착될 수도, 관계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깐 형제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요셉에게서 일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며 그들이 변화를 위해 기여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의도한 변화는 변화가 아닙니다. 그건 결국 나의 의가 될 뿐입니다. 진짜 변화는 내가 포착할 수도 의도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살다 보니깐 변화한 겁니다. 과거를 회상해 보니 내가 달라진 겁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정탐꾼들(9-14절)
(9-11)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요셉은 이제 형제들을 정탐꾼으로 누명을 씌우고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게 한 후 자신이 사실 누구인지를 형제들과 아버지에게 극적으로 밝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근거가 이전에 그가 꾼 꿈입니다. 정확하게 어떤 꿈인지 나와있지는 않지만 아마 창세기 37장에 형제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과 해와 달과 열한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지금 눈앞에서 자기에게 절하는 형들을 보고 예전 꿈이 생각난 겁니다. 성경에서 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입니다. 꿈은 이 땅의 현실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꿈에서 밥을 먹었다고 배부른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꿈은 결국 현실이 됩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 하자면 현실은 결국 하나님께서 꿈으로 계시하신 데로 완성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 넘기고, 보디발의 아내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만난 관원장은 요셉과의 약속도 잊었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합력하여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으로 완성됐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을 주관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계시입니다. 주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지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장악하고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형제들에게 누명을 씌웁니다. 그들은 물론 정탐꾼이 아니었지만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무작정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자 형제들의 속마음이 드러납니다. 11절에 보면 그들은 확실한 자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여기서 확실한 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켄’은 영어로는 ‘honest’ 혹은 ‘right’ 이라고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자신을 옳고 정직한 자라고 변호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이렇게 나의 존재 구축에 불리한 기억은 삭제하고 조작하여 나를 올바른 사람으로 포장합니다. 동생을 살해하려다 팔아먹고 아버지에게는 짐승이 죽였다고 거짓말까지 한 자들이 자신을 옳고 정직한 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제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 삭제한 기억들 마저 모조리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숨겨진 기억들을 모조리 폭로하며 형제들의 실체를 까발립니다. 여기서 눈 여겨 봐야할 점은 요셉은 그들이 정탐을 해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인으로 이미 상정해 놓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진짜 죄를 폭로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가끔 본인은 솔직히 세상 사람들보다는 죄인이 아닌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이들은 본인이 정탐꾼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를 죽인 죄는 잊고 그저 정탐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겁니다. 죄를 지었던 짓지 않았던 우리는 모두 예수 죽인 자들입니다. 십자가가 그것을 증거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 예수를 믿고, 나의 선행들을 통해 자기 의를 쌓는 것 자체가 은혜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증거입니다.
(12-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형제들이 자신을 정직하고 옳은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요셉은 재차 그들을 죄인으로 몰아 세웁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자신들이 열두 형제인데 막내는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다고 하는데 마치 요셉이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죽이려고 하다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팔아 넘겼습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지만 요셉의 형제들은 거짓말을 하고 기억을 조작해서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포장합니다. 그랬더니 요셉이 너희의 그 말이 바로 너희가 정탐꾼인 이유라고 합니다. 정탐꾼은 거짓말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분과 목적을 속이고 적에게 잠입하여 내 나라를 위해 거짓말 하는 자들입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조작된 기억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속이고 거짓말로 자신의 의를 내세웠습니다. 국가란 결국 나의 연장선이기에 나의 나라를 위해 거짓말 하는 정탐꾼들이나 나의 의를 구축하기 위해 거짓말 하는 요셉의 형제들이나 본질적으로 같다는 겁니다.
베냐민이 오지 아니하면(15-17절)
(15-17)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요셉은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베냐민이 라헬의 아들인 것을 알고 그랬는지는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창세기43장 29절에서 베냐민을 보고 한눈에 자기 어머니의 아들임을 알아본 것으로 보아 친동생을 만나기 위해 형제들에게 그러한 요구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는 동생 베냐민이 자신처럼 형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돼서 하루빨리 그를 자신의 보호 아래로 데려오려고 했는 지도 모릅니다. 어찌됐던 그렇게 야곱의 아들들은 베냐민을 데려와야만 정직한 자임을 인정받고 식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죄 없는 한 형제를 통해 다른 원수된 형제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생명의 주관자요 잃어버린 형제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는 이 명령은 야곱 집안에 감춰져 있던 죄악을 드러냅니다.
야곱은 자신이 베냐민을 품고 지키려고 했습니다. 4절에 보면 베냐민은 형제들과 애굽으로 가지 않았는데 그것은 요셉처럼 베냐민 마저 죽임을 당할까 야곱이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베냐민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대로 이야기 하면 하나님께서 베냐민을 지켜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요셉의 명령은 야곱에게 아무리 본인 힘으로 아들을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베냐민 뿐만 아니라 요셉도 사실 하나님이 지키셨음을, 그간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한 계시를 이루기 위한 섭리였음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야곱의 요구는 형제들의 죄 또한 폭로했습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또 다시 라헬의 아들을 야곱과 떨어뜨려야 하는 고충을 겪으면서 과거에 자신들이 요셉을 죽이려 했던 일을 되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 그들의 죄를 먼저 폭로합니다. 그건 곡식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먼저 그들의 죄가 폭로 당하여 철저하게 자신에 대해 죽지 않으면 관계 중심으로 바뀔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하는 겁니다. 가둠없는 자유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왜 예수님 앞에 오셨습니까? 빵을 먹기 위함입니까, 예수님과의 관계를 위함입니까? 기적을 원하기 때문입니까, 그분의 말씀을 사모해서입니까? 주님 앞에 빵만 좇던 우리의 마음이 낱낱이 드러나, 우리의 옛 자아가 철저히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눈을 돌리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 앞에 기도하러 나오면서 사실 우리는 빵을 위해 나왔습니다. 나의 삶의 문제들이 해결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왔음을, 주님을 그저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존재로 여겼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 기도 드리며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더 돈독해 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은혜를 기억하고 묵상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왜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었을까요? 우리 삶 속에는 어떤 기근이 있는지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곡식을 좇고 있나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좇고 있나요? 그런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시나요?
3.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요? 확실한 자인가요, 정탐꾼인가요?
4. 주님과의 관계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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