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324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앞 서 살펴본 42장은 양식을 찾아서 멀리 애굽 땅까지 찾아온 요셉의 형들이 드디어 요셉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형제들을 십수 년만에 만나게 해 준 것은 흉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요셉이 예측했던 대로 7년 대흉년은 어느 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 주위의 모든 나라에 심한 가뭄이 닥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식을 찾아서 애굽으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 행렬에 야곱의 열 아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형들을 계속적으로 심문하면서 지금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아 내고자 합니다.
생명을 보전하는 요셉(18-20)
(18-20)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18절에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에서 ‘경외’는 ‘두려워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는 보통 두 가지가 있는데, 본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단어는 파멸될까 두려워하는 공포심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닌, 경건생활과 관련 있는 ‘섬기다’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20절에서는 요셉이 과거에 자신을 구덩이에 던져 굶어 죽게 하려다가 결국 자신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넘겼던 형제들에 대해 오히려 자비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이 굶주릴 것을 염려하여 곡식을 가지고 가라고 배려하는 것을 볼 때,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무엇인지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인도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며 형들에게 안도감을 주고 있습니다. 18절 이전까지만 해도 요셉은 바로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고 말하여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하며 절망스럽게 느끼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을 형제들이 듣고 불안한 마음이 줄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요셉은 지혜롭게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한 요셉의 언급은 바꿔 말하면 당신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겁낼 것 없다‘고 말한 뜻과 같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오래 붙들어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에서 그들의 가족이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먼저 한 형제만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아홉은 뒤에 남아 애굽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고 16절에서 제안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제안을 어떤 이유에서 인지 바꾸게 됩니다. 그리하여 형제 중에 한 형제만 애굽에 붙들려 있어야 하고 다른 아홉은 가나안에 돌아가게 합니다.
이렇게 요셉이 행동한 이유를 아홉 명의 아들들의 설득이 야곱으로부터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도록 더 잘 설득시킬 수 있다고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은 ‘어떻게 한 아들이 가나안의 굶주린 가정에 충분한 곡식을 가지고 갈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아홉 형제들이 곡식을 가지고 가면 더 많은 곡식을 가져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요셉은 한명만을 붙잡아 두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요셉은 자신을 잃었다고 많이 아파하셨을 야곱을 생각하여, 너무 많은 형제들을 애굽 땅에 묶어두면, 이는 야곱에게 치명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이든 간에 요셉은 지금 형제들을 골탕 먹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18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생명을 보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지금 형제들을 대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형제들(21-23)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참으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21절 히브리어 성경에는 있습니다. 이 단어를 넣어서 직역을 해보면 ’우리는 참으로 죄를 범한 자들이다‘ 라고 번역을 할 수 있는데, 이는 요셉의 형제들이 가슴속에 품었던 아주 짙은 회한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범죄하였도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요셉의 형제들이 자신들이 사악함을 가지고 윤리적으로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저질렀다는 의미를 포함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 죄로 임하는 결과가 엄청난 고통과 시련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요구대로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오려 하면 요셉이 없어지고 난 후에 베냐민을 자신의 목숨처럼 생각하는 아버지 야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하고, 요셉의 요구를 무시하면 이 약속의 담보로 남게 될 형제 중 한 사람의 안전을 보장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고민을 통해 과거 자신들이 동생 요셉을 핍박했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던 죄가 생각나 그들은 더욱 극한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 그들은 모두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마치 요셉의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 이들은 순간적으로 동생이 미워서 그를 팔아 넘겼지만, 그들에게도 양심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20여 년의 세월이 결코 마음 편한 시간이 아니었으며 언제나 조마조마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순간 ‘이제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죄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상처받는 피해자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많은 경우 죄는 가해자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아무리 창세기의 앞장들을 되 집어 보아도 르우벤이 본 절과 같이 말을 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두 번에 걸쳐 요셉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동생들의 행동을 제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창세기 37장21절에서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라는 말이었고, 또 한 번은 창세기 37장 22절의 ‘피를 흘리지 말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번의 말을 종합해 보면 르우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는 것은 허용하였고 단지 요셉을 죽이는 일만 막으려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형제들이 요셉에 대해 가졌던 증오심 자체를 없애거나 요셉에게 해를 가하려는 행동 자체를 단호하게 말리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르우벤은 동생들에게 죄 자체를 만류하였다는 느낌을 주는 본문의 말을 할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때 르우벤이 동생들의 요셉을 죽이려 하는 생각 자체를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요셉에 대한 다른 어떤 제재를 가하는 것이나 시기심조차도 엄히 꾸짖었다면 과거 요셉이 당했던 고난은 물론 지금 그들에게 닥친 고난도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르우벤도 이일에 대해서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르우벤은 동생들을 적극적으로 말리거나 꾸짖지 못했던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동생들의 잘못만 지적하는 자기 위주의 말만을 뱉어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23)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형제들은 요셉이 있는 곳에서 이 모든 고백을 하지만, 요셉에 대해 아무 것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자기들 앞에 있는 ‘애굽인’ 관료가 두 언어를 할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본 절에 나타난 이런 행동을 통해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형제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려고 했던 것입니다. 21절부터 23절까지 각 절마다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들었다’라는 동사인데, 형제들의 반응과 요셉의 반응이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21절과 22절에는 형제들은 모두 ‘들을 수 있었으나 듣지 않았다’는 의미가 담긴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했지만, 23절에서 요셉은 ‘듣지 아니하는 것 같았으나 다 들었다’라고 상황적 대조가 이루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하여 동생의 간절한 요청을 듣지 않고 외면해 버린 형제의 모습과 복수를 할 수 있고 받은 대로 돌려 줄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요셉이었지만,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행동하고 있는 대조적 모습에서 과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나는 지금 르우벤처럼 내가 만든 죄의 모습과 죄의 결과들을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요셉의 모습처럼 어렵고 힘들지만, 상대방의 과오와 죄를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요셉(24-25)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요셉은 과거에 자신을 팔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르우벤이 동생들을 책망하자 그의 마음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다른 장소로 옮겨 울 수밖에 없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20여년 만에 형제들을 대하였고 뿐만 아니라 지난 세월에서 밀려오는 회한으로 인해 큰 소리로 통곡하며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냉정을 되찾은 요셉은 시므온을 형제들에게서 분리해 형제들 앞에서 그를 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정확히 요셉이 시므온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시므온이 형제들을 선동해서 요셉을 박해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고, 디나의 강간 사건에서 나타난 시므온의 잔인함 때문에, 야곱이 나중에 시므온의 소식을 들었을 때 다른 아들들이 잡혀 있는 것보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해석들도 있지만,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요셉은 자기 종에게 형들의 자루에 곡식을 채우고 여행하는데 필요한 음식도 주라고 명령하고, 가장 놀라운 사실은 각 사람의 자루에 곡식을 사려고 가져온 돈을 돌려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요셉은 또한 자신의 형제들이 각자의 식구들을 위해 집으로 가져갈 양식 외에 여행 중에 그들이 먹을 음식까지 준비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창세기 37장에서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렸던 요셉의 상황과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형들이 자신의 목숨보다 돈을 높이 평가한 때를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겨우 은 이십의 값어치로 팔려가며 혹독한 노예살이와 감옥살이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어떤 불이익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오늘 본문에 펼쳐진 장면들은 요셉이 형들을 징벌하는 장면으로 묘사한다고 설명을 하기도 하지만, 형제들이 저지른 일에 비교하면, 요셉은 그 어떤 장면에서도 형제들을 골탕먹이거나, 그들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형제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직면하도록 하여, 그들의 잘못을 되 집어 보게 하는 것 이상의 어떠한 조치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행하기 참 어려운 용서와 사랑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었던 형제들을 용서해 나가는 요셉의 모습과 함께, 지난 날들의 과오와 죄를 고백하며 아파하던 요셉의 형제들의 모습들을 묘사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의 근본에서는 본문에서 드러낸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 르우벤의 모습이 만연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전가에만 급급한 나머지,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도 기억하지 못했던 르우벤의 모습은 그 어떤 사람의 모습이 아닌 나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오래전 교회를 떠나던 한 학생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학생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좋지만, 그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악의적으로 죄악을 있는 힘껏 뻔뻔하게 가리려 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없어 교회를 떠난다’라고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당시, 저는 다른 사람이 생각이 나지 않고, 나의 모습은 어떤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셀 수 없는 죄에 대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용서를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나는 지금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습니까? 구원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받아야 하는 회개와 용서의 권리로 사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고민하며,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지만, 회개하며 자기 부인을 이루며, 변화하려고 하는 기회로 여기며 감격하며 살아가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십시다. 오늘 하루도 주님이 주신 말씀으로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복된 하루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수많은 죄들을 짓고, 그 죄들을 덮고, 불안과 초조한 삶을 살았던 저희들에게, 용서와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 속에 진정한 회개와 돌이킴이 있게 하시고, 더 이상 나의 자존심과 교만함을 지키기 위하여, 거짓된 삶을 덧대어 가는 어리석은 인생 되지 않게 하옵소서. 기회주실 때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죄 씻음의 진정한 기쁨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그것을 받은 대로 돌려주지 않은 요셉처럼, 내 인생에도 그런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순간들이 있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2.요셉을 팔리게 내버려둔 르우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전가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런 모습은 나에게 없는지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3.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오래된 죄의 기억이 때로는 우리의 삶을 침식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은 요셉의 형제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혹시 나에게도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4.복수보다 용서와 화합을 선택해 나가는 요셉을 보며, 내 인생에도 그렇게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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