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하나님이 어찌하여(26-28)
사방에서 유일하게 곡식을 구할 수 있었던 애굽으로 간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정탐꾼으로 몰려 호된 고초를 치릅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애굽으로 불러오기 위해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나머지 형들은 되돌려 보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많은 곡식을 주었고, 가는 길에 먹을 양식도 따로 챙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형들 몰래 그들이 가져왔던 모든 돈들도 곡식 자루에 담아주었습니다. 이를 알 턱이 없는 형들이 길을 가다가 하룻밤을 묵으려고 여관에 들어갔을 때 자루에 돈이 그대로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26-28)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요셉을 팔아넘겼던 돈을 받고 좋아했던 형들이 지금은 요셉이 준 돈을 받고 깊은 근심과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들의 단말마적 외침,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이 말에 그들의 깊은 당혹감이 묻어납니다. 요셉은 지금 22년 전 사건을 그대로 재연하는 중입니다. 한 형제, 곧 시므온을 애굽의 감옥에 남겨둔 채, 나머지 형제들이 돈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가게 한 것은, 자신을 팔고 그 돈을 가지고 아버지께로 갔던 사건의 재연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일로 자신들을 되돌아보게 만들려고 하시는 듯합니다.
상황이 이 정도 되니까 요셉의 형들이 하나님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형들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이 언급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소름 끼치도록 두려움이 엄습하자 그들은 혼이 나서 떨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마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잊고 사는 선데이 크리스천과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근이 오기 전까지는, 애굽에서 요셉을 만나고 정탐꾼으로 몰리기 전까지는, 지금 두려움이 엄습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존재를 잊고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평온한 일상,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지만 그 삶의 귀결이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라면 그 삶은 오히려 우리에게 불행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육신의 안락함이 우리의 영혼까지 깊이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3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나온 뒤로 하나님을 떠올리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신앙인으로서는 긍정적 반응인 셈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다가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 해석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하나님께서 왜 자신들에게 이런 일들을 겪게 하시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현재를, 과거와의 연장선상에 놓고, 왜 오늘 이런 일들을 겪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지난날을 반성하기 위해 양심을 깨우는 중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애굽에서 당했던 이 모든 일들이 지난날 자신들이 요셉에게 저질렀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런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동생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사막의 대상들에게 팔아넘겼다는 양심의 가책을 마음속에 오래 묻어두고 있을지언정 꺼내어 직면할 용기조차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요셉 앞에서 둘러댔던 말처럼 없어졌다고, 실종되었다고 말하고 다니며 그렇게 자기들을 합리화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직면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여정은 22년 전 요셉을 판 값을 가지고 희희낙락하며 돌아갔던 여정과 달리 자신들의 죄악이 무엇이었는지 회상하고 되새김질하는 시간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의 죄가 용서 받는 은총을 누리지만 죄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인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으나 그 죄에 대한 책임으로 다윗의 네 명의 아들을 데려가셨음을 기억하면 쉽습니다.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 짓는 것 가볍게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은 언젠가 그 죄를 밝히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회개는 복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직면할 수 없는 죄를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를 정결하게 만드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듬어가시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어가시며,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우리를 은혜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물론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과론에 근거해서, 이런 일의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양한 변인들이 작용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신앙 안에서 적절한 균형감을 가지고 우리의 현재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이끄시려는 선하신 뜻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상기하며, 순결한 삶을 이어가시는 교우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애굽에서의 일을 알리다(29-34)
형들이 가나안 땅에 이르러 아버지 야곱에게 그들이 당한 일을 알립니다. 형들은 자신들이 애굽의 총리로부터 정탐꾼으로 오해 받은 내용을 해명했던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밝힙니다.
(31-34)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앞서 형들이 요셉 앞에서 가족사를 말했던 내용과 지금 아버지 앞에서 진술하는 강조점이 조금 다릅니다. 요셉에게 말할 때는 막내 곧 베냐민은 아버지와 함께 있고, 하나, 곧 요셉은 없어졌다고 말한 데 반해서 아버지에게 진술할 때는 반대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바꿔서 말합니다. 창세기 기자가 의도한 것인지, 실제로 형들의 말이 그러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듣는 사람이 가장 듣기 뼈아픈 말을 제일 뒤에 언급한 셈입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모든 일을 보고한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 정탐꾼으로 몰려 3일 동안 감옥에 갇혔던 일과 시므온이 투옥된 것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저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여기 두라”고 전할 뿐입니다. 요셉이 또 42장 20절에서,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했으나 이들은 베냐민을 데려가면 애굽에서 자유로운 상거래가 가능해질 것이라며 그 수위를 낮춰 완곡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아버지를 안심시켜, 요셉이 요구한 대로 베냐민을 데려가는 데 있었습니다. 붙잡혀 있는 시므온을 데려오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충격을 받아 두려움에 휩싸일까 하여 수위를 대폭 낮춰서 설명했으나 야곱은 이 말에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돌아온 아들들을 나무랍니다.
(36)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야곱의 말 속에 아들들을 향한 불신이 진하게 베어 있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보낼 마음이 없을뿐더러 시므온도 죽은 자식으로 간주하겠다고 밝힙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시 아들들을 애굽에 보낼 생각이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36절에,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는 이 말은 형제들의 “범죄”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야곱 입장에서도 아들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려운 것이,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곡식 자루에서 발견된 돈의 의미가 야곱 입장에서는 시므온의 몸값을 나눈 것일 수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때 르우벤이 나섭니다.
(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야곱에게 르우벤의 말이 먹힐 리 없습니다. 르우벤의 아들이면, 야곱의 손자인데 베냐민이 잘못된다고 한들 야곱이 이들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르우벤은 베냐민을 반드시 데려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저 말을 내뱉었지만 사실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의 안전을 신경쓰고 있음을 어필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르우벤은 마치 베냐민이 자기 아들이라도 되는 듯이 그 안전에 크게 마음을 쓰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형들이 요셉을 대했던 20년 전의 태도와는 다른 반응입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던 까닭은, 단순히 한 어머니의 혈육을 보고자 하는 그리움을 넘어서서, 자신이 유년 시절에 형들로부터 겪었던 어려움을 베냐민도 여전히 겪고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늙었고, 사자와 같은 형들 속에서 눈칫밥이나 먹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을 지나며 하나님은 형들의 마음을 만지셔서 배다른 막내 동생을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놓을 만큼 끈끈한 가족애를 갖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내 인생을 인도해주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의 인생도 인도해주시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람답게 생각하고 살아가도록 변화시켜 가십니다. 오랜 시간 우리를 다듬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눈앞에서 드라마틱하게 우리의 인생을 역전시키는 기적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마음판에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듯, 구원받은 사람에 합당한 삶도 우리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오랜 시간 요셉의 형들을 변화시켜 가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함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는 하루 보내게 해주시옵소서. 늘 선하신 뜻으로 우리의 하루를 인도해주심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자루 속의 돈을 본 형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8) 이런 반응처럼 내 인생에서 이해되지 않는 일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본 적은 언제였는지 그 일의 귀결은 어떠했는지 기록해보세요.
2. 요셉과의 나눴던 대화를 아버지 앞에서 재연하면서 어떻게 바꾸는지 비교해보고, 이렇게 말을 바꾸는 것에 대해 판단을 내려봅시다. 그리고 이렇게 실재와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세요.
3. 아들들의 말과 자루에서 나온 돈이 서로 다른 메시지를 주고 있음을 본 야곱이 베냐민을 데려가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누가 어떻게 말을 했습니까? (37) 이 말은 적절한 말이었을까요? 나라면 어떻게 말했을 것 같습니까?
'새벽기도 > 창세기(새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43:16-34 (0) | 2022.10.26 |
---|---|
창세기 43장 1-15절 (0) | 2022.10.26 |
창세기 42:18-25 (0) | 2022.10.26 |
창세기 42:1-17 (0) | 2022.10.26 |
창세기 41:46-57 (0) | 2022.10.26 |